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일리야는 앞선 지시를 수행하고 돌아온 델리오스에게 파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이제부터 본부에 소속되지 않은 중급 천사 이상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채용해라.”
새로운 천사 탄생률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시점이었다.
천사들의 수명이 매우 길기는 하지만 상위 계급의 천사는 거의 태어나지 않고 있어 본부는 항상 인력난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일리야는 결벽적으로 천사를 고르고 골랐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운영해도 딱히 문제가 없었다.
하나 이젠 달라질 필요가 있었다.
지금처럼 일해서는 테레제와 함께할 시간이 부족하니까.
델리오스는 지나치게 많은 일을 소화하는 일리야의 이러한 결정을 매우 반겼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오늘 남은 일정을 전부 취소해라. 난 이만 퇴근하겠다.”
일리야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서둘러 테레제를 숨겨둔 섬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혼몽한 상태일까.’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테레제는 잠들지 못하는 기이한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과의 접촉으로 고갈된 정신력을 회복하는 듯했다.
왜 그런 문제가 생긴 걸까?
사실 테레제의 특이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매칭률이나 흑마법과 백마법만 사용하지 못하는 체질도 이상했다.
확실한 건 단순한 하급 천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일리야는 버려진 섬에 도착해 저택 문고리를 당겼다.
달칵.
“…….”
문이 열린 순간 그의 표정이 굳었다.
테레제가 사라졌다.
* * *
끼루루! 짹짹!
볕이 달구어지기도 전인 이른 아침.
나는 새까만 무의식에 잠겨있다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두 눈을 부릅떴다.
번쩍!
눈을 뜨자마자 후원창이 떴다.
띠링!
[성좌 ‘쫄보’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어우씨 깜짝이야;;]
“…왜 이렇게 개운하지?”
꽤 긴 시간 동안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육신이 절전모드에 돌입한 것처럼 의식이 흐릿했었다.
한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맑고 개운했다.
피로에 찌들어 뻑적지근했던 전신에 활력이 돌고 있었다.
진짜로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난 잠들 수가 없는데 그게 가능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더 있었다.
“그리고 여긴 또 어디야?”
눈을 떠보니 절대로 중앙 본부나 빛의 탑은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낯선 장소에 있었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다 일리야와 지나치게 친밀한 스킨십을 나누었던 기억이 뜨문뜨문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억 속의 나는 어리광을 부렸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내거나 애원하는 등 상당히 막무가내로 굴었다.
절로 낯이 뜨거워져 비명이 튀어나왔다.
“…끄아악! 으악! 아아악! 그만 떠올라!”
띠링!
[성좌 ‘설명충’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 생각나나 보네 ㅋㅋ]
띠링!
[성좌 ‘예비 사위 일리야’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우리 다 같이 테레제에게 고맙다고 말해볼까요? 테레제야 고맙다!]
성좌들은 날 놀리는 게 재밌는지 후원으로 고맙다는 말만 한 바가지 쏟아냈다. 빌어먹을…….
나는 수치스러움에 머리를 쥐어뜯다가 동면에서 깬 짐승처럼 침대를 벗어났다.
창피한 건 창피한 거고,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는 분?”
[성좌들이 자신들도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되네.
실컷 놀림 받은 직후라 그런지 성좌들의 나태한 대답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띠링!
[성좌 ‘못 먹어도 고’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인생 뭐 있어? 몸으로 부딪쳐]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우선 내가 머물고 있던 집부터 확인해보았다.
“깨끗하긴 한데 한동안 사용하지 않는 곳인가 봐요.”
집은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구에 흰 천이 덮여있는 점이 가장 결정적인 요소였다.
“더 볼 건 없는 거 같으니까 밖으로 나갈게요.”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나무로 빼곡하게 시야가 가로막혔다.
“중앙도시는 아닌 것 같은데.”
천계의 중심지에 있는 가장 큰 섬인 중앙도시는 끝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또한 건물들로 빼곡하여 이런 정제되지 못한 풍경이 존재할 공간이 없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 마력을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보았다.
이는 새로운 섬을 탐사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네요. 금방 마력이 끝점에 도달한 걸 보니 크기가 작은 무인도인 것 같고요.”
그래서 더 의아해졌다.
“왜 빛의 탑을 두고 굳이 이런 곳에 날 데려온 거지? 꼭 숨겨두려는 것처럼….”
…에이. 아니겠지?
띠링!
[성좌 ‘썩은 취향’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______________^*]
나는 찝찝한 기분으로 섬의 끝자락까지 가보았다.
가시거리 안에 다른 섬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휘이이이이잉-
섬의 끝에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바람만 세차게 불 뿐이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네요….”
별다른 수확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 찰나.
와락!
갑자기 두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누군가가 내 허리를 솜인형 낚아채듯 가볍게 안아 든 것이다.
그 때문에 암녹색 눈동자와 시선의 높이가 맞아떨어졌다.
무섭도록 스산한 눈빛이었다.
“왜 여기까지 나와 있는 거지?”
나는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일리야 님이 안 보여서요.”
그러자 일리야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벌써 정신이 들 줄 몰라 자리를 오래 비웠다. 앞으로는 주의하지. 몸은 괜찮은가?”
“네. 그런데 저 내려주셔도 괜찮은데요…….”
“그건 안 되겠군. 안아주지 않았다가 또 울지도 모르니. 혹은 괘씸하다고 내 팔을 저번처럼 물어뜯으면 곤란하니.”
“…!”
불시에 당한 공격에 전신이 용광로에 담갔다 빼낸 것처럼 달아올랐다.
일리야는 그런 날 보며 부정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선명한 미소를 그려냈다.
이 고약한 대천사가 날 놀려먹고 좋아서 웃고 있었다.
나는 씩씩 김을 뿜어낼 기세로 입술을 꾹 다문 채 괜히 정면만 노려보았다.
곧 조그만 저택이 보였다.
그동안 수치스러움이 많이 가신 상태였던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예요?”
“어린 시절에 형제와 함께 살던 집이다. 아니, 아지트였다고 하는 게 낫겠군.”
어쩐지 낯설다 싶더라니, 설정에 없는 장소였다.
‘일리야와 클라이드가 여기서 놀았구나.’
상당히 본격적으로 지은 집이라 둘이서 얼마나 애썼을지 상상되어 웃음이 흘렀다.
일리야는 날 침대에 앉혀놓더니 직접 신발을 벗겨주었다.
천사의 신발은 종아리까지 끈을 감싸는 샌들 형태라 신고 벗는 게 까다로웠으나 마법을 사용하면 간단했다.
하나 일리야는 종아리부터 끈을 일일이 풀어내고 있었다. 공연히 부끄러워졌다.
“아직 이른 시간인 거 같은데 본부에 안 계셔도 괜찮은 거예요?”
“상관없어. 일은 다 끝내고 오는 길이니.”
이렇게 일찍?
일리야의 평균 퇴근 시간은 오후 10시였다.
게다가 최근에는 각인 테스트 때문에 훨씬 늦은 시간까지 일한다고 알고 있었다.
‘으음. 어쨌든 일리야가 과도하게 통제하느라 일이 많았던 거기도 하니까 괜찮겠지.’
나는 다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저 꽤 오랫동안 무단결근한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다른 곳으로 발령된 걸로 처리해두었다. 앞으로도 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
‘그래도 되는 거야?’
죽음을 각오하고서 큰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걸까? 혹은 나로 인한 변화인 걸까?
어느 쪽이든 시나리오와는 너무나 다른 전개라 골치가 아팠다.
그리고 가장 골치 아픈 변수는 따로 있었다.
“저는 왜 여기로 데려오신 거예요?”
이 질문에 신발을 전부 벗긴 일리야가 고개를 들어 올려 날 바라보았다.
“널 옮겨놓을 장소로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여기였다.”
“빛의 탑이 아니라요?”
“거긴 다른 천사들이 있어서 위험하니까.”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일리야는 발목을 쥐고 있던 손을 풀고서 일어났다.
“허기지지 않나? 며칠간 거의 먹은 게 없을 텐데.”
“아… 그러네요.”
일리야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지금까지 한 번도 느끼지 않았던 허기가 밀려들었다.
천계에 온 이후 나는 식사해본 적 없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고 무의미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은 배가 고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천계에 온 지도 벌써 몇 달이 흘렀다.
현실에서는 아직 몇 시간 정도 흐른 수준에 불과하지만,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실상 망했다고 봐야 했다.
배드엔딩 요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내 안색이 나빠져서인지 일리야가 이마에 키스했다.
부드러운 마력이 흘러들어왔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게 하는 유혹적인 감각에 눈꺼풀이 절로 감겼다.
일리야는 입술을 떨어뜨리더니 아공간에서 옷을 꺼내 침대에 올려주었다.
“식사는 중앙도시에 가서 하지. 신분을 숨겨야 하니 이 옷으로 갈아입어라.”
중앙도시란 말에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요?”
중앙 본부와 중앙도시는 각각 다른 섬에 있었기에 지금까지 구경도 하지 못했던 터라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 준비하고 나오도록.”
일리야는 그렇게 말하며 집 밖으로 나갔다.
나는 신나서 일리야가 준 옷을 집어 들었다.
한데 옷이 다소 파격적이었다.
“…일리야가 이런 옷을 준다고?”
검은 레이스가 장식된 짙은 붉은색 드레스는 매우 고혹적이었다.
챙이 넓은 검은색 모자에 마찬가지로 검은 깃털이 하나 우뚝 솟은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팔꿈치를 덮는 긴 장갑과 구두는 벨벳이었다.
새하얀 옷을 즐겨 입는 천사들 사이에서 이러한 차림은 상당히 파격적일 게 분명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옷을 다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
일리야 역시 정체를 감추기 위해 제복이 아닌 평범한 슈트를 입고 안경으로 얼굴을 감추었다.
머리카락은 잿빛이 감도는 베이지색이라 처음에 그가 아닌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일리야는 날 확인하더니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좁혔다.
‘내가 뭘 잘못 입은 건가?’
괜히 내 차림을 확인해보고 있을 때였다.
“천사들이 싫어할 만한 옷을 입혔는데 괜한 짓을 한 것 같군.”
“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일리야가 내 입술에 키스했다.
“잘 어울려. 굶기고 싶을 만큼.”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