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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54화 (155/277)

154화

‘팔자에도 없던 회사 생활이라니.’

비서실에서 내 포지션은 애매모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좋게 말하면 올라운더, 나쁘게 말하면 잡일 담당이었다. 망할.

‘이래서야 게임 만들 때랑 다를 게 뭐냐고.’

그때도 배경 디자인, 시나리오 제작 등 이것저것 해본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가장 많은 일을 떠맡았었는데.

심지어 내가 만든 게임 속에서도 같은 취급이라니, 이쯤 되니 운명인가 싶기도 했다.

“제발 쉬고 싶어요…….”

내 중얼거림에 요셉이 웃었다.

“이번 프로젝트만 마무리하면 쉴 수 있을 거예요.”

“그거 일주일 전에도 들었던 말인데요.”

“하하,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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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자꾸 다른 천사들하고 접촉해도 돼요? 클라이드가 접촉하지 말라고 했는데…]

클라이드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으나 정식 설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날개가 없는 나로서는 천사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섬과 섬을 이동할 수 없었다.

‘페가수스 좀 배정해달라고 했다가 하급 천사에게 그런 특혜를 주는 건 원칙상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받았지.’

잡념에 잠긴 사이 어느새 E구역의 비개발 섬에 도착했다.

우리는 주변을 살피며 이곳이 새로운 거주지로 적합한지 확인한 후 잠깐 쉬기로 했다.

요셉이 손수건을 깔아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여기 앉아요.”

그는 다른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첫 만남부터 내게 차갑고 무뚝뚝하게 굴었었다.

하나 요즘은 태도가 부드러워져 잘 웃고 친근하게 행동했다.

“감사합니다.”

그때 요셉이 입을 열었다.

“테레제 씨는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요?”

“아니요.”

“그럼 저랑 만나볼래요?”

“예?”

“테레제 씨한테 관심 있는 티 많이 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나 보네요.”

전혀 몰랐다.

요셉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습니다. 윌슨이 같이 저녁 먹자고 했던 것과 피터가 집에 초대한 걸 거절하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거 같았으니까요.”

“……으엑?”

“타 부서에서 테레제 씨한테만 계속 업무 지원 요청하는 게 관심 끌려는 거였다는 것도 몰랐어요?”

“예에……. 전혀요.”

자꾸 나한테 일 시켜서 짜증 난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리고 내게 꿈속에서 뭔가를 먹는다는 건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 식사 자리를 거절했다.

집에 초대받은 건 확실하게 이상하다고 느껴서 거절한 거였고.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요셉이 말을 이었다.

“저는 제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천사라는 걸 당신 덕분에 처음 깨달았어요. 이렇게 웃어본 적도 처음이고요.”

“그러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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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버스 사망원인: 행복사]

아무래도 섬을 오가는 업무에서 제외해 달라고 말해야 할 듯했다.

과연 한낱 하급 천사의 요구를 들어줄지는 의문이지만.

‘이동 마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어려운 마법인지라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끙끙거리자 요셉은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제가 곤란하게 만들었나요?”

“예에…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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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가 돌려서 말하는 걸 못 해요…]

너무 솔직하게 말해버린 걸까?

요셉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당신 같은 천사는 처음 봐요.”

“그렇군요….”

이후 다행스럽게도 요셉은 “생각해보고 대답해줘요.”라고 말한 뒤 나를 데리고 중앙 본부로 돌아와 평소처럼 일했다.

나는 다른 부서에 지원 나가는 길에 문득 테스트실을 쳐다보았다.

오늘도 수많은 여성체 천사가 줄지어 서 있었다.

‘원로원에서는 섬이 추락하기 전까지 클라이드가 스스로 희생하길 원해도 절대 제물로 바치지 않아.’

클라이드가 죽으면 일리야가 자식을 낳겠다는 결정을 철회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일리야와 각인할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최대한 버틸 것이다.

그 시점이 바로 첫 번째 섬이 추락하는 순간이다.

‘그동안 난 계속 이렇게 비서실 소속 천사로 일하게 되는 건가?’

“이러다 봉급 모아서 집도 사겠네.”

그런데 내 정신이 언제까지 멀쩡하게 유지될까?

나는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일상은 반복되었고 잠들지 못해 너무나도 긴 밤들이 나를 괴롭혔다.

꿈속에서 느끼는 피로감은 현실에서보다 훨씬 강하게 육신을 짓눌렀다.

중력이 몇 배는 더 높아진 듯한 기분이었다.

‘일리야와 접촉하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

“…일이나 하자.”

* * *

피곤한 나날이 흘렀다.

새로운 섬을 발굴하러 가는 업무에서 제외해달라는 요청은 거절당했고 외려 다른 업무가 잔뜩 불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죽을 맛인데 요셉의 고백 이후로 남성체 천사들끼리 경쟁이라도 붙은 건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게 접근해왔다.

“테레제 씨. 오늘 같이 저녁 먹을래요?”

“배불러요.”

“내일 시간 있어요?”

“페가수스 밥 주러 가기로 했어요.”

피곤해 죽겠는데 왜 이렇게 말을 걸어대는 거야?

“어으… 피곤해.”

일리야를 살리고 자시고 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게 생겼다.

그래. 내가 살아야 이 세계도 살지. 일단 좀 쉬자.

나는 비서실을 나와 고요한 복도로 도망쳐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죽은 듯이 서 있었다.

“테레제 씨?”

딱히 열심히 숨어있지 않기는 했지만 금방 요셉에게 위치를 들켰다.

“어디 아파요?”

나는 눈치 없이 다가온 요셉에게 손을 내저었다.

“좀 피곤해서 그래요.”

“휴게실로 데려다줄까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혹시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불편해요?”

“아뇨, 뭐…….”

정답이었다.

‘차라리 그냥 그때 받은 고백에 대한 답을 지금 해버릴까?’

“저기, 요셉.”

고백을 거절하기 위해 입술을 떼니 요셉이 쓰게 웃었다.

직접 말을 하기도 전에 벌써 내가 거절하리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일단 휴게실부터 데려다줄게요. 안색이 안 좋아서 걱정되니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요셉이 성큼 다가와 날 안아 들려 했다.

하나 불쑥 난입한 목소리에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근무 시간 중에 거기서 뭘 하는 거지?”

언제 다가온 것인지 몇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 우뚝 선 일리야가 음영이 드리워진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리야 님을 뵙습니다.”

나와 요셉은 서둘러 예를 갖췄다.

일리야는 집어치우라는 듯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어조로 다시 한번 말했다.

“근무 시간 중에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이는 결코 일리야답지 못한 행동이었기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요셉 역시 나와 같은 심정인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얼른 보고했다.

“죄송합니다. 테레제 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휴게실로 데려다주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름이 뭐지?”

맥락이 전혀 이어지지 않는 질문이었으나 요셉은 대답했다.

“요셉입니다.”

“상급 천사 요셉.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임무를 수행해라.”

온건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말이었으나 쉽게 말해서 여기서 꺼지란 뜻이었다.

요셉은 잠시 뻣뻣하게 굳은 눈으로 지면을 응시하다가 날 힐끗 보았다.

“…알겠습니다.”

단호한 축객령에 요셉이 떠나자 이 자리에는 일리야와 나만 남게 되었다.

일리야는 집요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뭔가 캐내고 싶어 하는 표정은 평소와 다르게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지시하실 게 있으신가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갈증을 느끼는 시선으로 날 응시하다가 목을 쓸어 만졌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그를 지켜보았다.

하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자꾸만 다른 자아가 내게 유혹하듯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일리야를 끌어안으라고. 그의 숨을 들이마시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새빨간 경고를 보내왔다.

‘미치겠네.’

인내심은 빠르게 고갈되어 갔다.

일리야에게 안겨 있을 때 얼마나 황홀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조급증이 일었다.

그때 그가 날 추궁했다.

“방금의 그 천사와 각인할 생각인가?”

“아니요.”

어차피 천계에서는 천사끼리 서로 마음이 통하고 매칭률이 잘 나온다고 해서 멋대로 각인할 수 없었다.

중앙 본부에 각인하겠다고 보고한 후 허가가 떨어져야 서로를 반려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서로의 등급이 다르면 반려될 가능성이 컸다.

상급은 상급끼리. 하급은 하급끼리.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보통 계급을 벗어난 각인은 허락되지 않았다.

“요셉은 상급 천사고 저는 하급 천사라 각인 신청을 한다고 해도 반려될 겁니다.”

“교제할 마음은?”

각인과 개인적인 교류는 다른 일이었다. 천계에서도 거기까지는 억압하지 않았다.

애초에 천사들끼리 서로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탓이기도 했다.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 왜 물으시는 거죠?”

일리야가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리더니 한숨이 짙게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나는 알고 있다.

그는 호감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혹은 매칭률의 영향이거나.

지금 내가 그를 갈망하듯 일리야도 본능적으로 내게 이끌리는 것이다.

상대의 호감을 인지한 이상 인내심이 마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일리야가 내 요구를 들어줄 것을 예상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저 좀 안아주세요.”

“…….”

“죽을 것 같으니까, 제발…”

일리야가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살 것 같아.’

다리에 힘이 모조리 풀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일리야가 날 안아 든 덕분에 주저앉아버리는 꼴사나운 짓은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살고 싶어서 그를 허겁지겁 끌어안았다.

그런데 맑게 회복될 줄 알았던 정신은 반쯤 스위치가 꺼진 등처럼 깜빡거렸다.

잠을 닮은 몽롱함이 안개처럼 끼었다.

세상이 둔탁해지고 있었다.

고통과 피로가 마비되어 가며 나를 영원한 안식에 잠기게 할 것만 같았다.

나는 뺨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의 곧은 턱에, 두꺼운 목과 어깨에 이마를 대고 마력을 받아마셨다.

그렇게 해도 아예 입속에 전부 밀어 넣고 꿀꺽 삼키고 싶을 정도로 부족했다.

멍멍해진 귓가에 일리야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고개 들어.”

사나운 명령조였다.

무거워진 눈을 억지로 뜨며 고개를 들자 짙어진 녹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뜨거운 것이 입술을 삼켰다.

동시에 마력이 전신을 흠뻑 적셨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황홀할 순 없으리라.

나는 눈꺼풀을 닫으며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대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완벽한 무의식이 나를 지배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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