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155화 (156/277)
  • 155화

    * * *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그가 나를 안고서 어디론가 향했다는 것. 내가 잠투정 같은 걸 부릴 때마다 입술을 겹쳐왔다는 것. 내 뺨을 부드럽게 쓸며 욕설을 내뱉었다는 것. 조갈증으로 초조해진 사람처럼 나를 원했다는 것.

    기억은 어설픈 형태로 뇌리를 스쳐 빠르게 증발했다.

    나는 거의 의식을 놓은 상태로 존재했다.

    그러다 언뜻 싱그러운 풀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람이 스친 것 같기도 했다.

    포근한 이불이 살갗에 닿았다.

    이어 단단한 몸을 끌어안고 몇 번이나 반복해 익숙해진 입맞춤을 나누었다.

    더, 더 새까만 무저갱으로 의식이 끌어내려졌다.

    내내 시달려온 정신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달콤한 휴식을 끝도 없이 원했다.

    그래서 그냥 본능을 따랐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다만 잠드는 일만큼은 불가능했다. 그 사실이 괴로워 눈물을 흘렸던 것도 같았다.

    응석을 받아주는 사람이 생기니 마음이 한없이 무르고 약해졌다.

    일리야는 모든 순간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자리를 비웠고 나는 혼자서 열병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끙끙 앓았다.

    지독하게도 괴롭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나는 일리야의 온기에 착실하게 길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또 성가신 짓을 벌이고 있군요.”

    일리야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며 들려왔다.

    곧 뺨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리자 새빨간 슈트가 보였다.

    그제야 느지막하게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오즈월드.’

    굳이 그 이름을 부를 만큼 낭비할 기운이 없어 쥐 죽은 듯이 누워있자 오즈월드가 내 뺨을 건드렸다.

    “마력을 탐할 때는 그렇게 게걸스럽게 굴더니 지금은 나무늘보가 따로 없네요.”

    시끄러워.

    나는 귀를 틀어막으려 꾸물꾸물 움직였으나 간단하게 손이 붙들렸다.

    “같은 장면이 너무 반복되었습니다. 슬슬 정신 차리고 새로운 전개를 보여줄 때입니다. 테레제 양.”

    더 쉬고 싶어. 잠들고 싶어.

    “흐음.”

    오즈월드가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손끝, 손등, 손목에 차례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간지러움에 손가락을 움찔하자 그가 방향을 바꾸어 뺨, 눈꺼풀, 이마에 키스했다.

    동시에 일리야의 마력과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 내 안에 흘러들어왔다.

    별빛이 마구 쏟아지는 듯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나는 금방 새로운 기운에 매료되어 오즈월드를 다급히 끌어안았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순순히 내게로 끌려와 귓가에 안착했다.

    더 원했다. 더더욱 많이 원했다.

    오즈월드가 내 입술을 엄지로 막았다.

    “욕심이 많네요.”

    원하는 만큼 그의 기운을 듬뿍 흡수하고 싶었는데 시도가 불발되고 말았다. 성질이 뻗쳤다.

    오즈월드는 그런 날 놀리듯 자신의 엄지손가락 위에 키스했다.

    나는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오직 감정과 본능만 남아 어린아이보다 더 유치하고 포악해져 있었다.

    그래서 나름 야무지게 주먹을 쥐고서 오즈월드에게 휘둘렀으나 단번에 가로막혔다.

    “이제 곧 정신이 들 겁니다. 이 순간은 기억나지 않겠지만.”

    오즈월드가 나를 품에 안은 상태로 뺨과 귓불을 툭툭 건드렸다.

    정신이 들 거라는 말과 다르게 의식이 빠르게 꺼져갔다.

    이번에는 정말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리야를 죽이면 훨씬 편해질 텐데요. 창조주라고 해서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어둡게 꺼져가는 정신으로도 이 한마디는 내뱉었다.

    “닥…쳐….”

    오즈월드가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어차피 곧 창조물을 믿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그리고는 뺨에 키스한 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도록 하죠.”

    빠르게 의식이 꺼졌다.

    * * *

    테레제가 사라진 지 일주일째.

    누구도 하급 천사가 사라지든 말든 관심도 없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일리야 님을 뵙습니다.”

    차분한 인상의 상급 천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서 굳은 표정으로 인사해왔다.

    “무슨 일이지?”

    “테레제 씨를 다른 부서로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느 부서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아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일리야는 남성체 천사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름이 요셉이라고 했었나.

    지난번 복도에서 테레제에게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했던 천사라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일리야는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테레제는 왜 찾는 거지?”

    “동료가 갑자기 사라졌으니까요.”

    “갑자기 사라진 게 아니라 다른 업무를 수행하러 떠난 거다. 내 결정에 불만 있나?”

    요셉은 일리야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건지 옷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리야는 차가운 태도로 요셉을 지나쳐 집무실로 들어갔다.

    내내 침묵한 채 그를 뒤따르던 델리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급 천사 요셉이 아니더라도 꽤 많은 천사가 테레제 씨의 행방을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비서실장은 그녀가 중앙 본부에 걸맞은 인재라더군요.”

    “내가 일부러 험한 곳으로 내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래도 일리야가 지금껏 해온 게 있었으니 다들 테레제가 찍혀서 얼음 땅 같은 험지로 보내졌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일리야는 인지하지 못한 불쾌한 감정에 휩싸여 딱딱하게 일갈했다.

    “다들 천사 하나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상대는 고작 하급 천사였다.

    외모가 빼어나기는 해도 전혀 탐날 구석이 없는 존재였다.

    한데 다들 왜 하급 천사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대체 그녀에게서 뭘 느꼈기에.

    “테레제는 내가 알아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 쓸데없는 관심을 보이는 천사가 있다면 조치해라.”

    불이익을 주라는 뜻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리야의 이상 행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금일부터 매칭률 테스트를 중단하겠다.”

    테레제가 사라진 이후 하루에 10명으로 테스트 인원을 대폭 줄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중단한다고?

    “프로젝트를 폐기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일리야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원로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일시 중단하겠다. 다른 문제들을 처리하는 게 시급하니까.”

    그는 번복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또한, 사적인 이유로 대의를 저버린 적도 없었다.

    한데 오늘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저질렀다.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를 원하고 있는지 깨달았기에 더는 각인할 여성체를 찾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델리오스는 내심 기뻐했다.

    “그럼 당장 중단하라고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일리야와 테레제의 각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델리오스가 나가자 집무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일리야는 급한 업무부터 처리하다가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곤했다.

    애착이 사라진 차원을 위해 일하는 게 이제는 내키지 않았다.

    그가 이 차원을 위하려는 이유는 이제 두 가지밖에 없었다.

    클라이드와 테레제의 생존을 위해서. 단지 그뿐이었다.

    똑똑.

    일리야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창을 열고 들어오는 중인 클라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도둑처럼 기어들어 오지 마라.”

    “별 쓸데없는 걸 따지네.”

    클라이드는 제 안방을 거닐 듯 집무실을 가로질러 일리야의 곁으로 다가갔다.

    둘은 손을 맞잡고 짧은 포옹으로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지?”

    “그렇군.”

    일리야는 자신과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 쌍둥이를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본부에 올 때는 제복을 제대로 갖춰 입으라고 했을 텐데.”

    “그거 좀 덜 갖춰 입어도 아무 문제 없어.”

    평소였다면 여벌의 제복을 꺼내 입으라고 던져주었을 일리야가 그쯤에서 간섭을 관두었다.

    클라이드는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집무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듯 휙 둘러보며 물었다.

    “요즘 여성체 천사들이랑 매칭률 검사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어?”

    “오늘로 중단했다.”

    “네가 결정을 번복할 때가 있네. 어쩐 일이야? 죽을 때가 다 됐나?”

    흔히 하는 농담이지만 일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로 곧 죽을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클라이드는 소파로 가서 벌러덩 누우며 여상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난 왜 불렀는데?”

    일리야는 사무엘에게 천계의 진실을 들은 후 클라이드에게 마법 전서구를 보냈었다.

    자신이 죽은 이후 테레제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나 계획이 틀어졌다.

    일리야는 클라이드의 반대편 자리에 우아한 자세로 앉았다.

    “네가 사고치고 다니지는 않는지 확인차 연락했다.”

    “사고는 무슨. 내가 천계의 머저리 같은 시스템 때문에 얼마나 바쁜 날을 보내는 줄 알아?”

    일리야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전에는 클라이드가 천계의 시스템이 부조리하며 열등하고 편협하다고 말해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러나 이제는 동의했다.

    천계는 잘못되었다. 이딴 곳을 위해 중앙 본부로 출근할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침묵이 감도는 사이.

    클라이드는 일리야를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 차곡차곡 눈에 담는 사람처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일리야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왜 그러지?”

    클라이드도 일리야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챘듯, 일리야 역시 클라이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냥. 새삼 너랑 내가 엄청 다르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누가 보면 쌍둥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겠어.”

    클라이드는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씁쓸해졌다.

    이제는 일리야와 자신이 왜 이렇게 다른지 알고 있었다.

    순리에 맞게 탄생한 게 아니라 이렇게 조형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형제였다.

    클라이드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한동안 중앙도시에 있을 생각이니까 숙소나 마련해줘.”

    클라이드는 빛의 탑에서 추방되었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문득 자신이 머물만한 장소를 하나 떠올렸다.

    “참. 그 집이 아직 남아 있던가? 왜, 우리가 어렸을 때 빈 섬에 지어둔 집 있잖아.”

    그 말을 꺼낸 순간 일리야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내가 없앴다. 중앙도시에 있는 호텔에서 묵도록 해. 비용은 내게 청구될 거다.”

    “그래? 아쉽네. 오랜만에 그 집이 보고 싶었는데.”

    클라이드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창으로 가서 틀을 밟은 자세로 손을 흔들었다.

    “나 간다.”

    일리야는 본데없는 행위에 못마땅해하면서도 사라지는 클라이드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문득 한숨이 나왔다.

    그는 성미가 급한 델리오스나 개성적인 마린, 제멋대로인 클라이드를 어떻게든 천계에 적합한 모습으로 교정하려 했다.

    거기에는 테레제도 해당되었다.

    하나 자신이 아끼는 것들에 저도 모르게 한없이 관대해져서 결국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게 되었다.

    이럴 때면 자신에게 확실히 클라이드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음을 실감했다.

    자유분방한 천사가 싫다.

    하지만 결국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 정제되지 않은 자유로움이었다.

    자신은 절대로 갖지 못할.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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