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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50화 (151/277)
  • 150화

    내 목을 겨눈 단검이 서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침이라도 까딱 잘못 삼켰다간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아서 숨조차 죽이게 될 정도였다.

    클라이드는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할 말이 없나? 그럼 곤란해질 텐데.”

    스르륵.

    단검이 금줄을 긁으며 안쪽으로 더 파고들었다. 뾰족한 날이 금방이라도 살갗에 닿을 것만 같았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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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서방 왜 그래ㅜ 오해가 있다면 키스로 풀어]

    나는 경찰이 겨눈 총 앞에서 손바닥을 펼쳐 보이는 용의자처럼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다만 항복을 외치는 몸짓과 달리 내 입은 억울함을 성토했다.

    “제가 바실리스크 문제도 해결해드렸는데 다짜고짜 이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

    내 항변에 클라이드가 말끔히 대답했다.

    “응. 그건 고마워. 그래서 내가 친절하게 여기에는 왜 온 거냐고 묻고 있잖아?”

    ‘야 이 미친놈아. 이게 어딜 봐서 친절한 거냐?’

    열불이 터지려는 속내와 달리 내 입은 최대한 정중하게 움직였다.

    “저는 클라이드 님을 뵈러 온 거예요.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요. 그러니 이 단검 좀 치워주시겠어요?”

    “내가 왜?”

    “어차피 이러지 않아도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저 같은 하급 천사는 그냥 죽는다고요. 그런데 뭐 하러 이런 쓸데없는 위협을 해요?”

    내 논리정연한 설득에 납득한 건지, 클라이드는 단검을 아공간으로 치워버렸다.

    “…보기 드물게 겁대가리 없는 하급 천사로군.”

    날 마뜩잖게 여기는 시선은 그대로였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아.’

    클라이드의 입에서 ‘보기 드물게’ 같은 반응이 나왔다면 긍정적인 신호로 여겨도 좋다.

    그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 하나같이 비슷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천사들을 싫어했다.

    [“이딴 게 삶이라면 살아갈 이유가 있나?”]

    ……라는 것이 클라이드의 생각이었다.

    본인 쌍둥이와는 정반대의 가치관을 지닌 셈이었다.

    그런데도 둘은 서로를 특별하고 애틋하게 여겼다.

    거의 유일하게 ‘우리’라는 개념을 공유하는 사이였고, 이는 단순히 쌍둥이 형제라는 사실을 넘어서는 유대와 애착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사명감을 느꼈다.

    “일리야 님을 도와주세요.”

    내 비장한 말에 클라이드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일리야를 도와달라고? 살면서 들어본 말 중 가장 참신한 개소리로군.”

    “클라이드 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분은 죽을지도 몰라요.”

    클라이드는 피로감을 느낀 듯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을 내리며 더없이 싸늘해진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농담이 재미없는데.”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쏟아냈다.

    “천계를 유지할 차원 에너지가 거의 바닥났어요. 이대로라면 마계와 융합될 거예요. 원로원은 강대한 힘을 지닌 당신을 희생시켜 부족한 차원 에너지를 보충할 계획이죠. 일리야 님은 이를 거절하고 자신이 대신해서…”

    “죽겠다고 하겠지. 그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클라이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팔짱을 끼더니 근처의 나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엷은 물빛 눈동자가 나를 가늠하듯 훑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생각’이 선명하게 흘러들어왔다.

    이 천사를 믿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를 믿어도 괜찮은가? 한데 이 천사는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이 천사의 정체가 뭘까? 일리야를 도우려는 이유가 뭐지?

    “…….”

    이상했다.

    분명 클라이드는 약간 찌푸린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을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그의 생각이 선명하게 읽혔다.

    꼭 마법 동물들에게서 느끼는 심상처럼.

    그는 인물정보가 뜨지 않았다. 변칙적인 요소가 없다는 뜻이었다.

    한데 게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를 느끼고는 그에게 한 가지를 요청했다.

    “저기,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건 아는데요. 혹시 저랑 포옹 한 번만 해보실래요?”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진짜 맥락 없다… 이건 나도 쉴드 못 쳐줘;]

    클라이드는 내 요구에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저희가 포옹했을 때 뭔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냥 미친 천사였군.”

    “저 일리야 님과 각인 매칭률이 999퍼센트예요.”

    내 차분한 대꾸에 클라이드의 표정이 바뀌었다.

    “999퍼센트라고?”

    “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클라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선뜻 헛소리로 치부하지 못했다.

    나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미약하게 투덜거렸다.

    “그냥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돼요? 별로 어렵지도 않은 거잖아요.”

    그는 ‘뭐 이런 게 다 있지?’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대천사가 쪼잔하기는….”

    “방금 뭐라고 했지?”

    “얼른 끝내겠습니다.”

    나는 응징당하기 전에 클라이드의 품으로 쏙 들어가 안겼다.

    그리고 그 순간.

    “네게 키스하고 싶군.”

    ‘어?’

    머릿속으로 갑자기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억은 아주 가까운 때부터 빠르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잠시만 꿈꾸고 있거라.”

    “너는 테레제 스콰이어가 아니니까.”

    “오늘이 1월 31일이었군요.”

    “아내를 데리러 왔는데.”

    “받아라. 짐이 난생처음으로 여인에게 주는 꽃이니라.”

    .

    .

    .

    “테레제 스콰이어. 방학이 끝날 때까지 외출을 금한다.”

    빙의된 첫날까지 기억이 도달한 순간 나는 소스라치며 클라이드의 품에서 벗어났다.

    “허윽… 허억….”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구토증세까지 나타나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뒤늦게 클라이드가 이 기억을 같이 보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치들었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바로 깨달았다.

    ……봤구나.

    클라이드는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힘없이 읊조렸다.

    “여기는 꿈속이로군.”

    “…….”

    “나는 죽었고 일리야는 타락한 건가.”

    하하. 클라이드는 웃었다.

    “그 외골수가 그런 선택을 했다고?”

    그러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 미친 새끼가…!”

    클라이드의 슬픔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내 안을 뒤흔들었다.

    그는 일리야의 선택을 슬퍼했고 천계를 증오했으며 운명에 좌절했다.

    나는 동시에 눈물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등을 토닥여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내가 만들어낸 상황이었다.

    죄책감에 숨이 막혀 어지러웠다.

    더 날 괴롭게 하는 건, 클라이드의 생각과 감정에서 날 향한 원망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이 세계가 나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클라이드는 곧 눈물을 그치며 붉게 짓무른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침묵을 깬 건 클라이드였다.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했어. 내가 인간의 창작물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라는 것도, 이 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시나리오가 있다는 것도.”

    그래서 내가 죽고 일리야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나는 그의 생각으로 생략된 말을 읽어냈다.

    대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다른 BJ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적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정답을 알고 싶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원했다.

    방황하는 나와 달리 클라이드는 빠르게 담담해져 갔다.

    “이 모든 건 순리였군.”

    나는 결국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미안해요.”

    이런 사과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한심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결국 내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서 토해낸 말이었으니까.

    클라이드는 피식 웃었다.

    “뭐가 미안한데? 이 세계를 만들어서? 날 태어나게 해서? 일리야를 살리려고 해서? 집어치워. 네게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거 아니까.”

    “……네?”

    “네가 이 세계를 창작했을지언정 실제로 생성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안다고.”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오즈월드의 존재도 알아차린 건가?’

    클라이드가 설명했다.

    “네 기억 중 일부들은 아예 접근할 수 없었어. 다만 간접적으로나마 존재감은 느껴졌지. 이상한 자던데. 신이라기에는 세속적이고, 그렇지 않다기에는 너무 강해.”

    그때 빙의 초기 이후 지금껏 한 번도 존재감을 드러낸 적 없던 ‘혼돈악’ 성좌가 이 상황에 흥미를 보였다.

    띠링!

    [성좌 ‘혼돈악’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등장인물이 채널 관리자의 존재를 눈치채는 경우는 드문 일인데, 신기한걸?]

    띠링!

    [성좌 ‘질서선’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즈월드가 자유도를 높게 설정했거나 뭔가가 더 있다는 뜻이겠지.]

    띠링!

    [성좌 ‘혼돈악’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어쨌든 이 BJ가 꽤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건 알겠어.]

    그때 클라이드가 말했다.

    “한 가지 알아볼 게 있으니까 따라와.”

    그러면서 턱짓으로 마을 쪽을 가리켰다.

    마을은 대천사 클라이드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날 믿고 있구나.’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는 페가수스에게 근처에 있으라고 말한 뒤 마을로 진입했다.

    클라이드는 그새 울음기가 싹 걷힌 얼굴로 마을을 두리번거리다가 지나가는 천사에게 물었다.

    “제이콥은 어디 있어?”

    “공방에 있겠지, 뭐. 옷 짓는 거 좋아하잖아. 근데 옆의 천사는 누구야? 새로운 식구인가?”

    “그런 거 아니야.”

    클라이드는 날 데리고 공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척 봐도 정신 사나운 차림새의 남성체 천사가 열심히 옷을 만들고 있었다.

    “제이콥.”

    이름이 불린 제이콥이 의아하게 우리를 돌아보았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날 보고 몹시 충격받은 표정을 짓더니 난데없이 청혼했다.

    “드디어 제 운명의 상대를 찾은 것 같군요. 아름다운 천사여,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거절은 클라이드가 대신했다.

    “닥쳐.”

    따악!

    강력한 딱밤도 함께였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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