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 * *
나비는 날 다시 내 방 응접실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런데 가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엘로이즈만 초조하게 방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다 날 발견하자마자 비명처럼 소리쳤다.
“돌아오셨군요! 저는 아가씨께서 또 이상한 곳에 가신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라요.”
“아냐, 그냥 좀 엉뚱한 곳을 다녀왔을 뿐이야. 그나저나 가족들은?”
“다들 아가씨를 찾으러 나가셨어요.”
이런. 나비가 엉뚱한 짓을 하는 바람에 오전부터 집안이 발칵 뒤집힌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마법 전서구를 소환해 가족들에게 전부 보냈다.
곧 모두가 응접실로 뛰어 들어왔다.
“어딜 다녀온 거니? 다친 데는 없지?”
그들은 나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로잔이 내 등을 보고 기겁했다.
“이게 무슨 피니?!”
아, 유지스가 내 등을 만졌을 때 묻은 피인 모양이었다.
“제 피는 아니에요.”
내 설명에도 가족들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대체 어딜 다녀왔기에 그새 피가 묻을 일이 생긴단 말이냐?”
“어… 그게….”
모두 강렬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바른대로 말하라는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황제 폐하의 침실이요.”
전부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떡 벌렸다.
나는 오해를 살까 봐 얼른 손사래 쳤다.
“그게, 태양궁은 대부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해두었잖아요. 그래서 거기도 갈 수 있나 궁금해했더니 갑자기 이동되더라고요.”
라울은 이마를 짚었고 주세페는 버럭 소리 질렀다.
“당장 저 나비를 없애버릴 거야!”
“미숙해서 일어난 사고였어. 다행히 폐하께서 기분이 좋으셔서.”
이 대목에서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
어미가 죽은 날이라 기분이 좋다며 취한 목소리로 말하던 유지스가 생각나 마음이 불편해졌다.
“…기분이 좋으셔서 그냥 넘어가셨어요. 그리고 스콰이어 나비에 대해 자세히 아시는 눈치였고요.”
그 말에 라울이 신랄하게 조소했다.
“그렇겠지. 나는 애초에 윌로우 가문에서 비전 마법서를 태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아. 분명 훔쳐서 황제에게 바쳤을 거다.”
로잔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폐하의 침실을 침입한 것은 중죄인데 정말로 괜찮은 거니?”
“괜찮아요. 폐하께서 본인이 잠들면 집으로 가도 좋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으니까요.”
황제의 불면증은 대귀족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라울이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폐하께서 주무셨다고?”
“네.”
“……그분은 절대로 눈앞에 누군가를 두고 주무실 분이 아닌데.”
“많이 취하셨었거든요.”
그런 것치곤 발음이 꽤나 정확했던 것 같지만, 가족들을 안심시키려 계속해서 그가 취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가족들은 내 말에 완벽히 설득되진 않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차후 황제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지켜보자고 했다.
라울은 몇 번이나 나와 리비에게 신신당부했다.
“한동안 되찾은 비전 마법 때문에 주변의 시선이 너희에게 쏠릴 거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즉시 아비에게 말하거라.”
“네. 그럴게요.”
“알겠어요.”
얼추 가족회의 아닌 회의가 마무리된 것 같았다.
나는 눈치를 슬쩍 살피다 헛기침 후 은근하게 말했다.
“그런데 비전 마법을 되찾을 실마리를 얻게 되었으니까, 이건 확실히 기쁜 일이죠?”
“당연히 무척 기쁜 일이지. 스콰이어 가문은 앞으로 비상할 일만 남았다. 정말로 너희가 자랑스럽구나.”
라울은 지금까지 진지하던 태도를 훌훌 벗어던지더니 몹시 통쾌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우리 가문이 마법 명문가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했던 놈들을 철저히 응징할 것이야.”
“당신도 참.”
로잔은 애들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며 핀잔했다.
나는 라울의 기쁨에 전염된 듯 활짝 웃었다.
“이렇게 기념비적인 날에 그냥 넘어가면 좀 그렇죠? 가족들끼리 파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말에 라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또 그놈의 술을 마시려고 구실을 찾는구나. …하지만 이건 확실히 축배를 들 일이지. 좋다. 오늘 내내 이 기쁜 날을 기념하자꾸나.”
“만세!”
꿈에 갇혀 있는 긴 시간 동안 강제로 금주하게 되어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라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정찬 때 보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응접실을 나가는 가족들을 복도까지 배웅했다.
“그런데 테레제. 아직도 이 방이 좋은 게냐?”
라울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아 의아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그가 괜히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널 찾아오기가 너무 멀어서 다리가 아프구나.”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으이구… 그냥 가족들 방이랑 가까운 곳으로 방을 옮겼으면 좋겠다고 하면 되잖아요!]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그럼 어디로 옮길까요?”
그 말을 하자마자 리비가 손을 번쩍 들며 간절하게 외쳤다.
“제 옆방이요! 제발!”
“아니, 내 옆방이 더 크니까 거길 써.”
주세페의 반박에 리비의 표정이 대번에 새치름해졌다.
“그 방은 위치가 별로야.”
“뭐라고?”
이러다 둘이 싸울 것 같아서 중간쯤에 있는 방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라울이 내 어깨를 살며시 쥐었다.
“이렇게 다 함께 있으니 좋구나.”
“…그러게요.”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충만감이 내 안의 불안을 모두 걷어내고 용기를 주었다.
* * *
유지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던 거지?’
습관처럼 이마를 감싸 쥐는데 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에서 깼을 때 두통이 없는 날은 극히 드물기에 별일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흐음?”
어설픈 솜씨로나마 열심히 손을 치료한 흔적을 발견했다.
절대로 황실 의사의 솜씨는 아닐 터.
“…아.”
뒤늦게 테레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영애가 치료한 것인가? 왜?
유지스가 한참 자신을 손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베인이 빈 술병을 치우러 들어왔다가 멈칫했다.
“일어나셨습니까, 폐하.”
“그래.”
베인은 누구보다 황제의 심기를 파악하는 일에 능했기에 지금 그가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임을 바로 눈치챘다.
유지스는 창을 열어 바깥바람을 쐬다가 조용히 침실을 정비 중이던 베인에게 물었다.
“스콰이어 가문에 대한 새로운 소식은 없느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나왔다.
“가문 내에서 비전 마법을 되찾았다고 정식으로 공표했다고 합니다. 어떤 능력인지는 파악 중입니다.”
“자네도 어제 보았잖은가. 짐의 침실에 스콰이어의 장녀가 불쑥 나타난 것을.”
“어찌할까요?”
태양궁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황제의 목전에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이 하필 스콰이어 가문에 생겼다.
당장 그 힘을 탄압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나 유지스는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뭐랄까,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짐이 스콰이어 가문을 과하게 누르기는 했었지. 조금 풀어주어도 좋을 듯하구나. 그러니…….”
유지스는 아무리 자신이 취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제 앞에서 심히 편하게 굴던 테레제를 떠올리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테레제 스콰이어에게 하사하기 괜찮은 직책을 알아봐서 보고하거라.”
과연 취하지 않은 제 앞에서도 그렇게 귀엽게 굴지 궁금했다.
* * *
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고작 하루를 공작저에서 머물며 푹 쉰 뒤, 다음 날 아침부터 분주하게 등교할 준비를 했다.
“조금 더 쉬시면 좋을 텐데요.”
엘로이즈의 말에 고개 저었다.
“시험 기간이잖아.”
시험이 끝나면 여름 방학이다. 조금만 부지런 떨면 긴 휴가가 시작되니 벌써 설렜다.
‘이번 시험은 낙제만 받지 않으면 되니까 부담스럽지도 않아.’
게다가 과목 두 개는 이미 A+가 확정되어 있었다.
‘바로 펠릭스 교수의 시험과 사교댄스 시험이지.’
“학교에 가는 것도 오랜만이네.”
엘로이즈는 내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지 “그런가요?”라고 반응했다.
학교에 가서 마주치게 될 일리야가 부담스럽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모든 게 너무나 그리워서 얼른 등교하고 싶어졌다.
리비와 함께 마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자 지나치게 서두른 탓인지 교정이 텅텅 비어 있었다.
‘데미안이 개인 연구실에 있을 시간인데. 클라이드는 도서관에 있을 테고.’
띠링!
[성좌 ‘클서방’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 클서방 상태 이상하지 않았나?]
“아. 맞다.”
성좌의 말에 클라이드가 악마에게 육체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현실의 시간으로는 고작 3일째 된 일이지만 내게는 거의 일 년 전 일이라 깜빡한 것이다.
악마 클라이드가 됐을 때 그가 출몰하는 장소는 도서관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바뀐다.
교정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대형 분수대 쪽이나 카페 등 사람이 바글바글한 장소였다.
‘그럼 오늘은 도서관에 없겠네.’
그 사실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리비를 강의실에 데려다주고 아무도 없는 도서관으로 가서 시험공부를 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