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혹시 다른 사람들도 날개에 대해 알고 있어?”
“스콰이어 직계 혈족 외에는 일리야 교수님, 저, 미란다 님, 도노반 님, 주치의만 알고 있어요.”
최측근과 날 시중 들어야 할 엘로이즈만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이게 보통 사안이 아니라는 말일 터.
“우선 씻자.”
나는 미리 준비된 목욕물에 몸을 씻고 마법으로 머리를 말린 후 간편한 실내용 원피스를 걸쳤다.
여유 부릴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기에 엘로이즈가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장신구는 죄다 거절했다.
그렇게 밖을 나가자마자 라울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 언제부터 여기에 계셨어요?”
라울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방금 왔다.”
그때 엘로이즈가 쪼르르 달려와 내게 귀띔했다.
“아가씨께서 눈뜨시기 전부터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뭐라고 속닥거리고 있는 것이냐.”
라울은 괜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지적하더니 곁에서 대기 중이던 주치의에게 손짓했다.
내 상태를 살피라는 뜻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소파로 가서 진찰받았다.
주치의는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진단 결과를 말했다.
“아주 건강하십니다. 혹시 모르니 한동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당장 활동하셔도 될 정도입니다.”
그러자 라울이 대번에 언짢아했다.
“돌팔이 같은 말 하지 말고 다시 자세히 보게. 애가 쓰러졌었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가?”
“주세페 도련님보다 더 활력이 넘치십니다만.”
주치의의 말대로 나는 멀쩡했다.
꿈에서 일리야만 의지하고 있어야 하는 갑갑한 상황을 벗어나니 없던 활력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저 멀쩡해요. 집에서 쉬니까 금방 회복된 거 같아요.”
그제야 라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크흠. 내 자네 실력을 의심한 건 아닐세.”
“알고 있습니다. 한두 번 그러시는 것도 아닌데요.”
“자네는 꼭 한마디를 더 붙여.”
전에도 느꼈지만, 주치의는 배짱이 대단했다.
주치의가 나가자 꼭 기다렸다는 듯이 리비가 응접실로 쏙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라울이 헛웃음 지었다.
“마침 부르려는데 귀신같이 왔구나.”
“헤헤.”
리비는 헤실헤실 웃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마주 웃게 되었다.
“그런데 너 학교는?”
“오늘은 빠졌어요. 태연하게 등교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어깨에 흰 나비를 가리켰다.
나는 “아. 그렇겠네.”라고 말하며 다가오는 리비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우리가 서로를 보며 실실 웃으니 라울이 “둘이서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모르겠구나.”라며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리고는 나란히 앉은 우리를 보며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리비에게 하얀 나비가 따라다닌다지? 치유하는 힘이 있고 몽마의 꿈으로 들어가 테레제를 데려왔다고.”
‘흰 나비에게 치유의 힘이 있었구나. 리비가 백마법사로 각성해서 가지게 되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치유인데.’
우연치고는 공교로웠다.
라울과 리비가 검은 나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듯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검은 나비도 이 하얀 나비처럼 보였어요. 위기 상황마다 나타나다가 몽마의 꿈속에서 갑자기 그림자에 이런 날개가 생겨났고요.”
“몽마의 꿈에서?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천계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리야는 어떻게 보고했지?’
띠링!
[성좌 ‘설명충’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일리야는 천계라고 말하지 않는 대신 낯선 세계에 떨어졌다고 설명했음. 몽마의 꿈에서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모르겠다고 했고.]
“…일리야 교수님이 어디까지 사실대로 밝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몽마의 꿈에서 저는 그분의 부하 직원으로 일했었어요.”
“…직원?”
“네. 그러다, 음, 제 상태가 안 좋아서 저를 많이 돌봐주셨거든요.”
거기까지 설명했을 뿐인데 라울이 이마를 짚었다.
“그 개자식이 무슨 짓을 했느냐?”
“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퍽이나 그렇겠구나.”
라울은 갑자기 등장한 스콰이어 나비보다 외려 일리야를 더 골치 아파하는 태도였다.
“그 미친 작자가 어제 수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 한 짓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분노로 씩씩거리는 라울을 대신해 리비가 난처하게 설명했다.
“실은 어제 누가 봐도 일리야 교수님이 언니를 좋아한다는 게 티가 나서요.”
“그랬구나…….”
나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실은 청혼을 받기는 했어요.”
이 말을 하자마자 라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벌컥!
“난 그 사람 싫어!”
그때 난데없이 문이 열리며 주세페가 뛰어 들어왔다.
아무래도 우리 대화를 밖에서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결혼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알겠어!?”
주세페의 뒤에는 로잔이 어색하게 호호 웃고 있었다.
라울이 아연하게 둘을 쳐다보았다.
“차라리 그냥 들어 오지 그랬소?”
“…민망하네요.”
결국 온 가족이 내 응접실에 옹기종기 모이게 되었다.
로잔은 머쓱함에 붉어진 얼굴에 연신 부채질하다가 곧 평정을 찾고서 입을 열었다.
“난 일리야 교수가 나쁜 상대로 느껴지지 않는단다. 조건도 그렇고 외적으로도 그만한 이를 찾기는 어렵지. 너도 동의하지 않니?”
그 점에 대해서는 라울도 반박하기 어려웠는지 불만스럽게 침묵했다.
로잔이 알만하다는 듯 설핏 웃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귀족 가문에서 연애 결혼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스콰이어 가문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 이곳에 얽힌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책임질 의무가 있으니까.”
그러니 귀족은 앞으로의 안전과 전망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결혼을 통한 동맹 관계를 결성해야 한다.
그것이 귀족의 의무였다.
라울이 로잔과 연애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건 재혼이어서였다.
“더군다나 넌 장녀이기에 짊어진 무게가 무겁단다. 날이 갈수록 가신들 사이에서 너의 입지가 커지고 있어.”
로잔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나를 부담스럽게 했다.
이기적인 생각일지언정 나는 스콰이어 가문에 도움을 줄 생각은 있어도 책임질 생각은 없었다.
여차하면 낙원으로 도망칠 생각인 내게 의무와 책임이 와닿을 리가 없었다.
한데 로잔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나를 부담스럽게 하려는 목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곁에 있던 라울의 손을 잡으며 차분히 미소 지었다.
“하지만 우리는 젊고 건강하단다. 너희가 가문을 물려받을 고민을 하려면 중년은 되어야 할 테지.”
가문은 가주의 죽음으로 승계된다.
내가 생각해도 라울과 로잔은 장수할 것 같았다. 만일 이곳에 계속 남는다면 그렇게 되게 할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해도 괜찮단다.”
나는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만일 네가 일리야 교수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서로의 격이 맞으니 빠르게 혼담을 추진하겠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보류하마.”
이미 둘이서 이야기했었던 주제인 모양인지 라울은 담담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두 사람은 리비가 선택한 사람이 어떤 이든 존중했다.
그래서인지 내 선택 또한 어떻든 지지해주려는 기색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직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요. 그냥 지금은 학교를 졸업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내 대답이 마음에 쏙 든 것인지 곁에 앉아있던 주세페가 히죽 웃었다.
“그래.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결혼은 무슨.”
라울 역시 내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기는 했어도 결혼은 탐탁지 않았는지, 공부하겠다는 결정을 매우 반겼다.
일단 혼담 이야기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남은 문제는 스콰이어 나비였다.
“이 나비는 가문의 비전 마법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라울이 고민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 역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선조들께서 남긴 기록 일부에 ‘나비를 사역했다’라는 문구가 있었으니까.”
그렇다는 말은 나비가 사역마 같은 거라는 뜻인가?
“옛 스콰이어 혈족이 흑마법사였다는 사실은 너희도 알겠지. 흑마법사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소환술이다. 아마 나비가 우리 가문과 대대로 계약을 맺은 존재일 듯하구나.”
하나 나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지녔는지는 알지 못했다.
100년 전 윌로우 가문에서 비전 마법서를 전부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앞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쳐다보며 난감하게 말했다.
“이 그림자를 숨길 수 없을 텐데, 앞으로 어떡하죠?”
라울은 밤새 생각해둔 게 있는지 바로 대답했다.
“스콰이어 가문이 나비를 되찾았다고 공표할 생각이다. 한데 테레제, 네 나비의 능력은 어디까지인 게냐?”
“이동하는 능력이 있는 건 확실해요. 몽마의 꿈에서도 제가 일리야 교수님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더니 정확한 지점으로 이동시켜줬거든요.”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했고?”
“네.”
하지만 그것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가능한데 일부러 날 안 보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신의 유희>가 아닌 과거의 오즈월드가 존재하던 차원에서 나비가 나를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켜 준 적도 있었으니까.
라울이 내 그림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나비가 원하는 장소에 대부분 이동시켜줄 수 있다는 말이지? 그 능력이 만일 황성에도 통한다면 조금 골치 아프겠구나.”
황성은 이동 마법이 막혀 있었다.
한데 나비가 그걸 뚫고서 이동 가능해지면 황제의 경계심이 훨씬 치솟을 것이다.
라울이 염려하는 게 바로 그 지점이었다.
‘특히 태양궁은 대부분의 마법을 쓸 수 없게끔 막아둔 곳인데 나비가 그걸 뚫을 수 있나?’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어?”
갑자기 바닥이 위로 올라왔다.
아니, 내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지옥에서 일리야를 찾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설마?’
당황한 라울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뒤바뀌었다.
따스한 아침 햇살로 가득했던 응접실에서 시가와 위스키 냄새로 가득한 공간으로 이동되었다.
‘이런 미친…….’
황급히 나비에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뒤덮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눈동자를 위로 들어 올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로 있어서 그런지 고개가 아프도록 뒤로 젖히고서야 상대의 얼굴이 어슴푸레 보였다.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게 앞섶이 벌어진 로브를 걸친 황제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그락.
묵직한 침묵을 깨고 그가 손에 쥔 잔에서 얼음이 녹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 유지스가 취한 듯 느슨하게 풀린 눈을 휘며 웃었다.
“웬 침입자인가 했더니, 영애였나?”
술잔을 쥐지 않은 손에 든 검을 내 목에 드리운 채였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