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띠링!
[성좌 ‘로판중독영애’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당혹스러운 상황인지, 늘 고상한 투로 이성적인 코멘트만 하던 ‘로판중독영애’ 성좌마저 저 한마디만 내뱉었다.
나는 서슬 퍼런 기운을 풍기는 칼날을 슬쩍 피하며 쭈뼛쭈뼛 인사부터 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비록 일어나서 제대로 인사하지는 못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본인에게 극진한 예를 다하지 않으면 지랄병이 도지는 황제 때문에 위기 상황에도 인사부터 했으나 그는 비웃음을 흘렸다.
“짐의 침실을 침입해놓고 인사부터 하느냐? 참으로 예의 바른 반역자로구나.”
“저는 절대 반역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 외침에 유지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골이 아프니 목소리 낮춰라.”
나는 간절하게 두 손을 깍지 끼며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속닥속닥 변명했다.
“이건 사고입니다, 폐하. 저는 절대로 폐하의 침실에 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오게 된 것입니다.”
“아, 짐이 꼴도 보기 싫은데 억지로 끌려왔다?”
아오…!
그런 뜻이 아닌 줄 알면서 말꼬리를 잡으며 상대를 곤란하게 하는 유지스의 화법에 울화가 치밀었을 때였다.
“오늘 짐의 기분이 무척 좋으니 용서해주지.”
뜻밖의 행운에 얼떨떨해졌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순순히 용서하는 거지?’
아무튼 이건 다신 없을 기회였다.
“황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건 안 돼.”
“네?”
“짐이 용서한다고 하였지,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적은 없는데.”
유지스는 검을 치우더니 허리춤을 묶고 있던 로브 끈을 풀어 그것으로 내 양쪽 손목을 모아 칭칭 묶기 시작했다.
띠링!
[성좌 ‘썩은 취향’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
“갑자기 이건 왜…?”
내가 손목을 왜 묶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유지스가 빙긋 웃었다.
“어찌 되었든 영애는 황제의 침실을 허락 없이 침입한 침입자니까, 이 정도 조치는 해두겠다. 혹시 짐을 해하려 할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럼 저를 집에 보내면 되잖아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냥 묶기 쉽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고개 숙인 유지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예쁘게 리본까지 만들었을 때는 하마터면 왼쪽 리본이 삐뚤다고 참견할 뻔했다.
‘정말로 기분 좋아 보이네.’
365일 중 364일을 기분 나쁜 상태로 지내는 인간이 어쩐 일이람.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곰곰이 그의 프로필을 떠올려보다가 뭔가 가닥이 잡히려 할 때쯤 리본 묶기가 끝났다.
“예쁘구나.”
이걸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어이가 없었으나 떨떠름하게 “예에, 폐하께서 손재주가 무척 좋으시네요.”라고 대답했다.
유지스는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나비 날개를 쳐다보았다.
“스콰이어 공작가가 분주하다 했더니 실전된 비전 마법을 되찾아서 그랬던 건가?”
이게 정확히 비전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콰이어 가문에 길조가 든 건 확실했다.
그래서인지 유지스는 좋았던 기분이 전부 망쳐진 얼굴로 섬뜩하게 웃었다.
“신께서 널 지독하게도 사랑하시는 모양이구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또한 허탈함도 묻어났다.
“짐은 참 운이 없는데 말이야.”
유지스가 술을 들이켰다.
“하아. 그런데 왜 그림자에만 날개가 있지?”
“저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하려는데 유지스의 커다란 손이 등을 쓸어 만지며 날개를 확인했다. 오싹한 감각에 어깨가 떨렸다.
그의 보라색 눈은 내내 날개에 붙박여 있었다.
“나비가 널 닮았구나.”
그게 무슨 뜻이지?
“훤히 보이는데도 뭔지 모르겠어. 스콰이어 나비는 분명 사역마일 텐데.”
그 말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스콰이어 나비에 대해서 아시나요?”
“글쎄?”
유지스는 의뭉스럽게 굴며 자리에서 일어나 술병이 가득 놓인 테이블로 향했다.
나는 빈 잔에 술을 콸콸 따르는 유지스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황제 폐하께서는 모르는 게 없으시잖아요.”
“그것도 글쎄? 짐이 요즘 제일 알 수 없는 게 바로 영애라서.”
그는 시가를 빨아들이더니 연기를 내 얼굴에 훅 끼얹었다.
내가 얼른 숨을 멈추자 그 꼴이 재밌다는 듯 킥킥 웃는데 정말 한 대만 때리고 싶었다.
하는 짓을 보니 스콰이어 나비에 대해 절대로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대번에 기운 빠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침실에 머무르고 있는 걸 들키면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지금 제 차림새가 특히 오해받기 좋을 것 같아서요.”
내가 입은 민소매 원피스는 결코 황성에 입고 올 만한 생김새가 아니었다.
유지스도 같은 감상이었는지 내 얼굴과 옷차림을 슥 훑어보았다.
“짐의 앞에서 이렇게 볼품없는 꼴을 한 여인은 처음 보는구나. 확실히 이런 모습이면 너무 친밀해 보이기는 하겠지.”
“그렇죠?”
“하지만 보내기 싫은데?”
내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딱 다물자 유지스는 키득거리며 소파로 가서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기대어 앉았다.
“짐이 잠들면 가보아도 좋다.”
유지스는 불면증이 심했기에 그 말은 사실상 가지 말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자, 이리로 와서 짐이 잠들 수 있도록 자장가라도 불러보거라.”
나는 별수 없이 그가 가리킨 자리로 가서 앉아야 했다.
띠링!
[성좌 ‘물음표살인마’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그런데 황제 손이 왜 저래요?]
성좌의 후원에 그제야 유지스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유지스의 양손이 전부 엉망이었다.
분명 쓰라리고 아플 텐데 연고 하나 바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상처를 보고도 금방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여기서 그에게 손에 상처가 있다고 치료해야 하지 않느냐 말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저 노래를 엄청 못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자 내 시선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는 유지스가 물었다.
“왜 손에 상처가 있는지 물어보지 않느냐?”
“원치 않으실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유지스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맹하게 생겨서 눈치 한번 빠르구나.”
만일 물어봤다면 날 못살게 괴롭힐 건수를 잡는 거였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투였다.
그때 유지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혹시 짐이 오늘 왜 기분이 좋은지 말했었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말해주진 않았지만,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짐의 어미가 죽은 날이거든.”
이 부분은 게임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너무 어두운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오늘이 무슨 날인지 눈치챘을 뿐이었다.
띠링!
[성좌 ‘개복치 황제 유지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뭐야… 그냥 폭군 황제인 줄 알았더니 조금 신경 쓰여…]
“짐이 왜 죄인들을 화형에 처하는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이다.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유지스가 졸음기가 몰려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프거든. 정말… 정말로 아파.”
그래서 그 끔찍한 고통을 죄인에게 서슴없이 주는 것이다. 그가 아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기에.
어느덧 유지스는 눈꺼풀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건지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이 툭 떨어졌다.
나는 잔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기 전에 황급히 받아냈다.
“손이 쓰라리지도 않나.”
아니면 술에 취해 아픈 게 잘 느껴지지 않는 건가.
이대로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막상 그가 곤하게 잠든 모습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지스는 위험하다.
일리야는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으나 유지스는 자기 자신을 연민했다. 그래서 성정이 잔악했다.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당장 내 목을 베어버릴 인간이라지만.
“그래도 이 손을 어떻게 그냥 둬.”
띠링!
[성좌 ‘너희는 테레제하지 마라’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난 아직도 이 게임에 성녀가 없다는 사실이 안 믿겨ㅠ 이게 성녀가 아니면 뭐가 성녀야]
띠링!
[성좌 ‘지나가던 성좌’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자기 창작물에 빙의한 BJ 중 제일 헌신적이긴 하다]
나는 손목을 묶은 끈을 낑낑거리며 벗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지스가 잠들었을 때 손을 치료해두는 게 좋을 듯했기 때문이다.
그가 버젓이 눈을 뜨고 있을 때 손을 치료하려 들었다간 황실 의사 여럿이 심기를 거슬러 죽어 나갈지도 몰랐으니까.
달칵.
침실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자 시종장 베인이 날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치료할 것 좀 주세요.”
베인이 경악한 얼굴로 문틈을 힐끗 보더니 조곤조곤 물었다.
“폐하께서 주무십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인이 다시금 차분하게 갈무리한 표정으로 연고와 천 등을 담은 쟁반을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거의 날 은인처럼 바라보는데, 상당히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쟁반을 받아 유지스에게 돌아갔다.
그는 손을 치료하는 내내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나비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기 전, 그의 구겨진 미간을 쭉 펴주었다.
악몽이라도 꾸나 싶어서 마음이 쓰였다.
“…큰일 났네.”
되도록 얽히고 싶지 않았던 유지스가 가여워졌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