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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72화 (173/277)

172화

* * *

발할라의 교정은 초여름의 싱그러운 활력으로 가득했다.

밝고 가벼운 차림의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잔디밭이나 야외 테이블을 차지한 채 공부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데미안이 속한 무리였다.

성별이 반반 섞인 이 무리는 선망의 대상으로 주목받았다.

다들 괜찮은 집안의 자제인데다 다재다능하고 외모도 번듯했기 때문이다.

그중 데미안은 유일한 평민이었으나 압도적인 능력치와 수려한 외모 때문에 무리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청춘을 그려낸 명화가 있다면 딱 이러할 듯한 자유로운 모습으로 야외 테이블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이에서 데미안은 홀로 조용히 먼 곳을 응시하며 대화에 끼지 않고 있었다.

“데미안? 너 괜찮아?”

꽤 귀여운 외모의 여자가 데미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금색 장미 브로치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데미사가 아니라는 뜻이지만 누가 보아도 데미안을 좋아하는 게 티가 났다.

여자가 염려하는 표정으로 데미안의 이마에 손을 대려 했다.

손이 닿기 전인데도 데미안은 치미는 불쾌감에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지는 걸 느꼈다.

하나 다년간의 훈련으로 금세 미소를 그려낼 수 있었다.

데미안은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이마로 다가오던 손을 밀어냈다.

“괜찮아. 시험공부 하느라 잠을 조금 못 잤더니 멍해져서 그래.”

전혀 웃기지 않은 말이었는데 여자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너처럼 똑똑한 애도 시험공부를 해?”

여자가 친밀하게 농담을 걸어오는 게 무척이나 성가셨다.

그때 활동적인 인상의 남자가 끼어들어 너스레 떨었다.

“데미안 같은 녀석이 노력까지 하니까 내 성적이 항상 엉망인 거야. 안 그래?”

“동감.”

“야, 데미안. 내가 너 돋보이라고 바닥 깔아주는 거야. 알지?”

데미안은 위트있는 척하며 한마디씩 거드는 남학생들을 향해 기계적으로 웃었다.

이들과 함께 있는 게 지루하다 못해 지쳤다.

그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고 있을 때, 킥킥 웃으며 공을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던 남학생 하나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어, 저기 테레제다.”

그 한마디에 일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데미안의 시선이 야외 테이블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난 길목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심은 나무 사이사이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시험공부 중인지 테레제가 책을 보며 느릿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저러다 부딪힐 것 같은데.’

테레제는 약간…… 아니, 많이 부주의하다.

자신이 곁에 있다면 저렇게 책만 주시하며 걸어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러다 넘어지는 거 아냐?”

제게만 테레제의 행동이 위태위태하게 느껴진 게 아니었는지 한 녀석이 툭 말했다.

데미안은 신경 끄고 그녀에게 둔 시선을 치우라고 사납게 굴고 싶은 것을 꾹 견뎌냈다.

그때 빌어먹을 바람이 불었다.

잠시 고개를 든 테레제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융단처럼 고운 머리카락이 물결치는 광경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오….”

기어이 누군가의 입에서 감탄사마저 흘렀다.

테레제에게 한 번 쏠린 관심은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아예 작정하고 테레제를 화두로 삼았다.

“우리 중에 나비 날개 본 사람 있어?”

“난 아직 못 봤어. 데미안이라면 봤을 것 같은데. 어땠어?”

방금 질문한 남학생은 테레제를 뚫어지게 주시하는 중인 데미안을 발견하고는 흠칫했다.

그냥 쳐다보는 거라고 받아들이기엔 데미안의 눈빛이 너무 집요해서 오싹한 느낌마저 든 탓이었다.

남학생은 어쩐지 봐선 안 될 걸 본 기분을 느끼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어… 그래서 그림자에 생긴 나비 날개가 스콰이어 가문의 비전 마법이라는 거지?”

“아직 정확한 정보는 없어. 스콰이어 가문에서도 여전히 파악 중인 것 같아.”

“100년 만에 잃어버린 비전 마법을 되찾다니. 다시 스콰이어 공작가의 전성기가 찾아오려는 건가?”

“흐응. 그런가.”

여학생들은 괜히 관심 없는 척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테레제가 나타난 순간부터 계속 그녀만 주시하는 데미안 때문에 질투로 속이 끓는 중이었다.

무리 중 가장 예쁜 여학생이 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말을 걸었다.

“데미안, 오늘 우리랑 같이 시험공부 할래?”

모두가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데미안은 점점 멀어지는 테레제의 뒷모습을 집착적으로 응시하다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일어날게.”

“뭐? 데미안!”

뒤에서 부르는데도 그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테레제를 뒤쫓았다.

그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저도 사람이었다. 그러니 예쁘고 귀여운 것에 마음이 갈 수 있었다.

그 정도여야만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주변에서 그녀를 보는 눈빛들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여실히 체감될 정도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게만 예쁘고 귀여운 게 아니라는 듯 주제도 모르고 같은 마음을 품는 녀석들이 늘어갔다.

감정을 감추려 노력하는 저와 달리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일리야 번스타인 교수.

그가 테레제를 보던 눈빛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절로 이가 갈렸다.

“뭐 하는 짓이지, 데미안?”

“…….”

특별한 때가 아니면 늘 한적한 동관 후문을 지나치던 중이었다.

데미안은 걸음을 멈추고 서늘한 시선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통로에 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발할라 학생임과 동시에 스티그마타의 일원, 에디였다.

그는 테레제 스콰이어를 전담하는 감시자이기도 했다.

“리비 스콰이어는 어쩌고 내 타켓의 뒤를 쫓고 있는 거냐.”

에디는 데미안의 돌발 행동에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데미안이 빙긋 웃었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네 역겨운 웃음은 리비 스콰이어를 홀릴 때나 쓰시지?”

신랄하게 비꼬는 목소리에 적의가 가득했다.

에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귀족가 출신이라는 사실만 앞세워, 데미안을 찍어누르고 싶어서 안달인 머저리.

데미안은 어느새 테레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쓸었다.

누가 보아도 매우 짜증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동작이었다.

에디의 기분이 확 구겨졌다.

“지금 감히 내게 짜증 내는 건가? 나야말로 너 때문에 타겟을 놓쳤는데?”

데미안은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질렀다.

갑자기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들어 목소리마저 낮게 착 가라앉았다.

“평소처럼 조용히 따라붙으면 됐을 텐데. 왜 오늘따라 모습을 드러내서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네.”

“하.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로드께서 내게 직접 네가 테레제에게 접근하는 걸 감시하라고 명령하셨다.”

애초에 로드 콘스탄틴에게 데미안의 이상행동에 대해 보고한 사람이 에디 본인이었다.

그는 약점을 잡은 자 특유의 비열한 표정을 의기양양하게 지으며 비꼬았다.

“당장 돌아가서 리비에게 늘 하던 대로 웃음이나 팔아.”

데미안은 대단히 기분 좋지 않았다. 자신이 싸구려 취급당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에디가 테레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그녀를 계속 쳐다보고 있을 걸 생각하니 돌연 머리에 피가 쏠렸다.

단순히 스티그마타가 해야 할 당연한 임무임에도 분노가 치솟아서 감정이 제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데미안의 금안이 독니를 드러낸 뱀의 것처럼 오싹하게 번득였다.

“왜 쓸데없이 그런 걸 보고했어, 에디.”

“읍-!”

에디는 기척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하관이 손아귀에 꽉 붙들렸다.

으스러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에 눈이 뒤집혔다.

“조용히 있었다면 내가 조금 더 널 살려뒀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에디의 육신이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다.

털썩!

바닥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에디의 육신을 타고 흙이 기어 올라와 아래로 끌어내렸다.

시체를 삼키느라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던 땅이 다시금 평평해졌다.

“…….”

데미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끄러미 바닥을 보았다.

이는 그가 모르는 능력이었다.

한데 이런 짓을 골백번은 더 해봤다는 양 마력을 자연스럽게 움직여 뒤처리한 것이다.

더 의아한 점은, 이런 자신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왜일까?

어째서 저도 모르는 변화가 두렵기는커녕 이상하게 웃음이 나올 것 같지?

데미안은 다시 안경을 썼다.

의도한 대로 인상이 한결 부드럽게 보였음에도 근본적 부분이 바뀐 것처럼 묘하게 이전 같지 않았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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