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186화 (187/277)

186화

클라이드의 당황이 전염된 듯 내 얼굴도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왜 호들갑이야.”

나는 공연히 그를 나무랐다.

이게 저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싶었다.

클라이드는 잠시 뒤돌아있다가 한결 진정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예쁘네. 정말로 예뻐.”

말투는 퍽 어른스러웠으나 두 눈이 유성우를 본 아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외면하고 있던 죄악감에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배고파.”

그래서 말을 돌렸는데 클라이드가 허리를 감싸 안으며 에스코트했다.

“그럴 것 같아서 음식을 준비해두라고 해뒀어. 식당으로 갈까?”

“결혼식은?”

“천천히 해도 돼.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까.”

타인의 공증이 필요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 결혼식이었다.

원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모두에게 결혼 사실을 공표하는 건 물론 성대하고 화려한 식을 치러야 직성이 풀릴 텐데.

‘이렇게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는 신전을 선택할 줄 몰랐어.’

오직 서로에게 집중하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장소였다.

클라이드는 식당에서 손수 음식을 덜어서 내게 하나하나 직접 먹였다.

입술에 소스가 묻으면 냅킨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는 등 지극정성이었다.

오늘 반드시 그에게서 사랑의 증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해서일까?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러 음식을 거절했다.

“너무 적게 먹었어.”

“배불러서 더 안 들어가.”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거 한 입만 더 먹자.”

그의 애원에 하는 수 없이 한 술 더 떠먹어야 했다.

식사가 끝나자 클라이드는 나를 꽃이 종류별로 준비되어있는 장소로 이끌었다.

“어떤 꽃이 좋아? 내가 부케로 만들어줄게.”

“부케도 만들 수 있어?”

“꽃다발을 리본으로 묶으면 되잖아.”

그게 끝이 아닐 것 같은데…….

어차피 나도 클라이드도 완벽한 솜씨로 만들어진 부케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추억이었다.

그는 내가 고심해서 골라낸 꽃을 뭉쳐서 실크 리본으로 칭칭 감았다.

당연히 이런 쪽으로 문외한 둘이서 머리를 맞댄 결과물은 엉망진창이었다.

“나쁘지 않지?”

나는 클라이드가 내민 부케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응. 귀여워서 마음에 들어.”

기어이 두 클라이드의 공통점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되었다. 감정이 가장 풍요롭고 다채롭게 요동쳤다.

‘지금 클라이드의 모습이 누군가를 흉내 낸 결과든 그의 진심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고마워.”

내 얼굴을 본 클라이드가 뺨을 미미하게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쥐게 된 황금에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 해야겠어.”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하며 뭘 하느냐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결혼식.”

예배당으로 향하는 동안 클라이드가 자꾸만 장난을 치는 통에 예배당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 멀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만 좀 해.”

사용인을 인간이 아닌 로봇 청소기쯤으로 여기는 이곳 사람들과 내 정서는 무척 달랐다.

클라이드가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맞추는 꼴을 누군가가 본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넌 수치심이라는 게 없니?”

내가 작게 성을 내자 클라이드가 피식 웃었다.

“여기에 우리 말곤 아무도 없다니까.”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게 했다.

“봐. 없지?”

할 일을 마친 사용인들은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었고 이곳에는 정말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다.

이렇게 큰 건물에 오직 우리 둘만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꼭 덫에 걸린 듯한…….

띠링!

[성좌 ‘방송은 방송으로만 보자’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러다 쓸데없이 정주겠다 얼른 결혼식 올리고 끝내자]

그 말이 옳았다.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나는 가시가 든 신발을 신은 사람처럼 불편하게 예배당까지 걸어갔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웨딩로드 앞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던전에서 클라이드와 결혼할 때는 그렇게 소란스러웠는데 지금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학교에서 갑작스러운 일들로 인해 아직 보상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곳에는 마침 피아노가 있었다.

띠링!

[상급 연주 기술-피아노를 습득하셨습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봐.”

“뭘 하려고?”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두드려보았다. 귀에 잡히는 음들이 전부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었다.

[상급 연주 기술]은 내 머릿속에 있는 멜로디라면 얼마든지 연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결혼 행진곡이었다.

“신랑 입장!”

클라이드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웨딩 로드를 걸어오더니 연주하던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넌 하는 짓마다 귀여워.”

띠링!

[성좌 ‘클서방’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귀여워]

띠링!

[성좌 ‘당연히 모든 클라이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꼭 악클 사라져야 하나? 이렇게 잘 어울리는데……]

클라이드와 나는 신관이 없는 주례석 앞에 섰다.

주례는 그가 직접 했다.

“신부는 영원히 신랑을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네.”

내 대답을 들은 클라이드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 숙였다.

“당신의 신랑은 영원히 나의 신부 테레제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리고 입술을 겹쳤다.

눈꺼풀을 감자 뺨이 젖어 들었다.

이제 정말로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왜 울어. 이렇게 좋은 날에.”

클라이드는 입술을 떨어뜨리더니 내 뺨을 닦아주었다.

사라질 네가 가엽다.

하지만 네가 사라지지 않으면 죽게 될 인간 클라이드가. 그리고 내가 맞이할 배드 엔딩이 더 두려웠다.

계속 울고 있는 내게 클라이드가 반지 상자를 꺼내 보였다.

달칵.

자잘한 다이아몬드를 빼곡하게 두른 반지가 흐린 날에도 반짝거렸다.

“마음에 들어?”

“……응. 예쁘네.”

“다행이다.”

그가 반지를 끼워주려 내 왼손을 가져갔을 때,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이러면 반지를 끼울 수가 없는데?”

이게 정말 옳은 걸까?

정말로 이런 길밖에 없는 걸까?

더 나은 선택지가 있지 않을까?

클라이드가 혼란과 두려움에 잠긴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드디어 날 사랑하는구나.”

황홀해하는 음성이었다.

파스스-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의 손에서 가루가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이 머리로 잘 인지되지 않아서 순간 멍해졌다.

“오늘만 지나면 네 열 손가락에 전부 제일 좋은 반지들로 끼워줄게.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주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죽잖아?”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클라이드가 붉어진 눈동자로 당황한 날 보며 약지에 키스했다.

“사랑해, 테레제.”

마치 나를 비웃는 듯한 고백.

머리가 차가워지며 섬뜩한 예감이 전신을 훑었다.

나는 거의 본능처럼 그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호감도: ♥♥♥♥♥]

“…….”

검은 하트 5개.

배드 엔딩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정신 사나운 알림음이 멍청한 나를 질타하듯 귓전을 때렸다.

클라이드는 휘청거리는 나를 품에 꼭 끌어안고서 투정 부렸다.

“어차피 내 인격이 사라져도 클라이드 윌로우가 반인반마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그렇겠지. 그건 생물학적인 문제니까.

“그런데도 왜 나만 죽이려고 하는 걸까, 속상했어.”

“…….”

“인정하기 싫지만, 그와 난 동일인이잖아. 윌로우 가문에서 날 편히 다루려고 나눈 인격에 불과하니까.”

내 표정을 본 클라이드가 “아아.”하고 탄식했다.

“알고 있었구나. 너한테만 보이는 그 이상한 창이 알려준 건가?”

시스템 창을 말하는 거구나.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사실 원인은 뻔했다.

“오즈월드…….”

내가 신음하듯 오즈월드의 이름을 읊조리자 클라이드의 표정이 사납게 굳어졌다.

“어째서 네 주변은 남의 것을 탐내는 개새끼들이 많은 걸까. 넌 내 건데.”

그의 손이 실크 드레스로 감춰지지 않은 등을 짚었다.

“아파도 조금만 참아, 자기야.”

곧 생살을 인두로 지지는 듯 끔찍한 통증이 피어났다.

“아윽-!”

내가 몸부림치자 클라이드는 더욱 단단히 날 끌어안은 채 등에다 무언가를 새겼다.

“네 육신에 내 이름을 써두려고 해. 인간의 결혼제도로는 서로를 영원히 묶어둘 수 없잖아? 난 그게 싫어.”

이 행위는 계약이었다.

몸에 그의 이름을 전부 새기고 나면 나는 악마 계약자가 되어버린다.

“끄으윽……!”

클라이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달래듯 키스했다.

“괜찮아. 금방 끝나.”

무슨 짓을 한 건지 마법이 사용되지 않았다. 나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엉망이 된 부케가 보인 순간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저게 사랑의 증표가 되지 않았을까.

왜 시스템이 고장 나버린 것처럼 작동하지 않을까.

이상했다. 모든 게 다 이상했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것은 나였다.

나는 끔찍한 통증에 전신을 벌벌 떨면서도 더는 죄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기이하고 역겨운 안도감을 느꼈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건 클라이드를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미안해, 클라이드…….”

내가 사과하는 대상이 인간 쪽임을 곧장 알아들은 클라이드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조소했다.

“이 상황에서도 넌 끝까지…!”

그때, 갑자기 통증이 멎었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맥없이 클라이드를 쳐다보았다.

그런 나를 그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단상에 기대게 했다.

한데 행동과 달리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져있었다.

“뭐야. 대체 뭐냐고! 크윽…!”

그의 왼쪽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클라이드가 아공간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우리의 결혼반지였다.

“이… 개자식이…! 아악! 그만! 그만하라고, 빌어먹을!”

의지를 배반한 육신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클라이드가 악을 쓰고 욕설을 내뱉었다.

“테레제-!”

클라이드가 무릎 꿇은 채 절규하며 내 약지에 헐렁한 반지를 끼운 순간.

질식할 것 같았던 사악한 기운이 사라졌다.

나는 땀에 젖어 엉망인 꼴로 단상에 미끄러지듯 기댄 자세를 바꿔 앞으로 힘겹게 기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고개를 푹 숙인 클라이드의 뺨을 쥐자, 그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새빨갛게 물들었던 눈동자가 다시금 청명한 물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클라이드가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힘겹게 미소 지었다.

“네 남편이 잠깐 자리 비웠다고 냉큼 다른 새끼랑 결혼하려고 했어?”

이런 상황에도 농담을 던지는 사람은 클라이드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번에는 반지 잃어버리지 마.”

나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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