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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66화 (167/277)

166화

* * *

테레제가 리비의 품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언니!”

리비가 기겁하며 끌어안는데 양옆에서 각각 다른 손이 튀어나와 테레제를 붙들었다.

일리야와 데미안이었다.

“내가 안지.”

행동력이 더 빠른 쪽은 일리야였다.

그는 테레제를 품에 안아 들었다.

조그만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하는 동작들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데미안이 친절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테레제의 호위입니다. 교수님께서 안고 계시면 다들 이상하게 여길 거예요. 그건 테레제에게 곤란한 일이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온실 밖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웬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시공간 틈을 벌리고 있을 때 스콰이어 공작가와 발할라에 마법 전서구로 상황을 알리고 도와줄 인력을 보내달라 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로 닫혀버린 마기 때문에 온실 안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마기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밖에서도 그 사실을 깨닫고는 온실 안으로 진입해왔다.

가장 앞장서서 들어온 사람은 라울이었다.

“테레제!”

그는 일리야의 품에 쓰러져있는 딸을 보고 원통함에 사로잡혔다.

신도 무심하시지. 왜 이런 험한 일들이 테레제에게 쏟아지듯 몰려 일어난단 말인가?

라울은 당연히 테레제를 받아들려고 손을 뻗으며 일리야에게 말했다.

“우선 밖으로 나가지. 의사에게 딸을 보여야겠네. 그리고 함께 공작저로 가세.”

일리야는 “그러시죠.”라고 대답하더니 테레제를 넘기지 않고 온실 문으로 걸어갔다.

라울은 황당해졌다.

“딸은 내가 데려갈 테니 이리 넘기시게.”

그 순간 일리야의 표정이 섬뜩하게 돌변했다.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라울은 자신이 제대로 그의 표정을 본 게 맞는지 눈을 의심했다.

“혼절한 사람을 이리저리 옮기는 건 위험하니 이대로 가시죠.”

일리야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온실을 나가버렸다.

무시당한 당사자인 라울은 물론이고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다른 마법사들도 몹시 황당해했다.

라울은 어이가 없었으나 리비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기에 얼른 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데미안은 내내 가짜 미소도 짓지 못하는 상태로 멀어지는 일리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펠릭스는 죄인처럼 울상을 지은 채로 일리야에게 다가갔다.

“넌 괜찮은 거야?”

“그래.”

“내가 괜한 의뢰를 해서 미안해. 악마에게 홀렸던 것 같아.”

“사고였을 뿐이다.”

펠릭스는 시무룩한 얼굴로 테레제의 뺨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려 했다.

“테레제도 무사한 거 맞겠…”

찰싹!

하나 손이 닿기도 전에 매섭게 내쳐졌다.

일리야가 쳐낸 것이다.

“네가 악마에게 홀리는 건 상관없지만 테레제는 건드리지 마라.”

무심한 표정과 어조였으나 그 안에 깔린 살기가 오금을 저리게 했다.

“어, 으응. 미안.”

펠릭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의아해졌다.

일리야가 테레제에게 조금 다른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깊었었나?

테레제를 마차에 조심스레 눕혀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동작은 친밀한 사제지간에도 충분히 할 수는 있지만, 저 눈빛은 뭐란 말인가?

애정으로 녹녹해진 눈빛은 절대 제자에게 보낼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물러날 줄 모르고 꾸역꾸역 의사가 눈치 보게 할 정도로 곁에 머물러 있는 태도 역시, 정인을 대하는 모양새였다.

보는 이의 얼굴이 절로 붉어질 정도로 은밀한 분위기가 흘러서인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일리야에게 딴마음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정도였다.

“크흐흠.”

라울은 몹시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헛기침으로 마음을 표현했으나 일리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교수.”

해서 목소리를 내 그를 부르니, 테레제를 떠나자마자 차갑게 식어버린 눈빛이 라울에게 닿았다.

“좀 비켜주게나. 외부인이 혼절한 미혼의 영애 곁을 지키는 건 바르지 못한 일이니.”

일리야가 미간을 좁혔다.

“저와 테레제는 함께 잠의 감옥에 갇혔다 나왔습니다. 상태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도 저일 텐데, 정말로 나가도 되겠습니까?”

라울은 기가 막혔다.

나오라고 했더니 저 정신 나간 교수가 되레 자신을 협박하고 있었다.

하나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과거의 삐딱했던 성질이 확 치솟으려던 걸 억지로 억눌렀다.

‘테레제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사실 의문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누구든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티를 냈으니.

그래서 더 이상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부친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써도 모자랄 판에 외려 적대라니?

라울의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일이었으나 일리야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라울은 테레제의 진짜 혈육이 아니었으니까.

일리야의 눈에 비친 라울은 테레제에게 있어 엄연히 타인이었고 남자였다.

심지어 테레제가 지나치게 마음을 쓰는 인물이기도 했고.

그의 기준으로 라울은 경계할 대상에 속했다.

아니면 치워버리고 싶은 인물 중 하나든가.

그때 의사가 말했다.

“지나치게 기운이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이상은 없으십니다.”

라울은 깊이 안도했다.

그는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뻑뻑해진 눈을 문지르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테레제와 리비를 데리고 공작저로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악마가 나타났다. 그것도 본체로 현신할 수 있는 고위 악마가.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여 내일 당장 황제에게 보고하러 가야 하기에 온실을 더 조사했다.

그때 리비가 다가왔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조금 있다가…”

“나비가 보여요.”

“…나비라니?”

“하얀 나비예요. 여기.”

리비는 여전히 제 눈에만 보이는 어깨에 앉은 흰 나비를 가리켰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기를 보세요.”

이번에 가리킨 곳은 마차였다.

라울은 테레제가 누운 마차를 보았다.

뭐가 있기에 저곳을 가리킨 걸까? 막 마차에서 내리는 중인 의사와 일리야를 제외하면 쓰러져 있는 테레제만 있는데……?

“저게 뭐지?”

“아버지도 저건 보이시는군요.”

마차 안은 마법으로 불을 켜두어 매우 밝았다. 그래서인지 테레제의 그림자가 바닥까지 번져 있었는데 그 형태가 좀 이상했다.

뭔가가 달라붙은 것처럼 보였다.

“나비 날개예요. 아직까진 다들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요.”

그럴만했다.

지금은 밤이라 어두웠고 곳곳을 마법으로 밝히고 있기는 했으나 사람이 많아서 그림자가 어지럽게 엉켜있었다.

게다가 누구도 그림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리비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흰 나비가 언니를 현실로 데려왔어요. 벌어진 차원 틈으로 들어가더니 같이 나왔거든요.”

“……리비. 일단은 함묵하자꾸나.”

리비도 이 현상이 단순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로 들어가서 쉬고 있거라. 정신이 없어 널 못 챙겼구나. 진찰은 받았니?”

“네. 체력이 좀 떨어졌을 뿐이지 멀쩡하대요.”

“그래, 그래. 다행이구나…….”

그때 마법사들이 다가와 라울에게 보고했다.

“악마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온실 내에 오염된 마법 식물을 정화하기만 하면 될 듯합니다.”

“당장 정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을 모아라.”

하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테레제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리야가 온실로 다가가 손을 뻗으니 갑자기 시간이 되돌아가듯 수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서진 유리가 달라붙고 온실 내에 흐트러진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염된 식물들도 멀쩡해졌다.

일리야는 비록 정화는 할 수 없지만 몇 시간쯤 전으로 사물을 돌이키는 정도는 가능했다.

경이로움을 넘어서 오싹할 정도로 엄청난 광경에 다들 신음했다.

“맙소사…….”

“시간을 되돌리고 있어? 이게 가능하다고?”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지만…….”

원래도 번스타인 가문의 차남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불세출의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저것은 천재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능력치란 말인가?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 일리야는 주변의 시선이 의식되지도 않는지 근처에 있던 펠릭스에게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온실도 멀쩡하니 테레제와 했던 약속은 지키겠지.”

“으응?”

펠릭스는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가 뒤늦게 의뢰 보상을 떠올렸다.

이 엄청난 마법을 쓴 이유가 고작 테레제 몫의 마법 식물을 챙겨 주기 위함이라고?

“어어, 무, 물론이지.”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일리야가 미련 없이 테레제에게 돌아갔다.

펠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쳤군. 미쳤어.”

사랑하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저렇게 돌아버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일리야는 이번엔 라울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수습은 제가 전부 맡아서 할 겁니다. 테레제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마십시오.”

라울은 “자네 정말 미친 건가?”라고 혀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그러지. 고맙네.”

겉만 멀쩡한 무뢰배 같으니.

라울은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심경으로 테레제가 누운 마차에 올라타는 일리야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조만간 번스타인 공작가와 혼담이 오갈 듯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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