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181화 (182/277)
  • 181화

    솔직히 말해서 이는 내게 다신 없을 기회였다.

    악마는 모르겠지만 퀘스트로 인해 우리 사이의 갑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인간 클라이드가 소멸한다는 건 결국 <신의 유희>가 배드엔딩 루트로 접어든다는 뜻이니까.

    한데도 나는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런데 클라이드는 자존심 상하지도 않는지 내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아예 뿌리치지 못하게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내가 잘못했어, 테레제.”

    “이거 놔.”

    “한 번만 용서해줘. 응? 앞으로 네 말 잘 들을게.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제발.”

    애석하게도 그가 악마이기에 신뢰가 없는 말이었다.

    “필요 없으니까 이 손 놓고 나가. 아직은 널 보고 싶지 않아.”

    “안 돼.”

    그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하나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단호함이 있었다.

    “나 안 나갈래. 그냥 날 싫어하고 경멸해. 욕하고 때려도 돼.”

    기가 막혀.

    “방금은 분명 내 말 잘 듣겠다고, 하라는 대로 하겠다며?”

    “응, 그럴 거야. 네 곁에서 꺼지라는 말만 아니라면.”

    클라이드는 한 번만 봐달라는 듯이 내 손등에 이마를 문질렀다.

    이러면 마음 약해질 줄 알고?

    나는 또다시 손을 뿌리치려 마구 흔들어댔고 그의 등과 어깨를 있는 힘껏 퍽퍽 때렸다.

    그런데도 클라이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려 “거길 때리면 네가 다쳐.”라면서 다정하게 위치를 옮겨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반항할 의지가 훅 꺾였다.

    “가증스러워.”

    내 비난에 그가 미안하다고 했다.

    “난 네 말 안 믿어.”

    그가 또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듣기 싫다는 표정으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물론 한 손은 여전히 그에게 붙들린 채였다.

    “잘자.”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인사에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고집스럽게 침묵하며 그를 철저히 무시하겠다는 결심은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나는 어느샌가 잠에 빠졌다.

    그 잠에 꿈은 없었다.

    * * *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늘도 비가 내리나 보네.’

    비는 좋지만, 비가 불러오는 추위는 싫다.

    6월임에도 이런 날씨에는 얇은 겉옷을 하나 더 껴입는데 어제는 깜빡하고 말았다.

    그러니 오들거리며 잠에서 깨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약간 더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 안개비처럼 신비로운 외모로 싱긋 웃는 클라이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잘 잤어?”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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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개안하네]

    “……너 아직도 있었어?”

    나는 큰 소리를 냈다가 혹시 엘로이즈가 듣고 나타날까 싶어서 다급히 입술을 다물었다.

    “네 시녀가 들을까 걱정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여기에 없으니까.”

    그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엘로이즈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클라이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기는 했지. 너에게서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하게 해, 놀러 나가게 최면을 걸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가 아니라.

    “여기서 나갈 사람은 너지, 왜 엘로이즈를 내보내?”

    그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테이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침 차려 놨으니까 먹어.”

    테이블에는 달걀물에 푹 적셔서 구운 토스트와 메이플 시럽, 우유 한 컵이 놓여 있었다.

    나는 순순히 클라이드를 따라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빵에서 따끈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걸 보니 갓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냄새는 좋으나 담음새가 어설픈 걸 보니 식당에서 가져온 건 아닌 것 같고.

    “네가 만들었어?”

    “응.”

    클라이드는 시럽을 뿌린 토스트를 썰어서 내 입가에 대었다.

    “아, 해.”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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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뭐 하는 거야?”

    “먹여주려고.”

    “내가 먹을게.”

    “아.”

    나는 떨어지는 시럽을 손으로 받쳐가며 입가에 토스트 조각을 대는 클라이드를 노려보다 결국 받아먹었다.

    그가 손에 묻은 시럽을 할짝거리며 물었다.

    “맛은 어때?”

    “……맛있네.”

    “많이 먹어.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그러고 보니 어제 종일 자느라 저녁도 먹지 않고 공부도 못 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꽤 허기졌다.

    클라이드는 고집스럽게 직접 음식을 다 먹인 후에야 나를 놓아주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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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인]

    밥도 먹었고, 이제 몸단장할 차례였다.

    평소라면 엘로이즈가 도와주었겠지만, 오늘은 알아서 해야…….

    “내가 도와줄까?”

    “미쳤어? 나가!”

    복잡한 드레스를 입는 게 아니라 교복을 입고 등교할 준비를 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마법으로 빠르게 몸단장을 마친 후 머리카락을 옆으로 느슨하게 땋아 내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클라이드.”

    당연히 있을 거라 예상하고 이름을 부르자 교복 차림에 앞머리를 뒤로 넘긴 클라이드가 나타났다.

    장신구 없이 단정한 모습이라 머리를 넘겼음에도 악마답진 않았다.

    클라이드가 잡으라는 뜻으로 날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비가 오니까 이동 마법으로 학교에 가려고. 우리가 같이 있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해.”

    그게 네가 원하는 거 맞지? 하고 묻는 표정에서 조심스러움이 한껏 묻어났다.

    이 손을 잡으면 한시적 연인 관계는 다시 시작된다.

    아니, 어젯밤 그를 물리치지 못한 순간부터 재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그의 손을 잡자 장소가 바뀌었다.

    이곳은 아직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소였다.

    “여기는…… 네 개인 연구실이네?”

    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부를 살펴보는 동안 클라이드가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받아.”

    그건 열쇠였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사용해도 돼. 어차피 그 녀석은 잘…….”

    클라이드는 실수했다는 듯 잠시 입을 다물더니 말을 바꾸었다.

    “난 잘 사용하지 않으니까.”

    ‘그 녀석’은 인간 클라이드를 지칭하는 말이었을 텐데, ‘나’라고 정정했다.

    그제야 나는 클라이드에게서 계속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일부러 겉모습부터 태도까지 인간 클라이드를 흉내 내고 있어.’

    빗속에서 다투었을 때 그가 말했던 ‘노력’이 바로 이런 거였나?

    생각에 잠겨 있느라 멀뚱히 서서 쳐다보고 있자 클라이드가 내 새끼손가락을 감싸 쥐며 말했다.

    “굳이 개인 열람실까지 갈 필요 없이 여기서 공부해도 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시험 기간이라 개인 열람실을 잡는 게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개방된 도서관에서 공부하면 공물을 바쳐대는 놈들 때문에 방해돼.’

    요즘 날 향한 관심이 부쩍 커져서 몹시 성가신 상황이었다.

    “방해하면 나갈 거야.”

    내가 순순히 테이블에 가방을 올려놓고 책을 꺼내기 시작하자 클라이드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서 눈빛으로 성가시게 하는 일 외에는 얌전하게 굴었다.

    덕분에 집중한 상태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막히는 부분이 생겨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클라이드가 말을 걸어왔다.

    “내가 알려줄까?”

    “네가?”

    클라이드는 내 손에서 펜을 쓱 빼가더니 이해하기 쉽게 마력 연산식을 정리해서 써주었다.

    “이 교수는 강의가 불친절한 편이라 다른 마도학자들의 논문을 읽지 않으면 막히는 부분이 종종 생겨.”

    “그래?”

    “이런 건 하나하나 차례대로 다 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다른 수식으로……”

    그는 놀랍게도 좋은 선생님이어서 막히던 부분을 순식간에 풀어낼 수 있었다.

    “너 되게 잘 가르친다.”

    내가 순수하게 감탄하자 클라이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엎드린 자세로 팔에 얼굴을 묻고서 웃었다.

    팔에 감춰지지 않은 귀가 빨개져 있었다.

    “칭찬받으니까 기분 좋다.”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게 되었다.

    클라이드는 내 손길을 느끼며 눈꺼풀을 감았다.

    빗소리와 은은한 빛, 좋은 냄새가 나는 고요한 공간. 그리고 손가락에 감기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

    이상하게도 이런 별것도 아닌 것들이 전부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저열한 밑바닥을 보이며 서로를 거칠게 할퀸 상처를 핥아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남자에게 속고 있다는 의심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게 절대 본모습일 리가 없다는, 인간 클라이드를 흉내 낸 모습으로 나를 현혹하고 있다는 그런 의심이었다.

    알면서도 속는다는 게 이런 걸까?

    나는 기꺼이 기만당했다.

    퀘스트를 무사히 끝내기 위해 장단에 어울려주는 것인지, 인간 클라이드를 흉내 낸 모습이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악마와 인간을 구별하던 마음이 혼란하게 뒤섞였다.

    ‘이걸 노린 건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자 클라이드가 닫고 있던 눈꺼풀을 들었다.

    맑게 갠 겨울 하늘 같은 눈동자가 작살처럼 내게 꽂혔다.

    시선이 빈틈없이 달라붙은 순간.

    엎드린 자세로 날 올려다보던 클라이드가 눈 깜짝할 새에 입술을 겹쳐왔다.

    숨소리가 몹시도 가쁘게 흐르는 성급한 입맞춤이었다.

    그는 방금까지 느른하게 있던 사람 같지 않게 모든 동작에 여유가 없었다.

    머리카락과 함께 붙잡힌 뺨이 애타는 손길로 쓸렸다.

    나를 뒤덮으려는 듯 그가 쏟아져 내렸다.

    바짝 쳐든 고개가 아플 때쯤, 몸이 번쩍 들려 테이블을 깔고 앉게 되었다. 그동안 입술은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입맞춤이 도통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만하라고 어깨를 두드렸다.

    클라이드는 목 안쪽을 긁는 소리를 내며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입술을 떨어뜨렸다.

    “왜.”

    “언제까지 하려고?”

    “언제까지 해도 되는데?”

    이 질문은 자신은 언제까지든 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혔다.

    “이제 그만해.”

    내 단호한 말에 클라이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 넌 너무 잔인해.”

    “넌 너무 제멋대로지.”

    클라이드는 시선을 들어 원망하는 눈으로 날 노려보다가 도둑질하듯 짧게 키스했다.

    “잔인하게 굴어도 좋아서 돌아버리겠어.”

    띠링!

    [성좌 ‘도파민중독’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나도 좋아서 돌아버리겠단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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