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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59화 (160/277)
  • 159화

    자카리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사교성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자카리에게 클라이드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 오랜만이군. 한데 네가 왜 원로원에 있지?”

    “네가 여기에 있다길래 왔지. 내가 안 찾아오면 바쁘신 군사경찰대장님 얼굴을 볼 수가 없잖아. 한가한 내가 움직일 수밖에.”

    클라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자카리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둘은 원로원의 출입구로 함께 걸어갔다.

    “얼굴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바빠서가 아니라 네가 섬에 없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언제 섬으로 온 거지? 네 출입 기록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그야 관문으로 안 들어왔으니까 그렇지.”

    당당하게 규율을 어겼다는 말에 자카리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지적했다.

    “규칙을 어기지 마라.”

    “왜? 체포하시려고?”

    “나중에 그러도록 하지.”

    “어쭈. 농담이 늘었다?”

    클라이드가 장난스레 설핏 웃었다.

    그러나 자카리는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를 이어가는 것보다 클라이드의 향후 일정에 더 관심을 보였다.

    “한동안 이곳에 머무를 예정인가?”

    “어.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래야 할 것 같다? 자카리는 그 말이 이상하게 귀에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는데 클라이드가 말을 돌렸다.

    “일리야가 통치하니까 숨 막히지 않아? 어디 반역을 일으켜줄 천사 없나.”

    “체포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군.”

    클라이드는 피식 웃으며 또 맥락 없는 말을 내뱉었다.

    “예전이 좋았어. 책임과 의무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그 시절이 그립지 않아?”

    “글쎄.”

    클라이드가 보통의 천사들과 기질이 다르기는 해도 이렇게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자카리는 입구를 나온 순간 걸음을 멈췄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한데 날 왜 찾아온 거지?”

    “그냥 얼굴 보러 왔다니까. 한동안 섬에 올 일이 없어서 오래 못 봤잖아.”

    “혹시 무슨 일 있나?”

    “무슨 일은. 그런 거 없어.”

    클라이드는 얼굴을 봤으니 됐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심심하면 중앙도시에 있는 호텔로 와. 거기에 묵고 있으니까.”

    자카리는 원로원을 떠나가는 클라이드를 빤히 지켜보다가 걸어온 방향으로 도로 몸을 돌렸다.

    클라이드가 원로원의 어디를 들렀는지 조사할 생각이었다.

    * * *

    며칠이 훌쩍 지나갔다.

    일리야는 종일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나를 품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아예 내가 사지를 쓰지 못하도록 안아 들어서 자리를 옮겨주고 음식을 먹여주며 극진하게 보살폈다.

    그는 섬을 나가지 않았다.

    또한 아예 섬 전체에 결계를 쳐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 역시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니 사실상 감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라.’

    언제 또 일리야의 눈동자가 붉어질지 모르니 이렇게 그와 함께 있는 게 마음 편했다.

    일리야가 자리를 비울 때는 내게 먹일 음식이나 옷 등을 가져올 때가 전부였다.

    지금도 그런 이유로 그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는 창밖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힘없이 침대로 가서 풀썩 드러누웠다.

    “으으…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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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갑자기 기운이 없어 보여 ㅠㅠ 일리야랑 있을 땐 괜찮은 것 같더니 왜 그러지?]

    나는 갑자기 나빠진 상태에 짐작되는 원인이 있었다.

    “게임 페널티가 시작됐나 봐요.”

    잠들지 못하는 긴 시간 동안 정신이 갉아 먹혀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건 게임 설정으로 인한 페널티가 아니었다.

    그건 그냥 실제로 내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었을 뿐이다.

    다만 지금 겪는 체력 저하 페널티는 ‘몽마의 꿈’에서 일정 시간 이상 머물렀을 때 발생하는 페널티였다.

    페널티는 6시간 단위로 하나씩 추가 발생한다.

    지금은 고작 체력 저하 정도에 그치지만 다음번에는 시야가 축소된다.

    그렇게 점점 오감이 무뎌지고 거동이 어려워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망 확률이 올라가게 되니 최대한 빨리 꿈에서 나가야 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이 페널티는 어떤 식으로 플레이하든 무조건 받게 되어 있었다.

    진짜 문제는 말도 안 되는 매칭률로 인해 생겨난 페널티 저항력이었다.

    일리야는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진작 눈치챘다.

    또한 접촉이 내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다는 듯, 스스로 안기거나 먼저 입 맞추게 만들었다.

    나는 지나칠 정도로 잘 길든 짐승처럼 일리야가 원하는 대로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일리야와 함께 있으면 그토록 길어 나를 괴롭게 하던 밤이 아주 짧게 느껴졌다.

    잠깐이나마 어느 순간 찾아온 허기와 갈증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다 일리야가 곁에 없으면 지독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점점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클라이드가 자신이 대신 희생하겠다고 사무엘과 협의할 때가 됐을 텐데. 아니면 벌써 끝냈으려나?”

    게임 설정상 협의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일찍이 클라이드와 작당해둔 게 있으니 시나리오가 빨리 진행될 터.

    ‘원래는 일리야가 대신 죽게 하는 루트로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말이지.’

    일리야가 타락의 고통을 느끼기 전에 꿈을 자각했으면 했다.

    그러나 실제 그가 연관된 지금 상황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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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브로치 없을 때도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왜 안 만들고 있어요?]

    “시도해봤는데 브로치 실물이 있어야 마법으로 연결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러니 꿈에서 깨기 전까지는 약병을 몸에 꼭 지니고 있어야 했다.

    나는 약병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옆으로 누워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잠깐 떨어져 있는 사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황급히 다가온 남자를 끌어안았다.

    하나 평소와 달리 몸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뭐지?’하고 의문이 든 순간이었다.

    “환영이 격렬한데?”

    귓가에 일리야와 달리 좀 더 나른하면서도 까칠한 기색이 묻어나는 음성이 들려왔다.

    “…클라이드!”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네가 여기에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와 봤지.”

    클라이드는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그런데 내가 분명 일리야와 접촉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내 창조주께서는 먼저 상대를 끌어안았을까? 응?”

    “그게… 저도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요….”

    “변명하지 마. 이 쾌락주의자 같으니.”

    쾌락주의자라니?

    억울한 모함에 항변하려 했으나 클라이드가 돌연 내 뺨을 잡고 휙휙 고개를 돌려보는 탓에 말문이 막혔다.

    “전에 봤을 때보다 야윈 것 같은데. 슬슬 위험해지고 있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아직 이 정도는 버틸만했다.

    하나 클라이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지 혀를 차다가 엉뚱한 말을 했다.

    “일단 나가자.”

    “어째서요?”

    “일리야 녀석이 미쳤으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 넌 섬에 갇혀 있느라 바깥 상황을 모르겠군. 일리야가 중앙 본부 소속 천사를 대거로 징계했다. 알고 보니 너랑 관련이 있던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자 클라이드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너를 중앙 본부로 복귀시켜달라는 탄원서를 올린 천사들이 전부 징계받았다고. 몇몇은 폐기 대상이야.”

    이건 절대 일리야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클라이드도 똑같이 생각한 건지 내게 알고 있는 원인이 있는지 물었다.

    “일리야가 이상해진 건 너와 관련된 문제일 것 같은데. 우리가 만난 날 이후로 무슨 일 있었어?”

    확실히 짐작되는 원인이 있기는 했다.

    “아무래도 타락한 본체가 대천사인 일리야 님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게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나는 일리야의 눈동자가 붉어졌던 상황들을 설명했다.

    일리야가 군사경찰을 죽일 뻔했던 것까지 말하자 클라이드가 나직하게 탄식했다.

    “네 말대로라면 진행되어야 할 시나리오는 궤도에서 벗어난 거로군. 일리야는 현실의 기억만 없을 뿐 타락한 상태니까. 그렇다면 더 극단적인 상황도 고려해야겠는데.”

    “더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어떤 상황이요?”

    “…어쩌면 타락하기도 전에 천계를 심판하려 들지도 모르지.”

    너무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여기 오길 잘했네. 그 녀석이 딴생각하지 못하게 시선 돌릴 일을 벌이면 되겠어.”

    “어떻게요?”

    클라이드가 날 번쩍 안아 들었다.

    “뭐겠어? 널 납치하는 거지.”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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