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너는……?”
털썩!
콘스탄틴은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러자 주변에 숨어서 사태를 지켜보던 스티그마타 일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데미안-! 네가 감히 로드를!”
기척을 확인해보니 이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콘스탄틴의 죽음을 직감한 다른 일원들도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전부 처리하지 않으면 끝도 없이 추적자들이 붙을 터.
데미안은 짜증스럽게 눈가를 문질렀다.
“간신히 심장이 멈춰서 기분 좋게 깨어났더니 성가시게…….”
눈가를 문지르던 손을 내리자 찬란하던 황금빛 눈동자가 사악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코앞까지 달려든 스티그마타 일원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데미안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뭐…… 다 처리하고 나서 부인을 되찾으면 되니까.”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 * *
며칠째 계속 비가 내렸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한산한 식당 테라스에서 레이니와 함께 느긋하게 빵과 커피로 요기했다.
아니다. 느긋한 쪽은 나만인 듯했다.
“예전에는 아이스 커피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시원하니까 빨리 마실 수 있어서 좋네요…….”
레이니가 아이스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켠 뒤 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눈이 퀭하고 볼이 옴폭한 것이, 또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또 밤샘 작업했어?”
“연금술에 써야 할 마법 식물을 직접 재배해야 하는데 자꾸 시들어서 미치겠어요.”
나는 멍하니 테라스 너머의 산책로 쪽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내가 좀 봐줄까?”
“어떤걸요?”
“마법 식물 말이야.”
레이니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엎드린 자세로 퀭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좋은 영양제라도 있어요?”
“아마도?”
“……??”
나는 마법 식물들이 내게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레이니가 눈에 광채를 흘리며 벌떡 일어났다.
“어서 가요, 선배!”
그러다 레이니가 문득 떠오른 게 있는 표정으로 황급히 덧붙였다.
“혹시 바쁘시면 괜찮아요. 선배는 시험 칠 과목이 엄청 많잖아요.”
테레제의 학점 관리는 개판이었고 덕분에 4학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수업들 전부 시험을 쳐야 했고, 좋은 성적을 받아야 졸업 학점을 채울 수 있었다.
레이니는 실례가 되진 않을지 염려하는 얼굴로 실례되는 질문을 했다.
“혹시 이번에도 퇴학 위기가 있거나 한 건 아니죠…?”
“그런 상황은 아니야.”
이번에는 멸악 점수도 이미 최고점인데다 축제 때 명예의 전당에 오르며 받은 가산점도 있었다.
게다가.
“이상하게 이번에는 시험 난이도가 전부 쉽더라고.”
“……네에? 저랑 같이 고등 연금술 수업 듣는 4학년 선배는 어렵다고 하던걸요.”
“그 애는 어려운 과목을 듣겠지.”
레이니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서 연구실로 가자.”
“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시선을 느껴 식당 테라스 너머의 산책로 쪽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선배?”
“저기에 사람이 서 있었던 것 같아서.”
한데 지금은 추적추적 비만 내리고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내 착각이었나 봐. 아무것도 안 보이네.”
“착각 아닐걸요?”
내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치자 레이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선배 쳐다보는 애들 엄청 많잖아요. 누가 일부러 막는 건지, 이상할 정도로 접근하지는 않지만요.”
“……그랬나?”
띠링!
[성좌 ‘하하버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대체 어떻게 매번 이럴 수가 있냐고!! 난 이제 두려울 정도야……. 앞으로 나한테 뭘 보여줄 셈이지? 어디까지 갈 건데?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봐. 끝장을 보란 말이야!!]
띠링!
[성좌 ‘막드매니아’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갑자기 혼자서 드라마를 찍네…]
‘묘하게 기분이 나쁜걸.’
성좌의 반응과 레이니의 히죽거리는 표정에 떫은 걸 씹은 얼굴이 되어 연구실로 향했다.
레이니의 연금술에 필요한 마법 식물은 연구실 구석에서 조그맣게 배양 중이었다.
확실히 시들시들한 게,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내가 이파리를 살살 쓸어주자 마법 식물에서 흐르는 빛이 선명해졌다. 기운은 조금 차렸지만 이건 일시적인 처방 같은 거였다.
“환기를 자주 시켜주는 게 좋겠어. 얘가 그러길 원하는 것 같아.”
이 광경을 지켜보던 레이니가 입을 떡 벌리며 더듬더듬 물었다.
“……선배, 마법 식물이랑도 교감해요? 그러고 보니 마법 농원을 운영할 거라고 했었죠? 언제부터 시작해요? 아무래도 대박 날 것 같아요!”
나는 잔뜩 흥분한 레이니를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마침 가문에서 소유한 마법 식물 농원이랑 온실이 있어서 내 명의로 받았어.”
물론 값은 제대로 치렀다.
라울은 그냥 받으라고 성화였지만 내 운영 방식에 조금의 참견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개인 명의로 매입했다.
덕분에 적잖은 값을 치르느라 가진 재산의 절반이 거덜 났다.
레이니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러다 황실에 납품하게 되는 거 아니에요?”
어떤 차원이든 황실에 납품하는 물건이라는 타이틀은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미완료 퀘스트 창을 띄웠다.
[퀘스트: 마법 농원에서 희귀 작물 10종 이상 키우기]
▸보상: +5,000,000코인, 황실 납품 권한 획득
“그럴지도 모르지.”
퀘스트를 성공해서 황실에 마법 식물을 납품하게 된다면 초기 투자금의 몇십 배가 넘는 돈을 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도 않고, 난 적당히 벌어서 조용히 살고 싶은데.’
황실 납품이라니. 유지스와 엮이게 될 연결고리를 늘리는 짓이었다.
“아무튼, 또 문제 생기면 말해.”
“고마워요, 선배!”
나는 연구실을 나와 다음 시험이 있는 강의실로 향했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우다다다 달려오는 미모사와 맞닥뜨렸다.
“테레제!!”
“오랜만이다, 미모사.”
미모사는 양 볼이 붉어진 채 호흡을 가라앉힌 뒤, 몹시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너 혹시 데미안 못 봤니?”
나와 클라이드가 사귄다는 말에 데미안이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떠난 지 사흘째였다.
“나도 사흘 전에 본 게 다라서 모르겠는데. 그건 왜?”
“데미안이 안 보여. 개인 연구실에도, 기숙사에도 없고. 시험도 다 빠졌어. 절대 그럴 애가 아닌데.”
미모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라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찾아왔어. 그런데 너도 모르는구나.”
데미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라진 원인은 내가 확실했다.
그래서인지 미모사의 말에 괜히 어색한 미소만 짓게 되었다.
미모사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허공을 응시하느라 내 표정을 보지 못한 듯했지만.
“데미안을 발견하게 된다면 데미사에 알려줄 수 있어…?”
“물론이지. 클예부 회원들에게도 말해둘게.”
“……고마워.”
미모사는 내게 고맙다고 말한 게 무척 창피했는지 곧장 도망쳤다.
“귀엽기는.”
미모사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을 때.
“…….”
문득 시선을 느껴 다시금 뒤를 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후배들이 쭈뼛거리며 인사했다.
나를 훔쳐보다가 딱 걸린 모양새였다.
그 모습이 풋풋하고 귀여워서 화답하듯 미소 띤 채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
후배들은 왜인지 매우 좋아하는 표정으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예민했나.’
하지만 분명 집요하고 음습한 시선이 느껴졌는데.
그렇게 문득문득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제외하면 무탈한 하루가 흘렀다.
시험은 전부 수월했고 남자 주인공들은 다 같이 짜기라도 한 듯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과 클라이드가 보이지 않는 건 이해가 되는데, 일리야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모를 일이었다.
“다녀왔어.”
나는 오늘치 시험을 치고 나서 곧장 기숙사로 돌아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려니, 갑자기 날 쳐다보는 애들이 잘 인식되기 시작해서 불편해진 탓이다.
“엘로이즈?”
그런데 당연히 마중 인사를 나올 줄 알았던 엘로이즈가 잠잠했다.
“외출했나…?”
엘로이즈는 혼자서 기숙사를 관리하고 나를 돌보느라 꽤 바빴다.
평소였다면 내가 기숙사에 돌아오지 않았을 시간대였으니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자리를 비운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침실에 들어가 창문을 열어놓고 빗소리를 들으며 공부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으음…….”
책상에 잠시 엎드려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보니 침대 위였다.
그새 날이 저물었는지 사위가 깜깜했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눅눅한 빛 한 줌이 전부인 밤.
무언가가 어둠 속에 숨어있기 좋은 때였다.
“클라이드, 너야?”
“…….”
“날 계속 지켜보던 것도 너지?”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적막을 깨는 거친 숨소리가 잠시나마 귀를 잡아챘다.
그는 가까이에 있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할 말 없으면 나가줄래?”
이는 마지막 경고였고 클라이드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새끼손가락을 붙든 채 잘못을 빌었다.
“……내가 잘못했어.”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