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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52화 (153/277)
  • 152화

    정상적인 루트대로라면 일리야가 클라이드 대신 죽게 되어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그러나 실제 일리야가 꿈에 들어온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즉, 그가 타락 천사가 된 직후의 내용은 게임에 없다는 뜻이었다.

    ‘설마 그때까지 꿈이 유지되진 않겠지?’

    클라이드는 내게 불길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일리야는 역대 최고로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천사다. 그 녀석이 정말로 죽이겠다 결심한다면 나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그런 녀석이 이성을 잃고 날뛴다면 마계는 아마 초토화되겠지.”

    대악마는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게 아니었다.

    마계에서는 싸우고 죽여서 힘을 증명해 직접 대악마라는 칭호를 거머쥐어야 했다.

    그리고 일리야는 타락 천사가 되자마자 대악마가 된다.

    얼마나 날뛰고 들쑤셨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에 쥔 약병을 힐끔 보았다.

    클라이드가 왜 이딴 걸 나한테 줬을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혹시 이거 이성이 돌아오게 하는 약 같은 건 아니죠?”

    “어떻게 알았어? 하루에 한 알씩 먹이고 상태가 특별히 나쁠 때는 한 알 더 먹이면 돼.”

    “…….”

    약병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무슨 수로 이성을 잃은 대악마에게 약을 먹이냐?!’

    “제가 약을 먹일 수 있을까요…?”

    “나야 모르지. 하지만 대비책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쪽이 좋잖아.”

    그건 그렇지만, 너무 무책임하잖아.

    클라이드는 그나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약을 먹여서 이성이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여기가 꿈속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자각할 거다.”

    그 전에 내가 사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내가 우울한 표정으로 약병을 주머니에 넣자 클라이드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아직 아공간도 사용할 줄 몰라?”

    “인벤토리 마도구가 있기는 한데 그건 보통 현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어서요.”

    “그럼 뭐가 문제야? 마도구라면 마법으로 연결하면 되잖아.”

    그러게?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일리가 있었다.

    아니, 마력 회로 설계만 제대로 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오오…. 괜히 대천사인 게 아니네요?”

    “까불지?”

    칭찬해줘도 뭐라고 그러네.

    클라이드는 창밖을 보더니 내키지 않은 투로 말했다.

    “슬슬 가보는 편이 좋겠어.”

    나 역시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있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라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페가수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지.

    나는 당연히 혼자서 마을을 나가려고 했는데 클라이드가 곁으로 다가오더니 무심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데려다주지.”

    티 나게 다정한 건 아니지만, 그는 확실히 내게 친절하게 행동했다.

    “고마워요.”

    내가 배시시 웃자 클라이드는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페가수스는 마을 밖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페가수스의 등에 오르기 전에 클라이드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대천사 클라이드는 이미 죽었고 이곳이 꿈속이라지만, 다음번 만남에서 그가 죽는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하나 클라이드는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다음에는 본부에서 보겠군.”

    “……그렇겠죠.”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죽을 게 불쌍해?”

    외려 자신의 죽음을 두고 농이나 던졌다.

    그가 내 코를 톡 치듯 건드렸다.

    “불쌍해하지 마.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기에는 너무 오래 살았거든. 반인반마로 태어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환생하잖아?”

    하지만 대천사 클라이드는 이대로 영영 사라진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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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돼! 클서방 조금이라도 사라지지 마!]

    클라이드는 내 어색한 미소를 보더니, 혀를 찼다.

    “내 창조주께서는 이렇게 정이 많아서 어떡하려고 그래? 그러니까 약아빠진 놈들이 네 약한 마음을 이용하려고 들잖아.”

    그가 말한 약아빠진 놈들이라는 게 남자 주인공들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딱히 그런 적 없어요…….”

    “테레제.”

    클라이드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차분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별을 암시하는 기색을 품고 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처음 보는 종류의 미소를 지었다.

    “나 좀 안아줘.”

    아마도 애달픔이라고 부를 그런 미소였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약간 화가 난 어조로 쏘아붙였다.

    “일부러 날 놀리려고 이러는 거 알아요. 매칭률 덕분에 당신 감정이 느껴지거든요?”

    그러자 클라이드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애달픔 대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보기 좋게 떠올랐다.

    “아. 그걸 생각 못했네. 그래서 나 안 안아주려고?”

    클라이드가 어서 안아달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띠링!

    [성좌 ‘잘생긴 게 죄라면 클라이드는 사형’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하… 천사는 원래 끼를 잘 부리나요?]

    그런 그가 얄미웠지만 결국 마뜩잖은 표정으로 안아주었다.

    그가 나를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거봐. 네 약한 마음을 이용하는 대로 휘둘리잖아.”

    “휘둘리는 게 아니라 선심 쓴 건데요?”

    “네 애정을 갈구하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굴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줄 거면서 센 척은.”

    “…….”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물러 터지게 굴었나?’

    클라이드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애정이 얼마나 중독적인지 모르지? 다 개새끼처럼 눈 뒤집혀서 침 뚝뚝 흘리는 것도 모르고. 불쌍한 내 창조주 같으니. 이렇게 멍청해서 앞으로 어떡하려고 그래.”

    거, 듣는 창조주 기분이 좀 나빠지려고 하는데요.

    “그래서 사랑스럽긴 하네.”

    “…….”

    “이런 마음으로 날 태어나게 해준 거로군.”

    클라이드의 감정이 흠뻑 흘러들어왔다.

    “한 번씩 살아 있어서 엿 같기도 하지만, 대체로 행복했어. 고마워.”

    그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게 이렇게나 엄청난 기분이 드는 거였구나.

    “꼭 일리야를 구할게요. …환생한 당신도 구할 거예요.”

    비장하게 내뱉은 맹세를 들은 클라이드가 포옹을 풀더니 내 울먹거리는 표정을 보고 웃었다.

    “바보 같은데 이상하게 든든하네.”

    그리고는 정중한 태도로 손등에 키스했다.

    “그 녀석을 부탁할게.”

    끄덕.

    나는 페가수스에 올라타 섬으로 비상했다. 힐끔 뒤를 보니 희고 아름다운 클라이드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목장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페가수스의 등에서 내려 장비를 정리한 후 비올레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델리오스가 나타났다.

    그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네? 무슨 문제요?”

    “일리야 님이 모든 여성체를 대상으로 각인 매칭률을 테스트하겠다고 공표하셨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 천사가 진짜……. 섬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나 싶어서 놀랐잖아.

    “말이 안 될 건 없죠.”

    “지금 당신 자리를 빼앗기게 생겼는데 왜 그렇게 태평한 겁니까? 분하지도 않아요?!”

    띠링!

    [성좌 ‘예비 사위 일리야’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누가 보면 델리만쥬가 자리 뺏긴 당사자인 줄 알겠어]

    델리오스는 나를 안아 들고 중앙 본부로 가는 내내 화를 냈다.

    “심지어 테스트 대상에 하급 천사는 제외라니. 이건 불합리합니다! 옷이라도 다 똑같으면 속여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젠장!”

    “저는 진짜 괜찮다니까요?”

    “안 되겠습니다. 중앙 본부에서 근무하는 천사들의 복장을 통일시켜달라는 안건을 제출해야겠어요!”

    이러다 천계 혁명 운동이라도 벌일 기세여서 진정하라는 의미로 바실리스크에게 한 것처럼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워워. 진정하세요. 어차피 일리야 님이랑 매칭률이 높게 뜨는 천사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상관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델리오스는 중앙 본부에 도착해 나를 내려주며 한결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흥분한 감정이 진정된 모양이었다.

    그는 멋쩍게 헛기침했다.

    “크흠. 저답지 않게 너무 흥분했군요.”

    “그럴 수 있죠.”

    “…그래도 당신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말한 건 진심입니다.”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델리오스가 날 신경 써주는 게 제법 기특해서 “에이,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주다가 클라이드의 경고가 생각났다.

    ‘아참. 다른 천사들하고 접촉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손을 치우자 델리오스가 묘하게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나한테서 뭔가 영험한 기운이라도 느낀 건가 싶어서 긴장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닌지 델리오스가 매정하게 말했다.

    “저는 업무가 있어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당신은 비서실로 가보세요. 위치는 알고 있겠죠?”

    그러고는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휙 떠나버렸다.

    “내가 길 모르면 어쩌려고 저래?”

    나는 툴툴거리며 비서실로 갔다.

    비서실은 내 스킬이 무색하게 또 폭격을 맞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흩날리는 종이를 확인해보니 여성체 천사들을 조사한 리스트였다.

    그 밖에도 새로운 섬 개발 계획서라든가 균열 조사 보고서라든가 인사이동에 관련한 서류 등등이 발에 챘다.

    “일리야 님 스케쥴 조절 끝났습니까? 매칭률 테스트할 시간 따로 빼야 하는데요!”

    “그럴 시간이 어딨습니까? 지금 천계수 문제 때문에 모든 업무가 중단될 위기라고요!”

    천사들은 내가 들어와서 서류를 뒤적거리든 말든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럴 겨를조차 없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보니 좀 안타깝기는 했다.

    ‘인력 부족만큼 사람 미치게 하는 것도 없으니까.’

    나는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면서도 은근슬쩍 타자기를 두드려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작성했다.

    그 밖에도 빠른 타이핑 속도를 이용해 수기로 작성된 회의록을 전부 옮겨 쳐놓거나 지도에 새로운 자원이 있는 섬의 위치를 표시해두기도 했다.

    한창 내 나름대로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 상급 천사 하나가 다급히 비서실로 들어왔다.

    그 상급 천사는 날 발견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에 있었군요. 일리야 님이 급히 찾고 계십니다. 당장 집무실로 가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비서실을 나가기 전에 서류들을 비서실장 천사에게 넘겼다.

    “이거는 제가 작성한 건데 여기 둘게요.”

    비서실장은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한 거냐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거기에 두라고 하고는 곧 관심을 껐다.

    사실 참고하든 말든 상관없기는 했다.

    어차피 꿈속이었으니까.

    비서실과 일리야의 집무실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어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똑똑.

    “일리야 님. 테레제입니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몸이 휙 당겨졌고, 등 뒤로 문이 쾅! 소릴 내며 닫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일리야의 품에 반쯤 갇혀있었다.

    나는 맹수에게 목덜미를 물린 토끼처럼 얼어붙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일리야 님…?”

    “…….”

    일리야의 두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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