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 * *
학교에서는 한창 시험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일리야는 무언가를 피해 숨어있었다.
곧 귓전을 때리는 빗소리 속에서 살아있는 것이 지나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온 추적자들이었다.
추적자들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하…….”
그제야 한숨을 토했다.
간신히 정체를 들키지 않고 ‘저택’에서 도망쳤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일리야는 찌푸린 눈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뚝 세워진 건물을 확인했다.
저 건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갑자기 생겨난 저택은 기이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일리야는 감각을 되짚어보듯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가 꽉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지력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테레제와 관련된 변화일 텐데.’
그때였다.
“여기서 또 뵙는군요.”
추적자를 전부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코앞에서 검은 우산을 쓴 웬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말을 걸었다.
“우리가 만난 적 있었나?”
“꿈에서였죠. 기억나지 않겠지만.”
상대는 빙긋 웃으며 말장난 같은 대답을 했다.
하나 ‘꿈’이라는 말에 일리야는 짚이는 게 있었다.
“……빨간 슈트?”
상대는 전혀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긍정했다.
“단편적이나마 기억하는군요. 테레제 양의 영향인 모양입니다.”
성가시게.
상대는 테레제를 언급하며 마뜩잖다는 듯 혀를 찼다.
“창조물들이 설정을 벗어난 능력을 각성하게 되는 일은 종종 벌어지기도 하니 별수 없군요.”
일리야는 상대가 추적자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위험하다.
대악마인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습지만, 저것은 인육을 뒤집어쓴 재앙이었다.
“나를 죽일 생각인가?”
일리야의 물음에 상대가 고개 저었다.
“이 세계에 남자주인공이 쓸데없이 많기는 합니다만, 당신은 아직 사라질 때가 아닙니다.”
‘남자주인공?’
테레제가 만든 창작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한데 상대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남자주인공이라는 게 여럿 있는 모양이었다.
일리야는 그러한 존재가 누구일지 바로 꼽을 수 있었다.
클라이드, 데미안, 황제, 저까지 넷이리라.
그렇다면 넷 중 누가 사라진다는 걸까?
“사라지는 건 클라이드인 건가.”
“오, 왜 그렇게 생각했죠?”
상대는 진심으로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그건 클라이드가 사라지리라는 대답과 마찬가지였다.
“테레제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면 현재 그녀와 가장 깊게 연관된 인물이 흐름의 중심일 테니까. 그게 지금으로서는 클라이드고.”
일리야는 담담하게 제 생각을 말하고 있었으나 빗물에 젖은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분노에 절어 있었다.
“좋은 추측입니다. 당신 말대로 지금 클라이드 씨는 소멸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상대는 그 말을 지껄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날 죽이지 않을 거라면, 왜 내 앞에 나타난 건지 물어도 되겠나?”
“오류를 정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업데이트 중인데 이딴 잡음은 질색이라.”
상대는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사용했다.
“이만 제자리로 돌아가세요, 일리야 씨.”
그 말과 동시에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순식간에 일리야의 두 눈을 덮었다.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된 순간.
“실례지만 방송에 협조해주셔야겠습니다.”
뇌리에서 지워져 있던 일과 함께 상대의 이름이 기억났다.
“오즈월드.”
한숨 같은 헛웃음 소리를 마지막으로 새까만 잉크 같은 것이 정신을 뒤덮었다.
* * *
이틀 뒤.
마지막 시험은 오전 중에 끝났다.
성적은 당일에 알 수 있었다.
“수석이라고요? 제가요?”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우리 애가 수석이에요ㅠㅠ!! 우리 테레제 천재라고요!!!]
성적을 집계해 알려주는 직원이 흐뭇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장님이 부재중이시라 최종 결과지가 나오려면 조금 걸리겠지만, 그렇습니다. 압도적인 결과라 이변은 없을 겁니다.”
심지어 내 성적이 압도적이라 했다.
그럴 만도 한가?
‘클라이드와 데미안이 시험을 너무 많이 빠져버렸으니까.’
하나 두 사람이 제대로 성적을 받았다고 해도 3등이라는 소리였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근처에 있던 교수들이 껄껄 웃으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내 교수 생활 중 고작 한 학기만에 이런 성적을 달성한 학생은 처음일세.”
“과연 마법 명문인 스콰이어 장녀다운 결과입니다.”
“다음 학기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겠어요, 테레제 학생.”
“물론입니다, 교수님.”
내 정중한 태도를 본 교수들이 다들 흡족해했다.
저 망나니가 확실히 정신 차렸군, 하고 생각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교수들이 왜 여기에 몰려온 거지?’
의아하게 그들을 쳐다보니 다들 묘하게 웃음 지었다.
‘아. 나비 날개를 구경하러 온 거였구나.’
인제 보니 교수들은 아닌 척하면서 나비 날개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적당히 다음 학기에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는 덕담에 감사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밖에서 내내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클라이드가 뒤에서 다가와 고개 숙이며 물었다.
“결과 잘 나왔어?”
“나 수석이야.”
클라이드가 기특하다는 듯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대단한데?”
그때 알림창이 떴다.
띠링!
[보상이 도착했습니다. 상점을 확인하십시오.]
<신의 유희>는 높은 성적을 받으면 보상을 지급했다.
원래는 경험치를 주지만 지금은 의미가 없는 수치여서 그런지 다른 방식의 보상이 지급되었다.
나는 상점을 열어보았다.
▼
[상점]
▹소원권 [1,000,000,000코인]
: 어떤 소원이든 1회 들어준다.
▹상급 악기 연주 기술 [0코인]
: 피아노, 바이올린 연주 기술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
‘상급 악기 연주 기술?’
이런 게 과연 필요할까 싶었지만 0코인으로 새로운 기술을 익힐 수 있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피아노랑 바이올린 중에 뭘 선택하는 게 좋으려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뭘 보고 있어?”
갑자기 시스템 창이 있는 곳에 클라이드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순간 오싹함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나는 어색하게 변명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생각을 좀 하느라.”
“흐음. 그래?”
클라이드는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시스템 창이 있는 방향을 훑었다.
꼭 뭔가를 찾으려는 시선이었다.
‘기분 탓인가? 행동이 뭔가 이상해.’
구체적으로 뭐가 이상한 건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느낌이 그랬다.
그때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클라이드 님,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미모가 눈부셔요!”
어느새 클예부 회원들이 바글바글 모여들고 있었다.
“테레제 님이랑 같이 계셨군요?”
“대체 어디에 계셨어요? 시험도 안 나오시고! 임무 나가셨던 거예요?”
클라이드는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할 뿐, 클예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클예부는 재잘거리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건지 서서히 거리를 벌리며 내게 달라붙었다.
“클라이드 님이 기분이 안 좋으신가 봐요.”
“아냐. 기분은 엄청 좋아 보이시는데? 근데 뭔가 분위기가 좀 다르게 느껴져……. 무슨 일인지 아세요, 테레제 님?”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나도 잘 모르겠네.”
너희가 아는 그 클라이드가 아니라서 그렇단다.
클예부는 너도나도 내 손을 꼭 잡으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방학 때는 꼭 저희랑 만나주세요, 테레제 님.”
“맞아요! 여름 무도회에서도 뵙겠지만, 저희끼리 파티도 해야죠!”
“공작저에도 초대해주세요. 네에? 제발요!”
만나달라고 조르는 클예부 회원들에게 알겠다고 대답하고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클라이드는 무표정하게 우리를 지켜보더니 내게 귓속말했다.
“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데이트하자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뜻으로 그의 팔을 살짝 쓸어주었다가 흠칫 클예부의 눈치를 살폈다.
클예부는 이미 다들 ‘뭐야, 뭐야?’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다. 나중에 연락하자, 얘들아.”
“무슨 볼일인데요? 힌트만 주시면 안 돼요?”
“장소가 어딘데요? 따라가지는 않을게요!”
띠링!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백퍼 데이트하는 거 눈치챈 듯 ㅋㅋ]
애써 클예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걸음을 돌렸을 때였다.
“테레제.”
그간 모습이 보이지 않던 일리야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교수님? 최근에 계속 모습이 안 보이셨던 것 같아서요.”
내 질문을 들은 일리야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글쎄…… 딱히. 왜 그런 걸 묻지? 내가 그리웠나?”
그러자 클라이드가 내 앞을 막아서며 일리야를 향해 조소했다.
“학생에게 하기엔 부적절한 말씀을 하시네요?”
일리야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부적절하게 들렸다면 잘 이해한 것 같은데.”
띠링!
[성좌 ‘썩은 취향’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하…… 형제싸움 맛있다]
나는 죽을 맛이었다.
‘다들 쳐다보고 있는 거 안 느껴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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