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제이콥은 이마를 감싸 쥐며 펄쩍 뛰어올랐다.
“악! 아, 클라이드 님! 왜 맨날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클라이드는 위협적인 표정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입 안 다물어? 매칭률 테스트기나 내놔봐.”
“네에?! 제가 얼마나 어렵게 구한 건데요. 제 운명의 상대하고 쓸…”
“네 운명의 상대는 천 년 뒤에도 없어.”
“저주하시는 겁니까?!”
“저주가 아니라 대천사의 예지야. 잔말 말고 내놔.”
제이콥은 재수 없는 소리를 들은 충격에 훌쩍거리며 각인 매칭률 테스트기를 마지못해 건넸다.
“꼭 돌려주셔야 해요. 성질난다고 또 남의 물건 부수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클라이드는 대답하지 않고 날 데리고 공방을 나갔다.
제이콥은 굴하지 않고 뒤를 졸졸 따라오며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거 하나밖에 없는 거니까 정말로 꼭 돌려주셔야 해요. 저기요? 클라이드 님, 제 말 들리시죠?”
제이콥이 부산스럽게 군 탓인지 일하고 있던 천사들이 이곳으로 점점 모여들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또 제이콥이 사고 쳤어?”
그러다 날 발견하고는 다들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질렀다.
“어머머머! 클라이드 님 색시야?”
“다들 여기 나와봐! 클라이드 님이 색시를 데려왔어!”
“세상에, 잘 어울리네!”
“어디서 이렇게 예쁜 천사를 데려왔지?”
여기 마을에 있는 천사 대부분이 클라이드가 데려왔다는 설정인데 왜 나는 냅다 색시가 되는 건데?
어처구니가 없어 눈만 끔뻑이고 있으니 천사들이 뭐가 좋은지 까르르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것 봐!”
이상하다. 이런 반응을 어디서 겪어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아. 성좌들이랑 똑같군.’
뭐든 저들 멋대로 로맨스로 해석하는 성좌들과 비슷했다.
클라이드는 자신의 집 앞에 멈춰서더니 천사들을 향해 사납게 쏘아붙였다.
“다들 남의 일에 신경 끄고 썩 꺼져.”
“오~ 다른 천사가 내 여자를 쳐다보는 게 싫다?”
“어머, 집에서 뭘 하려고 우리를 내쫓는담?”
“키스해! 키스해!”
클라이드는 나부터 집안에 밀어 넣더니 천사들에게 살벌하게 경고하고 자신도 들어왔다.
“진짜 죽는다.”
끼익 탁.
“우우~”
“휘이익! 행복하세요!”
그러나 그의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외려 얄궂은 휘파람 소리와 환호 혹은 야유만 거세질 뿐이었다.
“저것들을 그냥.”
나는 피식 웃으며 밖으로 뛰쳐나가 한바탕 뒤엎으려는 클라이드를 만류했다.
“왜요? 보기 좋은데.”
“보기 좋기는 무슨.”
그래도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클라이드는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테이블로 향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개성 있고 자유분방한 이곳 천사들을 아낀다는 게 느껴졌다.
그는 각인 매칭률 테스트기를 그 위에 올려두고서 내게 고갯짓했다.
“여기에 손이나 올려.”
나는 클라이드와 높은 매칭률이 뜰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 기억을 헤집어 그가 진실을 알게 되는 일 같은 게 가능할 리 없었으니까.
타다다다다다다다닥!
그리고 역시나 999가 떴다.
클라이드는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지.”
[‘일리야’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탄식을 쏟아냅니다.]
[다중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솔직히 나도 이럴 줄은 알았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매칭률은 왜 확인해본 거예요?”
설마 나한테 반했나? 각인하려 드는 건 아니겠지? 그건 곤란한데.
“저는 꿈이라고 해도 함부로 누군가와 각인할 생각 없어요.”
클라이드는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헛소리할 거면 입 다물고 있어.”
그러더니 밖에서 무사히 테스트기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제이콥을 불렀다.
“제이콥! 들어와 봐.”
그는 나와 제이콥의 각인 매칭률도 검사시켰고 또 999가 떴다.
제이콥은 입을 틀어막았다.
“당신은 역시 제 운명의 상대였군요…!”
“어. 모두의 운명이야.”
클라이드는 냉정하게 말하며 제이콥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곧 제이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클라이드에게 물었다.
“저는 왜 부르셨어요?”
“테스트기 가져가라고.”
제이콥은 테스트기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매우 안도하며 신줏단지처럼 품에 안고 후다닥 나갔다.
클라이드는 팔짱을 끼며 날 쳐다보았다.
“뭐가 문제인지 알겠어?”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클라이드는 자괴감에 휩싸인 표정으로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멍청한 게 창조주라니…….”
욕할 거면 속으로 하든가, 왜 대놓고 하지?
그는 인내심을 갖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모든 천사와 말도 안 되는 매칭률이 뜨는 천사. 그게 어떤 존재일 거 같아?”
“어… 대단한 존재?”
“그런 허접한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비슷해. 대천사부터 하급 천사까지 모든 천사와 999퍼센트의 매칭률이 뜨는 존재라니. 누가 봐도 ‘신’ 같지 않아?”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다만 신이라는 거창한 존재로 보기에는 내가 너무 보잘것없었다.
“그러기에는 제 능력치가 너무 형편없지 않아요?”
“그래서 더 문제인 거지.”
클라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성큼 다가오더니 입을 맞출 듯이 손끝으로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손에 넣을 수 있는 신이라니. 나조차 탐나는데.”
띠링!
[성좌 ‘썩은 취향’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가져! 가둬! 각인해! 탐해!]
그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약한 정전기가 일어나는 것처럼 간지러워 나도 모르게 쳐내듯 떨어뜨렸다. 몹시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느낌이 이상해요.”
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클라이드가 손가락에 남은 감각을 없애려는 듯이 비볐다.
그 역시 뭔가가 느껴진 듯했다.
“다른 천사와 접촉했을 때도 이랬나?”
“아니요. 특별한 느낌이 드는 건 일리야 님이랑 당신밖에 없어요.”
“하아…. 조용히 꿈을 끝내고 싶다면 대천사와의 접촉은 피하도록 해.”
내가 대답 없이 눈만 깜빡거리자 클라이드가 사납게 경고했다.
“일리야 그 녀석과도 접촉하지 말라고. 알아들었어?”
그건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였다.
“제가 날개가 없어서 빛의 탑이랑 본부를 드나들려면 일리야 님께 안겨서 이동해야 해요.”
“…설마 일리야가 널 본인 거처로 데려갔다는 말은 아니겠지.”
“맞는데요?”
클라이드는 이마를 짚었다.
“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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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형제랑 사이좋게 다같살 가자]
클라이드는 대뜸 날 탓했다.
“넌 창조주라면서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어?”
“저는 그냥 게임 제작자일 뿐이지 진짜 신 같은 게 아니라고요…….”
내 구시렁거림에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랑 접촉하면!”
접촉하면?
내가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자 클라이드가 대뜸 욕설을 내뱉으며 한숨지었다.
그는 내게 경고성 다분한 어조로 강하게 말했다.
“아무튼 안 돼. 절대로 접촉하지 마.”
뭐야. 짜증 나게 왜 말을 안 해줘?
“저기, 천사를 열받게 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거고….”
“생각 좀 하게 조용히 해.”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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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접촉하면 안 될까~? 나는 알 거 같은데~?]
나는 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는 중인 클라이드에게 물었다.
“혹시 저랑 접촉하면 설레나요?”
“…크흡! 쿨럭!”
클라이드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연신 콜록거렸다.
정곡을 찌른 듯했다.
“제가 좋아지는 모양이네요.”
나는 마법 동물들이 날 좋아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나 나와의 접촉에서 느끼는 감각이 그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라는 듯 클라이드가 말했다.
“이성으로 똘똘 뭉쳐있는 척 도도하게 구는 천사들의 약점이 뭔지 알아?”
“글쎄요…?”
“자극이야.”
천사들은 지나치게 희로애락을 통제당한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생전 처음 겪어보는 커다란 자극이 생겼을 때 적당히 흘려보낼 수 있는 경험치가 없었다.
클라이드는 천사에게 나와의 접촉은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이상의 엄청난 자극을 유발할 거라고 했다.
“누구든 널 만지는 순간 열병 같은 첫사랑에 빠져버릴걸.”
듣기만 해도 질려버리는 말이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델리오스나 마린, 비올레타 등등의 천사들과 접촉한 적 있는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일리야는… 약간 특별하기는 했지만 정신을 못 차린다거나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클라이드가 너무 겁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클라이드가 경고했다.
“나와 일리야는 다른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해서 빨리 자극을 느꼈을 확률이 높아.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거나 다른 천사와 접촉하는 횟수가 늘면 그들도 뭔가를 느낄지도 모르지.”
이렇게나 엄중하게 경고하니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조심할게요.”
어쨌든 나도 굳이 타인과 서로를 만지작거리고 싶지 않았다.
클라이드는 일리야에 대해서도 한 번 더 경고했다.
“일리야는 참을성이 강한 성격이니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확신할 수 없어. 그러니까 특히 조심해.”
열병 같은 첫사랑을 앓는 일리야라니.
영 상상이 되지 않아서 뭘 조심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이드는 미덥지 않다는 듯 날 쳐다보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일리야가 몽마의 꿈에서 깰 방법은 뭐지? 변수가 생겼으니 그 방법이 달라졌을 거 아냐.”
“스스로 이곳이 꿈속이라는 걸 자각해야 해요.”
어? 잠깐만. 클라이드가 접촉으로 내 기억을 읽은 거라면 일리야 역시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지금까지 일리야와 접촉한 게 얼만데 왜 한 번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던 거지?’
천사들마다 나와 접촉했을 때 각각 다른 현상이 일어나는 거라면 말이 되기는 했다.
어쩌면 좀 더 접촉해보면 일리야가 현실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고.
‘…시도해 볼까?’
그때였다.
“너 지금 일리야랑 포옹할 생각 했지? 그러면 나처럼 전말을 다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알았어요?”
“보나 마나 뻔하지. 그 방법은 얌전히 폐기하는 게 좋을 거다. 나야 네가 꿈에서 깨면 사라질 존재지만 일리야는 그렇지 않을 텐데?”
본체가 빙의한 일리야는 꿈속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할 것이다.
클라이드가 내게 물었다.
“그 녀석이 어떻게 하면 천계를 박살 낼 수 있는지 네 기억으로 깨달아버린 순간 어떻게 행동할 거 같아?”
“…일단 천계를 없애겠죠.”
덩달아 인간계도 멸망하겠지.
나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 물었다.
클라이드는 돌연 아공간에서 웬 약병을 하나 꺼내 내게 던졌다.
“이거나 받아.”
뚜껑을 열어보자 손톱만 한 크기의 동그란 환약이 여러 개 담겨 있었다.
“이게 뭔데요?”
“내가 죽으면 일리야가 타락 천사가 되잖아. 악마의 낙인이 찍힌 천사가 이성적이고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휴, 그럼요.”
띠링!
[성좌 ‘갬블러’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몰랐다에 1억 코인 걸겠음]
사실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봤다. 시나리오에 없는 부분이거든.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