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182화 (183/277)

182화

* * *

클라이드의 개인 연구실은 안락했다.

윌로우 가문에서 후계자가 쓸 공간이라고 여간 신경 써둔 게 아니었다.

외려 그런 이유로 클라이드는 이곳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쾌적한 공간에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한참 집중해서 레포트를 쓰고 있을 때, 클라이드가 내 손목에 걸린 실 팔찌를 손가락으로 당겼다.

“이건 언제까지 하려고?”

“하지 마. 끊어져.”

문신처럼 하고 다니는 팔찌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존재감을 자각했다.

그는 뭐가 불만인지 계속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건 평민이나 하는 거잖아. 네 손목에는 다이아몬드가 더 어울려.”

“사주기나 하고 말해.”

나는 대수롭지 않게 핀잔하다가 멈칫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험이 끝나기 전에 같이 부티크를 가서 사랑의 증표가 될 만한 걸 살 생각이었다.

마침 그가 장신구에 흥미를 보이고 있으니 이야기를 꺼낼 좋은 타이밍이었다.

“말 나온 김에 뭐라도 할까? 너하고 난 나눠 가진 게 없잖아.”

내 말에 클라이드의 눈이 커지며 팔찌를 끊어버릴 듯하던 손을 움츠렸다.

그 손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있었다.

“……진심이야?”

“응.”

“그럼 반지로 맞출까?”

클라이드는 말하면서 손에 낀 반지를 빼더니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이미 내 의견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반지로 하자.”

그는 조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유 없는 표정으로 졸랐다.

“지금 갈까? 바로 물건을 받아볼 수 있는 보석상을 아는데. 응?”

이렇게까지 호응할 줄 몰랐던 나로서는 당혹스러운 반응이었다.

“뭐? 오늘은 됐어. 어차피 비가 와서 이동하기 좋은 날도 아니고.”

클라이드는 내 말에 고갤 돌려 창 너머 내리는 비를 확인하더니 성질 난 표정으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비는 계속 내렸잖아. 내일도 내릴걸.”

사실 비는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한 핑계였다.

사랑의 증표를 받는 순간 악마가 소멸하니까, 그를 없애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당장 가자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것이다. 비겁하게.

클라이드는 내 왼손을 가져가 반지를 끼울 자리를 집요하게 문질렀다.

“왜 우리가 만나는 동안 맑은 날이 없지. 기분 더럽게.”

“……난 비 내리는 날을 제일 좋아하는데.”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클라이드는 단순하게도 내가 비 내리는 날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니 금방 기분이 풀어져서 웃었다.

“역시 못 기다리겠다.”

그때, 그가 뜬금없는 말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뭘 못 기다려?”

클라이드가 내 이마에 키스하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넌 공부하고 있어.”

“잠깐…!”

설마 지금 보석상에 가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뉘앙스가 딱 그러해서 못 가게 붙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클라이드가 더 빨랐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하게 응시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시험은 아직 이틀이나 남았는데.

* * *

[판테온 내 분란을 조장하는 채널 관리자 오즈월드를 즉시 추방하라!]

오즈월드는 자신의 안티들이 비행선에 새빨간 염료로 휘갈긴 경고문을 무료한 표정으로 읽었다.

“이들은 왜 이런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간에 저를 암살하는 게 나을 텐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질문을 받은 비행정 관리자는 차마 동의하는 말은 하지 못하고 당혹스러운 미소만 지었다.

잘나가는 채널이나 인기가 많은 채널 관리자에게 헤이터가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나 오즈월드의 안티는 유독 거칠고 과격했으며 유난스러웠다.

단순히 그를 싫어하는 걸 넘어서서 반드시 처단해야 할 악으로 규정짓는 듯한 행보였다.

비행정 관리자는 오늘따라 대단히 수려하고 아름다운 오즈월드를 힐끗 훔쳐보았다.

‘항간에서는 안티의 수장이 오즈월드와 연관 있는 인물이라던데.’

판테온에서 유일하게 오즈월드의 과거를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인물이라니.

비행정 관리자는 호기심이 동하는 것을 느꼈으나 마음속에 고이 접어두었다.

오즈월드는 태도만 정중한 쓰레기였다.

그가 가지고 놀다가 가장 빛나는 순간에 망가뜨린 BJ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비행정 관리자는 침묵이 더 길어지기 전에 아첨하는 말을 내뱉었다.

“유례없는 흥행에 안티들이 위기감을 느낀 모양입니다.”

그 말에 오즈월드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관제탑에 설치된 전광판을 쳐다보았다.

화면에는 테레제의 곁에 바짝 붙어서 그녀를 가지고 싶어서 죽겠다는 듯이 시선으로 끝없이 탐하는 클라이드의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보기 역겨운 광경이었다.

“…….”

오즈월드는 쓸데없는 감상에 미간을 좁히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곧 있을 새로운 이벤트를 위해 쉴 틈 없이 판테온 내의 일을 처리했더니 약간 피로했다.

그래서 저답지 않게 여유가 사라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게다가 최근 [BJ악역영애] 애청자 사이의 분쟁이 실제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급증했다.

판테온에서 가장 화제성 높은 채널로 인한 문제라 오즈월드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향후 대책을 브리핑하라는 채관위의 경고에 기자회견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때 다비드가 새로운 비행선과 함께 나타났다.

“주인님,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오즈월드는 느긋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새로운 비행선에 올랐다.

그는 착석하자마자 다비드에게 물었다.

“안티 집결지는 찾아냈습니까?”

“찾았습니다. 다만 이번에도 본거지는 아니어서 계속 수색 중입니다.”

“쌍둥이답지 않게 이번 안티는 빠르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군요.”

“죄송합니다.”

오즈월드는 여전히 무료해 보이는 표정으로 건조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어지간히 준비한 모양인데, 잠시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자신을 격렬히 싫어하는 이들이 생길수록 반대급부로 저를 옹호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BJ악역영애] 채널이 이만큼이나 성장한 이유 중 하나로 오즈월드 안티 급증을 꼽기도 했으니.

다비드가 조심스레 첨언했다.

“안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방송에 들어가지 않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번 안티는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방송에 오류를 일으켜댔다.

아무리 역추적해도 흔적이 잡히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나 오즈월드는 태연했다.

“방어적으로 행동해봤자 상대의 꼬리를 잡을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방송에 직접 개입하면 그들은 분명 또 오류를 만들어내겠죠. 그때를 노립시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간단한 전략입니다.”

다만 다비드는 오즈월드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도 쓸데없이 위험을 자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의심할 것 없습니다, 다비드.”

“……예?”

오즈월드는 오늘 회견에서 받을 질문이 쓰인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놀란 다비드와 눈을 마주쳤다.

“안티 수장이 누군지 알 것 같으니까요. 예상이 적중한다면 이 방식이 아니고서는 상대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다비드의 두 눈이 더 커졌다.

“수장이 누구죠? 제가 아는 인물입니까?”

“아마 판테온의 그 누구도 모를 겁니다.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

여기 사람이 아니다.

그 말인즉, 안티의 수장이 오즈월드의 세계에 있던 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멸망하지 않았나?’

다비드는 자신이 오즈월드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을 떠올리며 의아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때 비행선이 착륙했다. 도착한 장소는 오즈월드 컴퍼니였다.

기자회견은 컴퍼니 내부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달칵.

곧 회견장의 문이 열리고 오즈월드가 등장한 순간, 정신없이 플래시가 터졌다.

그러다 빛이 멎고 취재진 사이에 당혹스러운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어…? 오즈월드 씨 맞지?”

“맞는 거 같은데?”

기자들이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늘 오즈월드는 염색된 부분 하나 없이 깨끗한 금발에 새까만 슈트 차림이었으니까.

성좌들이 기억하는 한, 오즈월드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뚜벅. 뚜벅.

다들 마침내 오즈월드의 약점을 잡았다며 희희낙락하고 있던 것도 잊고서 잠시간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천박하리만큼 과하게 두르고 있던 화려함을 걷어낸 오즈월드는 기묘한 압도감을 풍겼다.

그가 단상 앞에 서서 시선을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질문받겠습니다.”

* * *

불변의 1인자를 흠집 낼 기회였던 기자회견은 다소 싱겁게 끝났다.

모두의 관심이 방송으로 일어난 판테온 내 분쟁에서 오즈월드의 파격 변신으로 바뀐 탓이었다.

그들은 주제와 관련 없는 질문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발을 동동 구르며 회견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다들 머릿속으로 ‘진짜 특종은 오즈월드 그 자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기자회견이 마무리되어 오즈월드가 단상을 떠날 무렵, 누군가가 끌려 나갈 것을 각오하고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질문 있습니다! 지금 오즈월드 씨의 모습은 혹시 BJ악역영애 방송과 관련이 있습니까?”

예리한 질문이었다.

오즈월드는 회장을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서 방금 질문한 기자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곧장 폭발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오즈월드 씨! 잠시만요!”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거죠? 조금만 더 말씀해주세요!”

다비드를 비롯한 직원들이 밀려드는 취재진을 가로막았고, 오즈월드는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그는 승강기에 타서 최상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장 승강기 문이 열리며 분석실 모습이 드러났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그가 승강기에서 내리자 분석실 직원들이 알은 채 해왔다.

오즈월드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나비에 대해서는 분석 끝났습니까?”

최근 방송에 ‘스콰이어 나비’라는 기이한 변수가 생겨났다.

심지어 본인이 창조한 세계관 내에서만 통하는 능력인 것도 아니었다.

아예 시공간을 초월한 장소를 다녀오는 일도 가능하다니. 몹시 성가신 능력이었다.

분석팀의 팀장이 대답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신의 유희> 게임 설정에 존재하는 ‘스콰이어 나비’와는 다른 능력입니다. 세계관이 자체적으로 필요를 느끼고 자연 발생시킨 힘입니다.”

자연 발생이라. 손톱 거스러미처럼 신경 거슬리게 하는 말이었다.

오즈월드는 분석 화면을 응시하며 혀로 입천장을 쓸었다.

“억제 불가능한 변수…….”

예상은 했지만, 막상 분석 결과를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결과물을 질타해야 할지, 자각도 없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테레제에게 감탄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개발팀 직원이 나타나 화면을 띄웠다.

“대표님, 게임 내에서 사용하실 저택이 완성됐다고 합니다. 설정 등록도 끝났습니다.”

오즈월드는 원래 있던 곳인 양 주변에 잘 녹아든 고풍스러운 저택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변수가 생겼다면 직접 나서서 조율하면 그만이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다 그런 변수들로 이루어진 법이고, 오즈월드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방송을 이끄는 일에 실패한 적 없었다.

“<신의 유희> 업데이트, 지금 진행하죠.”

BJ악역영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