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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62화 (163/277)
  • 162화

    시전자의 죽음으로 인해 내게 걸려있던 침묵 마법이 해제되었다.

    하나 나는 흐느껴 우는 소리 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페널티로 인해 체력이 부족한 몸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건지 열이 오르고 전신이 욱신거렸다.

    꺽꺽거리며 숨을 헐떡이면서도 비틀비틀 일리야에게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을 향해 달리는 것처럼 허우적허우적 걸었다.

    그때,

    푹!

    등 뒤로 무언가가 칼에 찔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억눌린 신음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휘청이는 팽이처럼 뒤를 돌았다.

    “…델리오스!”

    델리오스가 나를 죽이려던 사무엘의 검에 대신 찔린 것이다.

    사무엘은 무자비하게 검을 뽑아 다시금 휘둘렀다.

    그러나 내 마법이 더 빨랐다.

    “꿇어라, 사무엘!”

    나의 명령을 들은 사무엘이 바닥에 무릎을 처박았다.

    아무리 사무엘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도 하급 천사가 대천사를 손쉽게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무엘은 옴짝달싹 못 하면서도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마구 터뜨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구나! 진짜 신께서 직접 천계를 찾아오셨어!!”

    나는 그를 무시하고 쓰러지는 델리오스를 받쳐 안으며 천천히 눕혀주었다.

    델리오스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힘겹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와, 보길… 쿨럭!”

    “말하지 마요!”

    나는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 검상을 지혈했다.

    소용없는 짓임을 안다. 알지만, 미련한 짓을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무력하게 미쳐버릴 것 같았다.

    델리오스는 빠르게 죽어갔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살 수 있을 거라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때 델리오스가 내게 부탁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쿨럭! 일리야 님을 살려주십시오…….”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일리야를 쳐다보자마자 신음했다.

    이성을 잃은 일리야는 하얀 제복을 피로 붉게 적신 채 일방적으로 대천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불길한 붉은빛이었고 성스러운 흰 날개가 새까맣게 물들어갔다.

    델리오스는 숨을 껄떡거리면서도 가장 존경하는 천사의 타락에 오열하며 빌었다.

    “저분은… 저리되어서는 안 될 분입니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 위대한, 분이십니다.”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이드의 희생으로 천계수가 죽었음에도 강력한 차원 에너지를 회복한 천계는 타락한 천사를 용서하지 않았다.

    일리야의 발밑에 지옥으로 연결된 검은 구덩이가 거대하게 움푹 파였다.

    촤르르르륵!

    그리고 그곳에서 검은 사슬들이 치솟아 일리야의 육신을 휘감았다.

    틀림없이 엄청난 힘으로 끌어내려 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리야는 온갖 악을 쓰며 천사를 하나라도 더 죽였다.

    대천사 중 일부는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쳤다.

    나는 무력한 상태로 지옥에 끌려가는 일리야를, 눈앞에서 죽어가는 델리오스를 쳐다보았다.

    나의 무능함이 너무나 끔찍했다.

    “당신이라면 일리야 님을 되돌려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내게 그런 힘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발… 제발….”

    델리오스는 내게 애원하다가 이내 눈을 감았다.

    “아…….”

    머리가 끔찍하게 아팠다.

    눈앞이 점멸하는 신호처럼 새까맣게 물들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손톱을 세워 가슴을 마구 할퀴며 짐승 같은 울음을 토했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그게 더 나을 것 같아.

    내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검에 닿았다.

    사무엘이 나를 죽이려 했던 검이었다.

    나는 그 검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다 끝내버리고 싶어.’

    홀린 듯 검으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갑자기 빠르게 맥동하며 전신이 울렸다.

    살갗에 미세한 먼지가 스치는 것마저 느껴질 정도로 오감이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혈관 속 피가 빠르게 흐르는 것이.

    마력이 육신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어느새 결박을 풀어낸 사무엘이 다가와 주저앉은 내 팔을 비틀 듯 움켜쥐어 강제로 일어서게 했다.

    그 순간 내 안의 마력이 요동쳤다.

    “…아아!”

    사무엘은 내 마력을 흠뻑 빨아들이며 점점 젊어져 갔다.

    주름진 얼굴이 팽팽하게 펴지며 혈색이 맑아졌다.

    탁한 캐러멜 블론드 머리칼에 윤기가 흘렀다.

    제아무리 위대한 존재라도 피해 갈 수 없는 노화를 거스른 것이다.

    사무엘은 전율했다.

    “이런 힘이라니……!”

    그는 확신 가득한 얼굴로 날 질질 끌어 제단으로 향했다.

    “죽음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힘이라면 이 하찮은 것들도 전부 살려주실 수 있습니다.”

    퍽!

    나는 제단에 내팽개쳐졌다.

    얼굴 위를 어지럽게 뒤덮은 머리칼 사이로 사무엘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안녕히.”

    가수면 상태일 때처럼 정신이 아득한 상태에서, 입술이 제멋대로 벌어졌다.

    곧이어 탁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죽었어야지.”

    사무엘의 매끈한 미소에 약간의 균열이 일어났다.

    “너는 죽어도 괜찮았는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제단을 붙들고서 주저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휘청- 휘청-

    어지러움에 걸음이 불안정했다.

    술에 취한 것처럼 주변이 일렁거렸다.

    머리가 뜨겁다. 눈이 지져질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온갖 상태 이상 저주에 걸린 것처럼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는데도 나는 용케 사무엘의 앞까지 걸어갔다.

    “지겨워.”

    무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도, 이 빙의도 전부 지겨웠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성가신 알림음도 지긋지긋했다.

    “제발 날 내버려 둬…….”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숨어야 하지?’

    나는 손을 뻗어 사무엘의 얼굴을 덮었다.

    “돌려줘.”

    상태가 나빠진 건, 사무엘이 내 마력을 훔쳐 갔기 때문이다. 기력이 없었다.

    마력이 필요했다.

    아주아주 많이.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사무엘의 눈이 찢어질 듯 벌어져 있었다.

    “…아아아아악!”

    사무엘은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물망초처럼 비쩍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하얗게 세었다.

    팽팽하게 펴졌던 맑은 피부가 급속도로 거무튀튀해져 검버섯이 피고 쩍쩍 갈라졌다.

    아름답고 고상하게 늙어가던 대천사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추하고 섬뜩한 외형이었다.

    “그만! 그마아아아안-!”

    사무엘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내게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새 성대까지 늙어 쇳소리만 내며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문득 이 모든 게 꿈에서 깨어나면 사라질 일이라는 게 아쉬웠다.

    “너는 잊지 마.”

    그래서 설정을 바꾸었다.

    거대한 흐름이 내 의지대로 바뀌는 게 느껴졌다.

    “이 고통을, 이 순간을 계속해서 기억해. 영원히 꿈꾸도록 해.”

    사무엘이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으윽.”

    나는 갑자기 흐르는 코피를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전신을 압박하는 고통이 계속해서 거세졌다.

    시스템이 제멋대로 구는 날 통제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것만 같았다.

    얌전히 굴라고. 규칙에 순응하라고.

    정신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띠링!

    [성좌 ‘질서선’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뒤를 봐]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그 말에 뒤를 확인했다.

    “……일리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리야가 의식을 잃은 채 구덩이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다리가 저절로 움직여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클라이드의 말과 감정들이 나를 일깨웠다.

    ‘일리야를 살려야 해.’

    그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수 없어.

    개죽음으로 만들 수 없다고!

    일리야를 삼킨 구덩이가 아가리를 다물기 시작했다.

    “멈춰!”

    뒤에서 쏟아지는 빛에 앞으로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가 커다란 날개를 펼쳤다.

    그것은 나비의 날개였다.

    하나 실제 내 등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전부 이 상황을 숨죽여 쳐다보았다.

    곧이어 그림자가 구덩이를 다시 쩍 벌렸다.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지옥으로 뛰어내렸다.

    아찔한 추락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언니!”

    ……리비?

    미처 대답하기도 전, 어둠에 삼켜졌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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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스콰이어 나비

    리비는 피크닉 가방에서 꺼낸 샌드위치와 주스를 체크 무늬 매트 위에 예쁘게 차렸다.

    요즘 학교에서는 이렇게 빈 잔디밭을 찾아 술을… 아니, 점심을 먹는 게 유행이었다.

    ‘우리 언니가 유행시켰지.’

    리비는 뿌듯한 마음으로 샌드위치 포장을 벗겨서 자카리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자카리는 샌드위치를 받아 내용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앗, 토마토만 빼고 드시네? 귀여워!’

    자카리는 기본적으로 적게 먹었다.

    그뿐일까? 말수도 적었고 감정 표현은 더더욱 적었다.

    기본적으로 감정이 풍부한 편인 리비에게 이런 타입은 미지의 생명체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자카리가 물었다.

    “안 드십니까?”

    “…아! 머, 먹고 있어요!”

    리비는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자 화들짝 놀라며 샌드위치를 열심히 먹는 척했다.

    자카리는 샌드위치를 두 입 정도 먹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선 끝에 테레제 석상이 있었다.

    “장소는 왜 여기입니까?”

    왜 이딴 곳에서 밥을 먹어야 하냐는 질문이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예요.”

    “……그렇군요.”

    리비는 무척 행복한 상태라 자카리가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본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옆에는 근사한 남자가 함께하고 있었고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날이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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