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 *
<실전 전투 마법> 교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평가할 기준이 없는 관계로 재시험을 치르겠다.”
“아아.”
여기저기서 불만 어린 탄식이 쏟아졌다. 누군가는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갑자기 등장한 고래 고스트로 인해 숲을 탐사하는 시험 자체가 무용지물이 된 탓이었다.
교수는 재시험 일정을 공지하더니 주변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마법 동물들과 나를 번갈아서 보다가 한숨처럼 덧붙였다.
“테레제는 시험에서 제외한다.”
마법 동물은 자유 의지를 갖고 움직인다. 고스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언제든 나를 도울 일이 생긴다면 오늘과 같은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될 수 있었다.
교수는 그 점을 염두에 둔 건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서로 제출하고, 앞으로 네게 특화된 탐사 방식을 연구하는 것으로 시험을 대체하도록 하지.”
“네, 교수님.”
“이만 해산! 곧장 발할라로 돌아가도록.”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말이나 마차 등에 올라탔다.
나 역시 타고 온 말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테레제.”
클라이드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눈꺼풀을 깜빡이고 있을 때, 마찬가지로 나만큼이나 놀란 학생들이 숨죽인 채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무시하는 건지 클라이드가 다정하게 말했다.
“네 말은 사용인이 알아서 데려올 테니까 내 마차를 같이 타고 가.”
나는 괜찮은데, 라고 대답하려다가 말을 꿀꺽 삼켰다.
그에게서 사랑의 증표를 받으려면 감정이 깊어져야 할 테고, 그러려면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야 할 테니까.
“그래.”
순순히 클라이드를 따라 마차에 올라타니 두 사람분의 수건과 보송보송한 겉옷이 준비된 게 보였다.
‘애초에 날 태우려고 마차를 끌고 온 모양인가 본데.’
클라이드는 내 옆자리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살살 문질러 닦았다.
시야를 반쯤 가린 수건 아래로 보이는 그의 도톰한 입술이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저기, 클라이드.”
“응.”
“우리가 사귀게 된 거 비밀로 했으면 하는데.”
수건으로 부드럽게 뺨을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왜?”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으나 서늘한 기색이 느껴졌다.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양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가문의 문제를 거론하자 클라이드가 작게 한숨지었다.
“방해받지 않으려면 비밀스럽게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비밀스럽게.”
클라이드는 마뜩잖은 듯 내 말을 따라 하더니 이내 수건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마주쳤다.
“이유가 그게 전부는 아닌 거 같은데.”
그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를 들켜봤자 좋을 게 없다고. 특히 일리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클라이드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내 이마에 본인 이마를 톡 부딪쳤다.
“속상해.”
원래 학교나 일터에서 사귀는 건 비밀로 하는 게 좋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건 헤어짐을 염두에 둔 말이었기에 관두었다.
속상하다고 말하는 클라이드를 더 언짢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클라이드가 침묵하는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속상하다고 하면 달래줘야지.”
“나 그런 거 잘 못 하는데……?”
“그럼 내가 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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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줘! 알려줘! 알려줘! 알려줘! 알려줘! 알려줘! 알려줘!]
묻는 표정이 되바라져서인지 눈동자가 물빛처럼 맑고 투명한데도 묘하게 천박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럴싸해 보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용모 때문이었다.
얼굴이 개연성이라더니, 사실이구나 싶었다.
하나 거절했다.
“아니.”
개수작이 분명한 말을 수락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나의 단호한 표정을 본 클라이드가 혀로 입술을 슬쩍 쓸었다.
“생각보다는 바보가 아닌가 봐. 우리 테레제는.”
어디서 이와 비슷한 모욕을 당한 적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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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한테 바보라고 하지 마!]
저건 왜 블라인드 처리를 안 하는 거야? 악플이잖아.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으니 클라이드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 웃으며 날 끌어안았다.
“역시 난 네가 좋아.”
그리고는 뺨과 관자놀이, 머리칼에 제 얼굴을 비비적비비적 문질러댔다.
땋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있는 게 느껴져 그만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떨어뜨리자 냉큼 붙어온다.
그러기를 세 번쯤, 어느새 클라이드를 피해 달아날 곳도 없이 마차 벽에 바짝 붙게 되어버렸다.
순식간에 마차 안을 채운 습한 공기가 들쩍지근해졌다.
더위가 차오르는 것도 같았다.
클라이드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긴 속눈썹을 유려하게 내리깔고서 숨을 골랐다.
숨소리가 너무 가까워 뺨을 벅벅 긁고 싶어졌다.
“……불편하니까 옆으로 좀 가.”
틀림없이 못된 얼굴로 장난을 칠 줄 알았던 그가 순순히 물러났다.
“…….”
“…….”
왜인지 어색했다.
나는 오른쪽 창밖을, 클라이드는 왼쪽 창밖을 보았다.
마차는 덜컹거렸고 빗물이 지붕과 유리창을 시끄럽게 두드리는데도 옆의 옷자락 쓸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내뱉는 숨이 천둥처럼 들려왔다.
전부 내 새끼손가락을 제 새끼손가락으로 얽고 있는 클라이드 때문이었다.
* * *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열흘이 남았다.
퀘스트가 뜬지 하루가 흘렀으니 이제 아흐레가 남았나?
클라이드는 생각보다 집요하지 않았다.
어제도 발할라에 도착했을 때, 나를 강의실이나 식당, 도서관에 꼬박꼬박 데려다주는 일 외에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다. 잘 생각해보니 일이 있기는 있었다.
그는 점심시간을 당연하다는 듯 나와 함께 했고, 도서관에서는 옆자리를 차지하더니 앞에다 책을 잔뜩 쌓고서 뻔뻔하게 날 구경했다.
시선으로 방해받으니 거슬려서 왜 이러냐고 한소리했다.
그러자 “책으로 가렸잖아. 안 보여.”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었다.
도서관에서 책으로 방어벽을 쌓는 짓을 해놓고 당당히 엎드려 있는 학생회장이 정말로 눈에 띄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건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하는 짓만 보면 인간 클라이드랑 똑같은데.’
악마 클라이드를 구분하는 요소인 특유의 헤어와 피어싱이 없으니 더 헷갈렸다.
몇 번은 클라이드가 돌아왔나 싶어서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빙긋 웃는 표정에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어쨌든, 연인이라는 게 생각보다는 훨씬 담백한 관계인 것 같아.’
난 솔직히 좀 더 끈적하고 곤란한 걸 각오했었다.
몽마의 연인이라니.
지금까지 얽힌 남자 주인공들과도 그렇게 껴안고 입을 맞추었는데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내 연인 기준이 너무 썩어버렸나?
조금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연인이란 건 대체 뭘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머리를 만져주던 엘로이즈가 반응했다.
“연인이요?”
“응. 보통 사귀는 사이에 뭘 하나 싶어서.”
엘로이즈가 빗을 툭 떨어뜨렸다.
“아가씨 연애하세요……?”
“아니! 내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궁금할 뿐이야. 막 연인이 된 사람들이 하는 게 뭔지 잘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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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는 아닌데=지 얘기임]
엘로이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느릿한 동작으로 바닥에 떨어진 빗을 들어 올렸다.
“연애 초반에는 같이 맛있는 걸 먹고, 연극도 보고, 산책 좀 하는 정도가 끝이죠. 여가 생활을 같이하는 수준이에요.”
“아…… 그런가?”
예상과 달리 너무 건전한 내용에, 손잡기부터 포옹, 키스를 떠올린 내가 부끄러워졌다.
‘진짜 나 이상해진 거 맞나봐.’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엘로이즈는 재차 날 추궁했다.
“진짜로 연애하는 거 아니시죠?”
“아니라니까. 내가 무슨 연애를 하겠어.”
“항상 남자를 조심하셔야 해요, 아가씨. 특히! 지금처럼 아가씨의 상황이 특수할 때는 더더욱이요.”
나는 그제야 엘로이즈가 뭘 걱정하는지 눈치챘다.
스콰이어 가문이 다시 비전 마법을 찾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생겼으니, 들러붙을 파리를 걱정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런 것들은 처리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들은 내 그림자에 나비 날개가 있든 잠자리 날개가 있든 관심 없었다.
오직 내 애정에만 몰두하니까.
“알았어. 조심할게.”
“지금 접근하는 놈들은 전부 불순한 목적이 있는 거니까 눈길 하나 주지 마시고 뻥뻥 차버리세요. 여기를 차면 한 방이에요!”
“으응…….”
차마 엘로이즈가 가리키고 있을 부위를 확인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 다녀올게.”
“잠깐만요, 아가씨! 비 내리니까 우산 챙겨가세요.”
나는 엘로이즈가 내민 노란 우산을 들고 기숙사를 나왔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오늘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오늘은 구름이 잿빛이네.”
해가 떴을 시간이라 날이 밝기는 했지만, 어제만큼 하늘빛이 청명하지 않고 묘하게 탁했다.
나는 우산을 펼치고서 걸음을 떼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
상대의 힘이 어찌나 센지, 두 발이 허공으로 반쯤 떠올랐다.
그리고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덜미에 닿는 상대의 숨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상대를 확인해보니 클라이드였다.
그는 약간 화가 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연애한다는 사실까지 숨길 필요 있어?”
‘엘로이즈와 한 대화를 엿들었구나.’
그가 토라진 건 토라진 거고, 나는 얼떨떨하게 궁금한 걸 물었다.
“언제부터 있었어?”
내 등교 시간은 상당히 이른 편에 속했다.
게다가 오늘은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려고 새벽같이 나오는 길이었는데 클라이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 덮쳤다.
클라이드는 “몰라.”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목덜미에 얼굴을 세게 비벼댔다.
음……. 제 기분이 몹시 상했으니 달래어달라는 항의 같은 건가.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