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 *
나는 마법으로 비에 쫄딱 젖은 전신을 말리면서 무례한 침입자처럼 도서관을 들어갔다.
막 출근한 사서는 당황한 표정을 하더니 내 얼굴을 보고서는 익숙하게 개인 열람실을 등록해주었다.
눈짓으로 인사할 정신도 없이 분노한 걸음이 목적지에 다다랐다.
개인 열람실 의자에 앉자마자 오늘 칠 시험에 관련된 책이 아니라 빈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새로운 마법 설계도를 그려냈다.
손은 정확하고 빠른 동작으로 움직였고 빈 종이는 순식간에 여러 도형과 룬으로 도배되었다.
연산 실패. 회로 수 부족. 저출력…….
실패한 설계도가 옆으로 휙휙 치워졌다.
어느새 나는 완벽히 몰두한 상태로 현실의 문제를 잊어버렸다.
이때 내 세상의 시간은 남들과 다르게 흘렀다.
“…됐다.”
그렇게 문장의 마침표를 찍듯 마법이 작동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잊었던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분노를 연료로 삼아 인벤토리 아이템을 실물 없이도 아공간 마법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마법이 완성되었다.
이는 지능과 마력이 부족한 마법사라도 마도구를 살 돈만 있으면 쓸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인벤토리에 쓸만한 것들을 잔뜩 집어넣어 놔야지.”
그러면 앞으로 어떤 던전을 만나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까.
한계치까지 집중력을 끌어올렸던 탓인지, 긴장이 풀리며 나른해졌다.
감정을 불쾌하게 뒤흔들던 분노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자 내 안에 남겨진 것은 찝찝한 후회라, 절로 한숨이 바닥을 꺼뜨릴 듯 내쉬어졌다.
‘악마 클라이드도 문제고, 그렇게 떠나버린 데미안도 신경 쓰이고.’
최소한 악마 클라이드와 틀어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막막하진 않았을 텐데.
“내가 왜 그랬지?”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굴 일이었나?
곰곰이 당시 상황을 떠올리자 식은 줄 알았던 노기가 치밀었다.
그래. 적어도 내게는 그만큼 화낼 일이 맞았다.
다만 문제는 퀘스트였다.
악마 클라이드에게서 사랑의 증표를 받아야 인간 클라이드를 살릴 수 있는데,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해버렸으니.
“어떡하지…….”
이번에는 진짜로 망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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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속 시원했음 ㅋㅋ]
솔직히 나 역시 속이 시원했다.
이 세계를,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어쩔 수 없이 좋아하게 되기는 했지만, 나는 성인군자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이 내게 불쾌하게 굴면 화가 났다.
정말로 어떤 창작물에나 존재할 법한 자애로운 신처럼 인물들의 모든 면면과 행동을 용서하고 사랑할 깜냥도 없었다.
나도 강제로 이 세계에 빙의하게 된 피해자였다.
나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아.”
또다시 입술 새로 한숨이 흘렀다.
그렇지만 역시 지금이라도 클라이드를 찾아가서 내가 심했다고 사과해야 하나?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낼 수 있는 뻔뻔함이 내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찾아가봤자 사과는커녕 웃음도 안 나올 것 같은데.”
차라리 욕을 하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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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잖아. 천천히 생각해볼 시간을 가져봐.]
내 고뇌를 이해한 성좌가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나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고마워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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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물에게 너무 헌신적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괜찮아ㅠ_ㅠ 다른 상위권 BJ들은 자기가 만든 세계를 착취하니까 너도 그렇게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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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건 반대. 이 채널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는 다른 BJ들은 해내지 못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창조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성좌들의 위로에 가만히 미소 짓고 있다가, ‘방송 천재 테레제’ 성좌의 코멘트 내용이 눈에 걸렸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창작물에 빙의한 BJ 중에 자기 세계관을 착취하지 않은 사람들은 왜 성장하지 못했어요?”
내 질문에 거짓말처럼 후원창이 하나도 뜨지 않았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띠링! 하는 소리가 뚝 끊기자 묘하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돌 정도였다.
실수한 기분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해선 안 될 질문을 한 건가요?”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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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죽었어.]
…전부 죽었다고?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훅 치미는 여러 질문을 삼키고 가장 먼저 확인해볼 문제부터 입 밖으로 꺼냈다.
“하지만 제가 이 세계를 사랑할수록 우호적이라고 했잖아요. 반대로 싫어하면 적대적이고요. 그런데 어떻게 다 죽을 수가 있는 거죠?”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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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데 최상위권 채널 중에서 창작물 빙의형 BJ는 전부 세계관과 적대적인 관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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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00위 안에 드는 채널 중에서 본인 창작물에 빙의하는 방송이 드물어. 제일 많은 유형은 회귀거든.]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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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네가 특별한 거야! 물론 그것만 특별한 건 아니고!]
특별하다는 말이 이토록 달갑지 않게 들릴 줄이야.
“어째서 적대적인 관계가 생존에 더 유리한 거지…….”
우호적인 관계였던 BJ들은 왜 다 죽은 걸까.
상관관계를 알아내려면 오즈월드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그는 이상할 정도로 요즘 소식이 없었다.
오즈월드는 무소식이 희소식인 타입이 아니었다.
그를 꼴도 보기 싫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니 날 분노케 할 마일리지를 차곡차곡 쌓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눈에 보이면 울화가 치밀고 보이지 않으면 불안이 치밀다니.
‘정말로 내 인생에서 영원히 꺼져버려야 할 건 오즈월드 그 자식인데.’
역겨운 붉은 정장의 무지개 머리를 떠올리니 속이 다 울렁거렸다.
“판테온에 갈 방법은 없나.”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가 나비 날개를 흘긋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나를 판테온에 데려다줄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클라이드에게 붙잡혀 있었을 때, 그림자로 풍덩 빠지는 게 아니라 날개가 내 몸을 휘감았었어.’
“대체 무슨 힘인지 궁금한데.”
만일 황제에게 스콰이어 가문의 비전 마법 비서가 있다면 훔칠 방법이 없을까?
‘위치만 알면 날개를 통해 책을 훔쳐서 바로 도망칠 수 있으니까 가능할 것 같은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상황이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일단 시험부터 봐야겠지.
나는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오늘 칠 첫 시험까지 여유가 있었으나 공부할 기분은 아니었다.
“데미안을 찾으러 가야 하나…….”
찾는다고 해도 어디서부터 뒤져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그를 찾아가더라도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기만하는 걸로 보일 테니까.
‘역시 답은 낙원밖에 없어.’
조용히 8월까지 움츠리고 있다가 낙원의 문이 활성화되면 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의 최선이었다.
* * *
데미안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빗속을 달렸다.
처음에는 자각하기 어려웠던 지독한 상실감이 점차 선명해져, 이제는 정신이 모조리 무너져 자아가 붕괴되는 기분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테레제가 클라이드의 연인이라니.
늘 품고 있던 불안이 실체가 되어 해일처럼 그를 덮쳤다.
“빌어먹을-!”
쾅!
데미안은 분풀이하듯 눈에 보이는 아무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돌벽에 쩌저적 금이 갔고, 손은 엉망으로 뭉개졌다.
하나 빠르게 뒤덮인 유백색 마력으로 인해 금방 치유되었다.
“하아… 하아….”
데미안은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거세게 내리는 비가 안경도 없이 고스란히 드러난 맨얼굴을 사납게 두드렸다. 빗물이 날카로운 얼굴선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울고 싶은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비참했다.
“이제 현실을 깨달았겠지, 데미안.”
검은 안개와 함께 나타난 로드 콘스탄틴이 담담하게 비수를 꽂았다.
“귀족은 같은 귀족하고만 어울리지. 스콰이어 공녀가 네게 잠깐 다정할 순 있어도 영원을 약속하진 않을 거다. 너는 평민이니까.”
듣기 싫은 말에 귀를 뜯어내 버리든가, 저 입술을 짓뭉개버리고 싶었다.
하나 어떤 행동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심장을 옥죄는 ‘성흔’ 때문에, 그런 짓을 했다간 즉사했다.
“지금 네 나이는 충분히 순간의 감정에 휘둘릴 수 있다. 그래서 에디를 죽일 수도 있지. 이해해.”
살인을 이해할 수 있다니. 괴이한 말이었다.
“다만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되겠지?”
“……으윽!”
어떠한 고통에도 좀처럼 신음을 흘리지 않는 데미안이 필사적으로 심장을 보호하려는 듯이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콘스탄틴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데미안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네 방종에 다른 형제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그만…! 끄으윽…!”
“우리의 대계를 잊었나? 썩어빠진 지금의 인간계를 없애고 천계의 문을 열어 신세계를 만들자던 형제들과의 약속과 그간의 희생을 헛되게 할 셈인가?”
콘스탄틴은 데미안을 매섭게 질책하며 통증 강도를 높였다.
이로써 형제를 죽인 벌을 참회하게 하고 신을 대신하여 내린 형벌로 죄를 사하겠다는 듯.
이내 체벌의 시간이 끝났다.
데미안은 죽은 물고기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의식이 살아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차갑게 명령했다.
“오늘 밤 테레제 스콰이어를 죽여라. 그것으로 네 죄를 사하겠다.”
“…….”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 없던 네가 겨우 여자 문제로…… 쯧.”
콘스탄틴은 혀를 차고는 냉정하게 발걸음을 돌렸으나 거기서 더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흙바닥이 살아있는 뱀처럼 똬리를 틀어 두 다리를 휘감은 탓이었다.
그리고 의문을 표하기도 전.
푹!
마력 화살이 육신을 꿰뚫었다.
콘스탄틴은 부릅뜬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중인 데미안의 모습이 보였다.
“데…미안…!”
데미안은 난생처음 보는 무감정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저를 응시했다.
감정을 숨긴 게 아니라 완벽한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