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고개 숙여.”
클라이드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지? 언제부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머리를 덮은 우비를 최대한 밑으로 끌어당겼다.
비와 함께 떨어지는 은빛의 마력 입자는 마법으로도, 이까짓 옷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이러는 건 그에게 마력 입자가 조금이라도 덜 닿게 하려는 것도 있지만, 실은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얼굴을 가려야 하니까.
붉어진 눈동자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그래서 한 행동이었다.
“크르르륵!”
“캬아악!”
정화된 마법 동물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어 클라이드를 향해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괜찮아. 나 안 위험해.”
혹시라도 내가 다칠까 봐 신경이 바짝 곤두선 마법 동물들을 타이르자 클라이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안 위험해?”
정말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거냐고 묻는 투였다.
이해했다. 악마는 위험하니까.
특히 인간계에서 큰 제약 없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반인반마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존재이니 위험한 게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허세를 부렸다.
“응. 전혀 안 위험해.”
악마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얼굴을 내 어깨에 기대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누긋하게 풀어진 분위기가 느껴졌다.
곧이어 웃음이 점차 잦아들고, 조그마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내가 위험하지 않구나.”
7살쯤 된 어린아이 같은 말투였다.
“그런데 왜 그랬지?”
목소리에 점차 분노가 얼룩지기 시작했다.
클라이드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다들 나한테 왜 그랬을까? 왜 나만 죽어야 할까? 넌 알고 있어?”
“…….”
“지금도 그렇잖아.”
별빛처럼 아름다운 마력 입자가 그의 눈동자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붉게 일렁이던 눈동자가 일순 파랗게 물들었다가 도로 붉게 돌아왔다.
“나를 사랑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좋아하는 거라고는 사랑밖에 없는 악마가 유일하게 갖지 못하는 게 바로 사랑이었다.
“너는 날 사랑해?”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쪽은 인간 클라이드지, 시나리오상 오답인 악마에게는 특별한 애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작자라 해도 캐릭터마다 가지게 되는 애정의 크기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빈말로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질문이 나를 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일지도 모르니까.’
몽마가 사랑한다고, 함께 잠들자고 하는 말에 섣불리 대답하면 그대로 사망하게 된다.
특히 지금 악마 클라이드의 호감도는 검은 하트 4개였다.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악마 클라이드는 곧 깨달았다는 듯이 웃었다.
“아. 네가 사랑하는 건 인간 쪽이었지. 내가 아니라.”
“…….”
악마가 내 손을 잡고서 본인 머리에 얹었다.
애정을 갈구하는 행동이었다.
“나도 좀 사랑해주면 안 돼?”
악마의 원래 모습과 달리 인간 클라이드처럼 차분한 외양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말을 내뱉으니, 마음이 술렁거렸다.
“제발. 응?”
부드럽게 애원하는 목소리에 저절로 손을 움직였다가 화들짝 놀라 떨어뜨렸다.
‘페로몬에 당했던 건가?’
악마의 페로몬 특유의 향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요청을 들어주고 말았다.
클라이드는 내가 경계하는 표정을 짓자, 단번에 싸늘해졌다.
“죽어도 내가 싫은 모양이구나.”
털썩!
그에게서 음습한 기운이 퍼져나가더니 마법 동물들이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모두 잠이 든 것이다.
“그만해!”
내가 화를 내자 클라이드는 더 날카롭게 반응했다.
“네가 사랑하는 것들이 싫어.”
“억지 부리지 마. 자꾸 이러면 정말로 널 싫어할 거야.”
“그래?”
싫어할 거라는 말에 자극받았는지 악마는 보란 듯이 아공간에서 단검을 꺼냈다.
델브 던전에서 악마를 죽일 때 썼던 성유물이었다.
“이걸로 내 심장을 찌르면 누가 살아남을지 궁금하지 않아?”
“너 정말…!”
“성유물이니까 악마인 내 쪽이 죽을까? 어쩌면 둘 다 죽을지도 모르고.”
내가 검을 빼앗으려 들자 악마가 키득거리며 손길을 막았다.
그러더니 검을 심장에 정확히 겨누었다.
“미쳤어? 대체 왜 이래!”
감정적이고 난폭하게만 구는 악마가 도저히 감당되지 않았다.
“그만하라고!”
악마는 새빨간 눈동자로 날 노려보았다.
“네가 자꾸 화를 내니까 나도 화가 나.”
그 말에 그제야 내가 부정적으로 행동할수록 악마가 더 사납게 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들끓는 감정을 애써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화내서 미안해.”
“흐음. 그래?”
하나 악마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딴 사과에 전혀 관심 없다는 듯한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원하는 게 사과가 아니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면 어떨까?
나는 도박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랑해.”
멈칫.
그는 내가 사랑한다고 할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좁히며 부정했다.
“거짓말.”
그래. 내 말은 진심이 아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그가 내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다음으로 할 말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널 숙명처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랬지. 인간인 클라이드 윌로우에게. 그건 내가 아니야.”
클라이드는 내 목덜미에 코를 대고서 살냄새를 맡았다.
“몽마는 사랑을 가장 예민하게 느낄 수 있거든. 한데 네게서 그때처럼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안 나. 빌어먹게도.”
그는 미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며 큭큭 웃었다.
그러다 한순간에 생기를 잃고 메말라버린 꽃처럼 표정이 시들었다.
“……나도 사랑해줘.”
나뭇잎 사이로 떨어진 빗물이 그의 뺨을 타고 눈물처럼 흘렀다.
“제발 나 좀 사랑해줘. 응?”
“…….”
나는 목이 졸린 듯 침묵했다.
지금만큼은 거짓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클라이드가 간절하게 날 쳐다보았다. 깊은 애정을 갈구했다.
“이젠 다 필요 없어. 너만 날 사랑해주면 돼.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사라져 줄 테니까.”
내 정체를 모르는데도 뭔가를 느끼고 있는 걸까?
“나만의 것이 되어줘.”
띠링!
[퀘스트: 악마의 연인]
▸보상: 악마 클라이드 소멸
▸실패: 인간 클라이드 소멸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날까지 악마 클라이드에게서 사랑의 증표를 받지 못하면 실패합니다.
‘아…….’
잔인한 보상과 페널티에 소리 없이 신음했다.
하나 퀘스트 내용에 충격받은 건 나뿐인 듯했다.
띠링!
[성좌 ‘남주 편식합니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와씨 이거지!! 악클 제발 죽어]
띠링!
[성좌 ‘강경 클라이드파’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좀만 참으면 되겠다 ㅎㅎ]
띠링!
[성좌 ‘인간 클라이드 악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남주는 인간 클라이드라고ㅠ 악마 클라이드는 눈치껏 빨리 꺼져줘~]
성좌들은 당연히 성공을 예상했고, 악마의 죽음을 바랐다.
꼭 원작처럼.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한데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는 차갑게 식은 손으로 여전히 본인 심장을 겨누고 있는 클라이드의 단검을 치워내고서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클라이드는 자신이 소멸 위기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아찔하리만큼 예쁘게 웃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을 그러모은 미소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호감도: ♥♥♥♡♡]
심지어 호감도도 올랐다.
“기쁘다.”
그는 내 대답이 그저 좋은지, 거대한 몸집으로 저의 반만 한 내게 꾸역꾸역 안겼다.
‘그렇게 좋은가. 내가 대체 뭐라고.’
클라이드가 힘을 거두었는지 잠에 빠졌던 마법 동물들이 하나둘 말짱하게 일어났다.
자신을 사랑해주면 내가 싫어할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사나운 짐승을 길들인 기분인데.’
악마가 가엽고 딱해졌다.
연인 놀이를 하다가 깜빡 죽을 수도 있는데, 측은함이 가시지 않는 걸 보니 확실히 나도 제정신은 아니다 싶어졌다.
“테레제!”
그때 마침 상황이 종결됐는지 엘라와 프로스트가 돌아왔다.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달려오더니 나와 클라이드를 보고는 “헙.”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입술을 다물었다.
아픈 친구를 돌봐주는 자세라고 하기엔 너무 바짝 붙어있기는 했다.
엘라와 프로스트가 등장했음에도 클라이드는 내 품에 안긴 상태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족할 때까지 이러고 있겠다는 고집이 느껴져,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의 주의를 돌렸다.
“주변 상황은 어때?”
“일대가 전부 정화된 거 같아. 마수의 흔적은 더 발견하지 못했어.”
“다른 팀도 마주쳤는데, 더는 탐사할 것도 없겠다고 하던걸? 고스트가 숲 전체를 정화했더라고.”
그 말에 시선을 돌려 비가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구름이 끼어 있음에도 하얀 커튼을 쳐둔 듯 은은한 빛이 드는 하늘은 꽤 청량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비가 내려 세상이 더욱 활기가 도는 오전의 정경이었다.
“그러네. 고래가 떠났구나.”
빗물과 함께 떨어지던 별빛 같은 마력 입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내가 잠시 멍하게 하늘을 보고 있자 프로스트가 헛기침했다.
“큼. 저기, 테레제? 지금 우리 위험한 상황인 건 아니지?”
그 말이 일순 이해되지 않아 의아하게 쳐다보자 프로스트가 허둥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마법 동물들이 이렇게 몰려들어 있는 광경은 처음 봐서. 혹시 공격하지는 않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
마법 동물들은 여전히 경계를 내려놓진 않았지만, 아까처럼 클라이드를 향해 위협적인 소리는 내지 않았다.
대신 내 주변을 빙글빙글 배회할 뿐이었다.
“위험하지 않아. 마법 동물은 전부 착한 애들이니까.”
띠링!
[성좌 ‘하하버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나 진짜 미칠 것 같아… 지금 테레제 완전 X즈니 주인공이잖아…]
프로스트가 빗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꼭 그 석상 같네.”
“응?”
“아, 아무것도 아냐. 이제 슬슬 이동할까?”
그 말에 엘라가 내게 안겨있는 클라이드의 눈치를 보았다.
“클라이드는 괜찮은 거지…?”
나는 클라이드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응, 이제 괜찮아.”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