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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64화 (165/277)

164화

* * *

일리야가 날 데리고 온 곳은 죽은 나무로 빼곡하게 덮인 숲속이었다.

휘이이잉!

부는 바람이 귀곡성처럼 들렸다.

오싹함에 일리야를 꽉 끌어안자 그가 내 뺨에 키스했다.

그 몸짓이 꼭 겁에 질린 암컷을 안심시키려는 것만 같았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일리야는 내가 테레제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이지가 없는 상태라는 걸 조금만 지켜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단지 매칭률로 인해 내게서 본능적인 호의를 느끼고 자신의 반려로 삼기 위해 데려온 거였다.

그는 동굴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그 안에 날 집어넣고 결계를 쳤다.

나는 허리를 감으며 품을 파고든 일리야를 황급히 막았다.

“자, 잠깐만요!”

일리야는 내가 저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나운 기세를 흘렸다.

당장 물어뜯길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약을 먹여야 하는데.’

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일리야가 입술을 콱 깨물었다. 순간 눈물이 찔끔 났다.

“아파요!”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피 맛이 느껴졌다.

내가 저 살리려고 지옥까지 따라왔는데 이게 무슨 짓인지.

하루가 너무 고되고 엿 같아서 죽고 싶은 심정인데 일리야마저 포악하게 굴어 서러워졌다.

클라이드와 델리오스의 죽음이 다시금 떠올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일리야가 뺨을 핥았다.

“하지 마요…….”

울먹이며 거부하는데도 일리야는 본인 하고픈 대로 내 냄새를 맡고 이로 잘근잘근 아프게 씹었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꼭 한 대만 제대로 쥐어박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했다가는 죽는 건 나일 것이기에 훌쩍거리면서도 얌전히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내가 순순히 마주 안으며 달래듯 등을 쓸자 변화가 일어났다.

일리야가 더는 날 아프게 깨물지 않았다.

대신 온 얼굴에 입술 도장을 찍으며 애정을 쏟아냈다.

그 틈을 타 약을 꺼내 입에 머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리야가 자잘한 입맞춤을 하다가 입술을 포갰다.

나는 적극적으로 응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에게 환약을 떠밀었다.

일리야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떨어뜨린 순간 그의 입을 틀어막고 타이르듯 종용했다.

“삼키세요.”

목울대가 부드럽게 움직인다.

강제로 뭘 삼킨 게 마뜩잖은 듯했지만, 그래도 입술을 맞대었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한 게 만족스러웠는지 품에 안겨 긴 숨을 내뱉었다.

나는 그를 안고서 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얼른 그의 이성이 돌아왔으면 했지만 지금 상태로 잠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클라이드는 잊고 있을 테니까.

* * *

일리야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누운 자리 왼쪽에서 들이치는 빛이 평생 보아온 맑고 투명한 햇살의 질감과 달랐다.

탁하고 어둡다. 내부를 은은하게 밝힌 씨알 같은 마법 불씨가 아니었다면 동굴 안이 상당히 깜깜했을 것 같았다.

우울하고 끈적한 공기도 텁텁하여 불쾌감을 자아내는 구석이 있었다.

하나 일리야는 그런 점들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처럼 무감정하게 기억을 돌이키고 있었다.

그가 일어나며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공허감이었다.

영혼의 절반이 으스러져 버린 것만 같았다.

왜 이런 기이한 마음이 드는 것일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떠오르는 [아블로]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자신은 악마가 되었다. 형제의 죽음으로 대천사들을 학살한 대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클라이드의 죽음에 슬프거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천계에 대한 복수심 또한 들지 않았다.

부자연스럽게 그러한 감정들이 거세된 상태였다.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약병 하나가 보였다.

열어보니 환약이 조금 남아 있었는데, 하나를 입 안에 넣고 어금니로 씹었다.

클라이드의 마력이 느껴졌다.

분노를 없애고 슬픔을 죽여 그의 죽음에 날뛰지 못하게 강제로 이성적인 상태로 만드는 약이었다.

다만 미처 공허감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허무와 상실감은 분노와 슬픔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다만 이마저도 흐릿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얼굴을 쓸어올리며 상체를 일으켰을 때였다.

“일어났어요?”

혼탁한 빛을 등지고서 테레제가 휑한 동굴로 들어왔다.

일리야는 잠시간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새로운 기억의 조각이 맞춰졌다.

그러고 보니 테레제를 자신의 꿈에다 숨겼고, 그녀를 찾으려 했었다.

그러다가…….

언뜻 붉은색의 이미지가 떠오르려는 찰나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리야가 야트막하게 끓는 목소리로 고통을 호소하자 다정한 손길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향기로웠다.

어지러울 정도로 좋은 냄새가 풍겨서 어느새 걱정하는 여자를 끌어안고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어떡하지……. 여기서는 마법 식물이 없어서 두통에 좋은 약초를 구할 수도 없는데.”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

엉터리 마법 주문을 외듯 테레제가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취할 것 같았다.

클라이드의 죽음이 미치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대부분 삭제된 상태여서일까?

그는 지금 애정에 목이 말랐다.

자신을 토닥이는 손을 낚아채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다가 성에 차질 않아서 아예 품에 가두어 안고 욕심껏 뺨을 물었다.

“아야! 깨물지 좀 말라니까요.”

귀여운 투정에 웃음을 흘리자 테레제가 한숨을 폭 내쉰다.

나를 따라 지옥까지 온 이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제발 가만히… 좀, 아니… 그만!”

테레제는 제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입맞춤에 번번이 막히자 급기야 성질을 냈다.

화를 내는 모습이 속에 불을 지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이제 약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건가…?”

여자는 품에서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체온이 높았다.

눈을 흐릿하게 뜨다가 뭔가를 보려 할 때는 시야를 지나치게 가까이하기도 했다.

테레제의 상태가 이상했다.

자신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도 모르고 테레제는 본인 팔을 주물렀다.

“악마가 저한테 접근할 때 유독 이성을 잃는 버릇 좀 고쳐봐요. 또 결계를 깨뜨려서 보수하느라 애먹었단 말이에요.”

상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왜 이성을 잃었는지는 충분히 유추되었다.

“가뜩이나 이제 슬슬 눈도 잘 보이지 않는데.”

“…….”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일리야는 테레제의 눈가를 매만지며 아름다운 은회색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시선이 제게 닿는 순간 참지 못하고 입을 맞춰버리기는 했지만, 무슨 문제인지 파악하려 마력으로 들여다보았음에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내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면 틀림없이 각인을 시도했을 것 같은데.’

테레제의 목덜미를 쓸어 만지자 그녀가 등허리를 바르르 떨며 기겁했다.

“또 목덜미를 깨물려고 하면 이번엔 진짜 꽁꽁 숨어버릴 거예요! 만지지도 못하게 할 거고요!”

“그런 식으로 날 길들였군.”

“흐악!”

테레제가 기겁하며 제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자 약으로도 억제되지 않는 강한 불쾌감이 들었다.

일리야는 테레제가 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어, 언제부터 정신이 드셨어요?”

“글쎄.”

성의 없이 대답하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를 맡고 있으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테레제는 긴장한 상태였다.

“일리야 님.”

“말해.”

“…혹시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이 질문은 아마 자신을 하급 천사로 기억하는지, 스콰이어 공녀로 기억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던진 것이리라.

“테레제 스콰이어. 혹은 다른 무언가.”

“……교수님.”

지칭하는 호칭이 바뀌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테레제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낭패한 표정을 하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교수라는 호칭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내키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로 제 이름이 불리는 게 좋았다.

“일리야라고 해.”

“어떻게 그래요…….”

“날 만들었잖아.”

“…….”

뻣뻣하게 굳은 얼굴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뺨을 지분거리니 테레제가 미간을 좁혔다.

심경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게 왜 날 살렸을까.

“클라이드 대신 날 죽였어야지.”

육신이 깃든 상태의 나를 제단에 세웠더라면 현실에서도 죽게 되었을 텐데.

테레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매서운 눈빛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면 현실의 교수님이 죽게 된다고요.”

자신을 죽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테레제가 가슴팍을 퍽퍽 때리며 화를 낼 때까지 입 맞췄다.

“대체!”

테레제는 씨근거리다가 금세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가엾은 새끼강아지 같았다.

그는 또다시 입술을 붙이고 싶은 걸 고역스럽게 참았다.

솔직히 왜 참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교수님.”

“일리야.”

테레제는 잠깐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다가 한숨지으며 정정했다.

“네, 일리야 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응.”

“…여전히 복수할 생각이세요?”

묻는 표정이 씁쓸하고 초조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복수심을 이해하기에 섣불리 말로는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나 일리야는 단지 불한당처럼 그 입술을 훔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왜 이렇게 사랑스럽지?

그는 스스로 돌아버렸다고 냉정하게 평가하면서도 이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정신 나간 결론을 내렸다.

제정신이 되려면 테레제가 그만 사랑스러워야 하는데 영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네가 원하면 관두지.”

테레제가 놀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다.

커다래진 눈이 토끼 같아서 이번에는 도저히 키스하지 않을 수 없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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