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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83화 (184/277)

183화

24. 업데이트

비가 내리는 날에 귀족들은 보석상을 저택으로 부르지, 굳이 상점으로 나오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같은 때는 평소보다 한가해야 했다.

하나 갑자기 나타난 까다로운 손님으로 인해 보석상은 몹시 분주했다.

“이건 어떠하신지요? 말씀하신 특징대로라면 선물 받으실 분께는 루비처럼 색이 화려한 보석도 잘 어울리실 겁니다.”

클라이드는 커다란 루비 반지를 보며 불쾌하게 미간을 좁혔다.

“루비는 안 돼. 난 다이아몬드면 좋겠는데.”

지배인이 난감하게 말했다.

“요즘 좋은 다이아몬드는 일찍 빠져서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곧 여름 무도회가 있잖습니까.”

“내가 그런 걸 고려해야 하나?”

상대는 윌로우 가문의 후계자였다.

당연히 그러한 점을 고려할 위치가 아니었다.

이미 값이 치러진 물건이라도 강탈해서 여기다 바쳐야 마땅했으니.

하나 그것도 물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큰 다이아몬드는 아닙니다만, 작은 다이아몬드를 전체에 두른 반지가 있기는 합니다.”

지배인은 새까만 벨벳 상자를 꺼내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자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문제는 사이즈였다.

클라이드는 보석상에 오기 전에 계속 만지작거렸던 약지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 반지는 조금 큰데…….”

“지금으로서는 이게 전부입니다.”

반지는 마음에 들었다.

빛을 받으면 몹시 반짝거리는 게 테레제와 잘 어울릴 듯했다.

사이즈는 테레제를 잘 먹여서 살을 찌우면 될 것 같았다.

“이걸로 하지. 반지 안쪽에 내 이니셜을 각인해줘.”

지배인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다른 보석은 다 치우려고 했다.

“지금 보여준 것들도 전부 살 테니 포장해. 그 루비 반지는 빼고.”

지배인은 우중충한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밝게 미소 지었다.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전부 윌로우 가문으로 보내드릴까요?”

“그렇게 해. 다이아몬드 반지는 지금 가져갈 거니까 각인이 끝나면 내게 줘.”

“알겠습니다.”

딸랑!

그때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모든 직원이 클라이드의 물건을 포장하는 일에 달라붙어 있어 지배인이 직접 나가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물건이 따로 있으십니까?”

“반지를 하나 사려고 합니다만.”

클라이드는 반지라는 말에 이끌리듯 막 들어온 신사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매우 좋은 옷감으로 만든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귀족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차림새였다.

짙은 금발을 흐트러짐 없이 말끔하게 뒤로 넘긴 남자는 깨진 유리 조각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의 클라이드와는 다른, 태양처럼 화려한 외모였다.

클라이드는 한쪽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이렇게 튀는 외모의 귀족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 없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지배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반지는 전부 판매되었습니다. 아, 루비 반지 하나가 남아있기는 합니다.”

클라이드가 빼라고 한 반지를 본 남자가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드는군요. 이걸로 구매하죠.”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지배인이 오즈월드가 건넨 수표와 루비 반지를 챙겨 물러갔다.

그새 클라이드는 남자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상태였다.

잠시 후 각인을 마친 다이아몬드 반지가 금방 지배인의 손에 들려 나왔다.

클라이드는 선물용 상자에 담겨 온 반지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라면 테레제 양에게 그 반지를 주지 않을 겁니다.”

클라이드의 시선이 남자에게 쏘아지듯 이동했다.

지배인은 탁한 눈빛으로 아무런 말도 못 들은 듯 미소 띤 얼굴로 “다음에도 또 이용해주십시오.”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

“정체가 뭐지?”

클라이드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얼굴로 물었다.

남자가 인간이었다면 지배인의 정신을 조종하려 했을 때 어떤 식으로든 주문을 영창했을 것이다.

하나 그러지 않았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악마이거나 천사였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발렌시아 가문의 오즈월드라고 합니다.”

‘오즈월드 발렌시아?’

이름도 가문도 전부 처음 들어보았다.

‘악마는 아니야.’

오즈월드에게는 동류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격이 높은 대악마라고 해도 일리야처럼 존재감을 지운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다.

하나 직감은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제게 일부러 접근했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대놓고 물었다.

“일부러 내게 접근한 건가?”

클라이드가 잔뜩 경계하며 물으니 오즈월드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서 행복해하는 당신이 가여워 제대로 된 사실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오즈월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퀘스트: 악마의 연인]

▸보상: 악마 클라이드 소멸

▸실패: 인간 클라이드 소멸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날까지 악마 클라이드에게서 사랑의 증표를 받지 못하면 실패합니다.

클라이드는 허공에 나타난 반투명한 화면을 보고서 두 눈을 부릅떴다.

오즈월드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러워하는 음색으로 말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건 테레제 양이 수행해야 할 과제입니다. 인간 클라이드를 살리기 위해서죠.”

“…….”

클라이드가 충격에 빠져있는 동안 지배인이 수표의 서명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반지를 들고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오, 발렌시아 후작님. 제가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모습이 꼭 각본대로 움직이게끔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오즈월드는 지배인을 보지도 않고 반지 상자를 받으며 보석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겁니다, 클라이드 씨.”

정체불명의 퀘스트 창은 오즈월드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클라이드는 화가 난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어 상점을 나왔다.

마법을 사용해서 당장 발할라로 이동해 테레제를 추궁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나 억지로 냉정해졌다.

“……혹시 날 속인 거라면.”

오즈월드라고 했던가? 그가 하는 말에 신뢰감은커녕 기이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특히 눈빛.

그건 가여운 자를 대하는 눈이 아니었다.

죽어버렸으면 하는 놈을 바라보는 눈이었지.

제 앞에다 띄운 게 대체 뭔지, 그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제게 중요한 건 테레제였고, 그녀는 서서히 함락되어가고 있었으니까.

클라이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장소를 이동했다.

“테레제.”

한데 놀란 표정으로 저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왜 이상한 기분이 들까?

테레제는 그의 빈손을 확인하며 약간 안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어딜 다녀온 거야?”

“반지를 사려고.”

“아…….”

클라이드는 흠칫 굳은 테레제를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서 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혹시 실망했어?”

“아니, 전혀.”

표정만 보아도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클라이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날 없애려고 혼자서 깜찍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고?’

“미안해. 내가 더 좋은 걸로 구해서 꼭 끼워줄게.”

“난 정말로 괜찮아.”

넌 정말로 잔인해, 테레제.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애초에 사라져줄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까.

고스트가 마수들이 군집을 이룬 숲을 정화했을 때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긴 했다.

하나 그걸로 끝이었다.

그 정도로 릴리트가 잠재운 인간 클라이드의 인격이 되살아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약한 척한 것은 테레제의 반응 때문이었다.

‘대체 내가 반인반마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는데, 오즈월드라는 남자가 보여주었던 그 이상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래서 자신이 겉모습을 바꾸니 인간 클라이드를 대할 때와 태도를 달리했던 것인가?

테레제는 강한 척하는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르고 나약했다.

다만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었다.

자신이 파악하기로는 유독 약해지는 존재로 리비, 데미안, 일리야가 있었다. 그리고 인간인 클라이드까지.

그 목록에 악마인 자신은 없었다.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클라이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그 행위가 불공평하단 건지 설명하지 못했다. 하나 그렇게 느꼈다.

테레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을 사랑해야 했다. 어여쁘고 가엽게 여겨, 포근하게 안아주고 귀여워해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옳았다.

그래서 이용할 수 있는 걸 이용했을 뿐이었다.

인간 클라이드에게 그토록 약하게 구니 더욱 적극적으로 그를 흉내 냈다.

구역질 나는 시시한 꼴로 다니며 최대한 성질을 죽였다.

시작하기 전에는 이딴 짓거리를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그 상태에 빠져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테레제의 눈빛의 질감이 달라지고, 내뿜는 향기가 달콤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자신이 한 노력에 비해 지나치게 충격적인 보상이었다.

태어나 처음 맛보게 된 양질의 애정은 자신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안정시켰다.

처음으로 완전함을 느꼈다.

이 감정은 테레제만이 줄 수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분풀이에 가까웠던 기만이 점차 다른 것으로 변했다.

이제는 진심으로 테레제가 가지고 싶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인 진짜 연인이 되고 싶었다.

영원히.

“사랑해, 테레제.”

네가 나를 죽이려고 해도 사랑해.

원래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잖아? 그러니까 너를 용서할게.

그리고 너도 날 용서해.

클라이드는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테레제에게 짧게 키스하고 놓아주었다.

“이제 공부 방해하지 않을게.”

이틀 뒤에 인간 클라이드는 소멸할 테니까.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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