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199화 (200/277)

199화

나는 참 염치없게도 일리야의 품에 안긴 채 정성스럽게 위로받았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끝없이 나를 달랬다.

나의 약함이 기껍다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흡족해하면서.

띠링!

[성좌 ‘일리야 교수님은 이상해’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일리야는 별거 안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야해]

뭐…… 사실 아주 순수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아무 데나 입술을 묻으며 본인 욕심도 채워냈으니.

그렇게 훌쩍거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말끔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램프의 불빛을 쬐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붕어눈이 되어 일리야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일리야가 대답했다.

“네가 일부러 나와 발렌시아 후작이 마주치지 않게 거리를 두는 듯해서.”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르지?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돌연 루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발렌시아 후작이 준 건가?”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실 팔찌는 네 동생이 준 거고 브로치는 인벤토리 아이템이라서 하고 다닐 뿐, 넌 원래 장신구는 하지 않으니까.”

퀘스트 때문에 마지못해 하고 있는 반지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켕겼다.

“다른 남자가 주는 반지를 껴도 돼. 뭐든 받아 들여줄 수 있다. 내 곁을 떠나는 것만 제외하면.”

“…….”

“자꾸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

“어떤 생각인데요?”

“네가 어디론가 도망쳐버릴 것 같다는 그런 생각.”

그 말에 뜨끔해졌다.

실제로 낙원으로 도망칠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전 갈 데도 없어요.”

“그건 모를 일이지.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가버릴 수도 있으니.”

그런 걱정이라면 정말이지 기우였다.

“절대로 안 가요, 거긴.”

오늘 마법 동물들을 보며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곳에 있어 내가 행복해졌다는 걸.

나를 절망에 빠뜨리는 일이 생겨도, 거대한 시련이 연속으로 찾아와도, 이만큼이나 온전한 사랑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쓰러지고 싶은 순간마다 번번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용기를 주었다.

나는 심호흡 후 일리야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클라이드, 기억나세요?”

“…클라이드? 발렌시아 후작 다음으로 만날 남자인가?”

역시나 일리야도 클라이드를 기억하지 못했다.

안타깝고 서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더더욱 클라이드를 되찾아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분명해졌다.

“제가 찾아드릴게요.”

당신의 유일한 가족을.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일리야는 천천히 왼쪽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자리한 곳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이상하게 완벽한 프러포즈를 받은 기분이군.”

그가 나를 집어삼킬 듯이 가까이 다가와 뒤늦은 양해를 구했다.

“키스해도 되겠나?”

미미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꼭 알 수 없는 상실감으로 우는 것처럼 보여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니 여름 더위보다 뜨거운 그가 나를 샅샅이 녹여냈다.

* * *

일리야는 지쳐 잠든 테레제의 품에 이마를 대고서 간신히 본성을 억눌렀다.

미움받지 않을 지점까지 절묘하게 욕심을 부린 뒤 이성을 되찾는 건 정말이지 끔찍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이 사랑스러운 것을 눈앞에 두고 냉정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그는 해소하지 못한 열이 잔뜩 차오른 시선으로 테레제의 얼굴을 뜨겁게 훑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세상모르고 잠든 건지.”

그녀가 말한 클라이드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일리야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또한 테레제를 한없이 약하게 만들 약점이라는 사실도 간파했다.

악마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는데 말이다.

테레제의 경계심 하나 없는 사랑스러운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무력해졌다.

속살까지 남김없이 발라먹으려다가 되레 흠칫하게 될 정도로.

‘정신이 불안정해진 이유가 그 클라이드라는 녀석 때문인 듯한데.’

아마도 테레제의 창조물 중 하나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테레제가 이토록 흔들릴 리가 없었으니.

일리야는 자꾸만 신경 거슬리게 떠오르는 낯선 이름을 머릿속으로 발음해보았다.

클라이드. 클라이드. 클라이드.

“클라이드.”

네가 대체 누구이기에 이름을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공허한 기분이 들게 하는 거지?

의문점이 생겼다면 진상을 밝혀내면 그만이었다.

일리야는 테레제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벗어나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연구실을 나섰다.

부쩍 밤이 짧아져서인지 세상이 온통 파랬다.

그 속에서 홀로 금빛 마력을 풀풀 휘날리며 고고한 자세로 선 늑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현관을 나선 일리야를 쳐다보았다.

마법 동물은 악마와 천적이라 그를 보자마자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경계해야 마땅했다.

하나 늑대는 그러지 않았다.

“너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늑대가 코웃음 쳤다.

“크륵.”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야 내게서 마기가 느껴질 테니까.”

글쎄. 네 영혼을 확인해보는 게 어때?

일리야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보고는 놀란 얼굴로 심장 부근을 감싸 쥐었다.

“……!”

영혼에 찍힌 악마의 낙인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언제 사라진 거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머릿속이 순식간에 의문으로 가득 차올랐다.

아니, 애초에 타락한 자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테레제가 뭔가 한 건가?’

아니다. 테레제의 힘이 아니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역행 현상이었다.

일리야는 허공에 거울을 생성하여 모습을 확인했다.

붉은 기 없이 새파란 빛이 흐를 정도로 까만 머리카락과 밝은 녹안.

그리고 하얀 날개라니…….

“한데 내가 왜 타락했었지?”

천계의 진실에 충격을 받기는 했었다.

마계와 본질이 같다는 사실에 몹시 실망하기는 했어도 천계를 없애야겠다는 확신을 얻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자신은 애초에 그리 충동적인 성향이 아니었다.

사건에 빈틈이 있었다.

일리야는 실로 오랜만에 천국의 문을 열었다.

우우웅!

성스러운 빛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문이 반으로 쪼개지며 주인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뒤틀리기는 한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손쉽게 천계로 진입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일리야는 천국의 문으로 성큼 들어갔다.

* * *

1위 방송 [BJ헬하우스]의 관리자인 체호프는 초조한 얼굴로 일간, 주간, 월간 랭킹 차트를 전부 띄워 집착적으로 그래프를 확인했다.

“그래서 내일 예상되는 [BJ악역영애] 채널의 랭킹이 뭡니까?”

체호프 컴퍼니 분석실 팀원이 대답했다.

“7위입니다.”

절망적인 분석 결과였다.

“10위권에서 수십 년간 미동 없던 채널들을 이렇게 허무하게 제치고 올라온다고요? 그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직원들은 체호프의 울분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으나 말이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오즈월드이지 않은가.

그가 지닌 화제성은 어지간한 BJ들이 감히 비비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솔직히 오즈월드만큼 존재감 있는 캐릭터가 어디 흔하던가?

체호프는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채널 관리자 TOP10’ 차트를 확인했다.

[1위 오즈월드]

[2위 체호프]

“제가 운영하는 채널이 1위인데 어째서 저는 2위인 거죠? 이 차트 분석이 무엇을 근거로 이뤄진 겁니까?”

“오즈월드 컴퍼니 자체의 영향력이 여전히 압도적이라…….”

“장난합니까? 체호프 컴퍼니가 오즈월드 컴퍼니보다 왜 영향력이 낮단 말입니까?”

직원들은 체호프가 스트레스로 두 눈이 벌게진 채 닦달하니 그냥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체호프는 오즈월드보다 더 비싼 옷을 입고, 더 좋은 샵에서 관리받으며, 더 훌륭한 건물에 최신 설비를 들인 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보다 뒤떨어지는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총무과에서 억지로 분노를 삭이는 중인 체호프를 찾아왔다.

“대표님, [BJ헬하우스] 채널에 새로운 스킬을 대대적으로 추가해야 하는데 예산이 부족합니다.”

“다른 하위 채널에서 뽑아오면 되잖습니까!”

“……이미 하위 채널 BJ들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운 상태입니다. 여기서 더 무리하면 그들은 전부 죽을 텐데요?”

“제발. 생각이란 걸 하세요.”

체호프는 억지로 미소 지은 얼굴로 답답한 소리를 내뱉는 직원에게 말했다.

“그것들은 1위를 위해 존재하는 식민 채널입니다. 100위에도 못 든 버러지들을 폐기하지 않고 이렇게나마 기회를 주는 제 진심을 모르겠습니까?”

“…….”

“저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겁니다. 이게 최선이라는 거, 다른 채널 관리자들의 행태만 보아도 잘 아실 텐데요?”

“……알겠습니다.”

“빨리 처리하세요. 만일 제때 스킬을 넣지 못해서 [BJ헬하우스] 채널 순위가 떨어지면 다 각오하시고요.”

체호프는 살벌하게 경고한 뒤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가장 영향력 있는 채널 관리자 TOP10’ 차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되었다. 그래. 오즈월드는 지금 반칙을 저지르고 있었다.

방송 생태계를 모조리 망치는 끔찍한 반칙을!

“이건 엄연히 형평성에 어긋나는 짓입니다. 당장 위원장님들을 뵈어서 사태를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예에,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체호프는 곧장 채널 관리 위원회 최상층으로 이동했다.

평소 나름의 친분을 쌓아둔 것은 엡실론 위원장이었으나 오늘은 불이익당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베타 위원장을 찾을 생각이었다.

‘알파 위원장은 뭔가 낌새가 이상해.’

이런 쪽으로 촉이 좋은 체호프는 내심 알파와 오즈월드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증거만 잡아내면 기필코……”

“체호프 씨 되십니까?”

“……?”

아름다운 목소리에 체호프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출입이 극히 제한된 곳이라 저처럼 1위 채널 관리자 정도 되는 이가 아니라면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한데 웬 검은 나비 가면을 쓴 남자가 자신을 불러세웠다.

“그렇습니다만, 누구…?”

푹!

체호프는 말도 다 잇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깔끔하게 즉사한 것이다.

검은 나비 가면을 쓴 남자는 체호프의 몸에서 반짝거리는 점액질이 한가득 묻은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코어’였다.

털썩!

인간에게는 심장과 같은 코어가 빠진 체호프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남자는 코어를 챙긴 후 보란 듯이 체호프의 시체를 방치한 채 베타 위원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

정적 속에서 다비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체호프의 시체를 확인했다.

‘죽었군.’

코어를 빼앗겼으니 되살아날 수 없다. 이대로 끝난 것이다.

다비드는 경계하는 눈으로 베타 위원장실을 쳐다보았다.

채널 관리자를 이토록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자가 베타 위원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자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동맹 관계인가?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뭐지?’

일단 확실한 건 이 사실을 어서 오즈월드에게 알려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다비드는 뒤를 돌자마자 검은 나비 가면을 쓴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런.”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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