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나중에 언니랑도 여기서 같이 점심을 먹으면 더 좋겠어.’
테레제를 떠올리니 저절로 클라이드가 생각났다.
“참. 오늘 클라이드 선배님이 달라 보이시던데 무슨 일 있었나요?”
그러자 자카리가 잠깐 멈칫했다.
“기숙사에 들르지 않으셔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요? 오늘따라 화려하게 꾸미셨길래 뭔가 일이 있는 줄 알았어요.”
거기까지 말한 순간, 갑자기 자카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일이 있어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아쉽지만 자카리의 표정이 워낙 굳어있는 탓에 붙잡을 수가 없었다.
“네! 얼른 가보세요.”
자카리가 떠나고, 리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리비는 혼자서 교정을 배회했다.
멀리서 클예부 회원들이 떠들썩하게 술 게임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광경을 보면 지금이 시험 기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재밌겠다.”
클예부 회원들은 친화력이 좋아서 리비를 격렬히 반겨줄 테지만 어쩐지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리비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언니를 한 번도 못 본 거 같아.”
오늘 테레제는 왠지 클라이드와 같이 점심을 먹지 않았을 것 같았다. 클라이드의 상태가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니를 찾아갔다.
“선배? 여기에 안 왔어.”
이번에는 도서관으로 가보았다.
“여기도 없네.”
식당, 기숙사, 클럽 룸, 학생회실 등 어디에도 테레제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펠릭스 교수에게서 언니 소식을 듣게 되었다.
“테레제는 일리야 교수랑 같이 임무를 나갔어. 온실에 고스트 마수가 나타나서 말이야.”
‘그래서 언니가 보이지 않았구나.’
펠릭스 교수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네?”
그 순간.
콰과과과광!!!
창밖의 하늘에 벼락이 내리치며 귀청이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흐아악! 처, 천둥소리가 왜 이렇게 커?”
“와, 깜짝 놀랐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으며 밖을 쳐다보았다.
놀란 건 리비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쿵쿵 뛰며 맥박이 빨라지더니 숨도 가빠졌다.
원인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교수님, 온실 위치가 어딘가요?”
* * *
리비는 남은 수업을 전부 때려치우고 펠릭스 교수의 온실로 갔다.
혼자는 아니었다.
상황을 이상하게 여긴 펠릭스 교수와 데미안이 합류한 것이다.
리비는 더는 앞으로 가지 않으려는 말에서 내리며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이게 대체…….”
펠릭스 교수의 온실은 불길한 검보라색 마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설마 지옥의 문이 열린 건가요?”
리비의 질문에 펠릭스 교수가 고개 저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얌전하지 않겠지. 하지만 지금 보니 알겠어……. 내가 악마에게 홀렸던 것 같다.”
악마에게 홀렸다. 그 말인즉 이곳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거였다.
악마가 문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데미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고위 악마가 본체로 나타난 거군요.”
엄청난 힘의 제약을 받더라도 본체를 현신할 수 있을 정도의 악마라니.
“안 돼…….”
절대로 잃어선 안 될 존재가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물론 가족이고 사랑하는 언니의 일이라지만 리비가 느끼는 감정은 그 이상이었다.
그 감정은 신을 숭배하는 성직자와 닮아있었다.
리비는 이성을 잃고 온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직!
“읏-!”
그러나 손끝에 마기가 닿자마자 화상을 입었다.
마기가 외부인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리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어가던 순간.
팔랑-
웬 하얀 나비가 시선을 끌었다.
아름다운 나비였다. 아니, 이상한 나비였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나비는 은은한 유백색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날개는 대칭으로 물방울 모양 같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었는데, 어딘가에서 본 듯한 구석이 있었다.
아. 이 비슷한 걸 안다.
‘클예부 브로치에서 사파이어 부분을 모조리 빼면 이런 모양인 거 같은데.’
리비는 심각한 와중에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비가 화상을 입은 손끝에 앉았다.
“어…….”
그러자 화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데미안이 멍한 눈을 한 리비에게 퍽 걱정스럽다는 듯 안위를 확인했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리비는 이 선배가 꺼림칙했다.
분명 모두가 좋아하는 다정하고 친절한 성격인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외려 대놓고 까칠한 클라이드가 더 편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치긴 했는데 이제 괜찮아졌어요.”
“괜찮아졌다니?”
“이 나비가 앉으니까 나았어요.”
리비는 여전히 제 손가락에 앉아있는 흰 나비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비라고?”
하나 데미안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의 눈에는 나비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왜들 그러니?”
어느새 주변을 탐사하고 온 펠릭스 교수가 가까이 다가왔다.
리비는 관심을 끌려고 거짓말하는 아이가 된 듯한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얼른 그에게도 나비를 보여주었다.
“교수님, 여기 나비가 보이세요?”
“응? 무슨 나비? 마기 때문에 살아있는 건 근처로 다가오지 않을 텐데.”
그럼 이건 뭐지?
나비는 리비의 당혹스러움에 반응하듯 접고 있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러더니 마기가 부옇게 서린 곳으로 날아갔다.
타다다닥!
나비가 팔랑팔랑 지나가니 마기가 하얗게 타들어 가며 둥그렇게 길이 났다. 까무러칠 광경이었다.
“…뭘 한 거니?”
펠릭스 교수는 당혹스럽게 안경을 고쳐 쓰며 리비를 향해 물었다.
정황상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비란 것이 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리비는 대답이 궁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데미안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리비를 보다가 통로를 가리켰다.
“우선, 들어가 볼까요?”
통로는 세 사람이 이동해도 공간이 넉넉할 정도로 컸다.
덕분에 그들은 나비가 내주는 길을 따라 순조롭게 온실 안으로 들어왔다.
펠릭스 교수는 내부가 엉망진창이 된 걸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두 사람이 마계로 끌려간 건가?”
리비는 나비가 빙글빙글 도는 자리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꿀렁!
그러자 눈으로 볼 때는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손길에 반응해 요동쳤다.
펠릭스 교수는 현상들을 관찰하더니 입을 열었다.
“본체를 삼킨 잠의 감옥이다. 나타난 게 몽마인 듯한데.”
“언니랑 일리야 교수님이 지금 몽마의 꿈속에 갇혔단 뜻인가요?”
펠릭스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도록 벗어나지 못했다면 내부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리비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으니 나비가 날아와 손등에 앉았다.
나비는 일렁거리는 허공을 찢으라고 의지를 보내왔다.
리비는 꿈이라는 가상 차원을 유지하느라 말랑해진 시공간 틈에 나비가 앉은 손을 쑥 집어넣었다.
치이이이이익-!
그러자 손이 검게 썩어들어갔다.
펠릭스 교수가 고함치며 얼른 리비의 손을 빼려 했다.
“함부로 차원의 틈에 간섭하다간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렇게 놔두면 언니가 죽어요!”
리비는 필사적으로 어설프게 다물려 있는 시공간을 헤집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을 삼키고 있는 꿈의 아가리를 벌려야만 했다.
그때 데미안이 손을 보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펠릭스 교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세 사람이 같이 달려들자 허공이 쪼개지기 시작하더니 조그마한 틈이 벌어졌다.
그때 손등에 앉은 흰 나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틈으로 쏙 들어갔다.
리비는 본능적으로 골이 띵 울리도록 소리 질렀다.
“언니!”
이 목소리가 꿈을 헤매는 테레제에게 닿길 바라며.
* * *
지옥으로 떨어지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나는 새카맣게 잡아먹혔던 시야가 돌아옴을 느끼며 갑자기 발에 닿은 지면을 비틀거리며 밟았다.
추락이 끝나고 시야가 훤해지자 보이는 것은 보랏빛 하늘이었다.
땅은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고 그 위로 자라난 나무는 기괴하게 뒤틀려있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마계의 모습이었다.
띠링!
[성좌 ‘성적충’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경)올 타임 레전드 BJ악역영애 20위 안 진입(축]
눈앞에 최단기간 1억 코인 달성 사실과 채널 등급이 올랐다는 알림창이 떠 있었다.
나는 말라버린 우물 같은 눈으로 시스템 창을 쳐다보았다.
지금 내 꼴은 엉망진창이었다.
코피는 멎었고 시스템 압박도 사라졌지만, 피로감이 걷힌 건 아니었다.
게임 페널티는 여전히 적용되는 중이기도 했고.
“일리야 님.”
맥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일리야를 찾아다닐 힘이 없어서 그가 알아서 내 앞에 나타났으면 했다.
하지만 이성을 잃고 폭주 중인 일리야가 무슨 수로 그럴 수 있을까?
결국 찾는 건 내 몫이었다.
나는 말라붙어서 찝찝한 피를 마법으로 씻어내고 주머니에 약병이 무사히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비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이 나비라면 지금껏 그래왔듯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날 일리야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
그러자 그림자에 자성이 생긴 듯 몸이 아래로 휙 끌려 내려갔다.
지면에 그대로 몸이 처박힐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으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자에 풍덩 빠졌다가 뒤바뀐 장소에서 오뚝이 인형처럼 다시 일어선 것이다.
꼭 세상이 나를 축으로 한 바퀴 회전한 것 같았다.
“혹시 꿈을 나가는 것도 가능한가?”
이에 대해 날개는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풍경은 방금과 별반 다르지 않아 어디서부터 뒤져봐야 할지 막막했다.
하나 그런 수고는 할 필요 없다는 듯이 타이밍 좋게도 일리야가 악마 하나를 붙들고 하늘에서 땅으로 쾅 내리찍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흙먼지가 되어 소멸하고 있는 악마의 흔적이 가득했다.
전부 일리야가 죽인 거였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모습이 무서웠다.
“일리야 님…….”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을 때, 일리야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전신이 본능적인 공포로 오므라들었다.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일리야를 피해 뒷걸음질 치게 되었다.
이 와중에도 악마들은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 건지 이곳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다 웬 악마에게 허리를 붙들렸다.
“하아. 네게서 달콤한 냄새가 나.”
“꺼져!”
나는 마법으로 악마를 공격했으나 소용없었다.
악마가 목덜미에 뿜어내는 숨이 소름 끼치도록 역겨웠다.
“널 뼈까지 다 씹어먹어 줄-”
콰득!
악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코앞까지 순간 이동한 일리야가 악마의 머리통을 붙잡고 소멸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비틀거리는 날 붙들었다.
“…….”
위압감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을 때였다.
일리야가 날 번쩍 안아 들더니 쫓아오는 악마들을 제치고 휙 날아올랐다.
“…?!”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