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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46화 (147/277)
  • 146화

    나는 속으로 한숨지었다.

    ‘어쩐지 테스트하기 전부터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어.’

    델리오스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각인할 상대를 찾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일리야 님.”

    그러나 일리야는 이토록 뛸 듯이 기뻐하는 델리오스에게 냅다 찬물을 끼얹었다.

    “나는 각인할 생각 없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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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내 세상이 무너졌어]

    동시에 성좌들에게도 찬물을 끼얹어버린 듯했다.

    마린은 입술을 말아 물고서 눈치를 보고 있었고, 나 역시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고 싶어서 은근슬쩍 어설프게 소파에 걸터앉은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사실 일리야가 각인을 거부하는 건 시나리오대로라서 이럴 줄 알고 있었다고.’

    델리오스는 절망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슬금슬금 사건의 중심에서 멀어지려는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귀에 대고 시끄럽게 윽박질렀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일리야 님께 당장 각인하자고 해야죠! 당신한테 이런 천금 같은 기회가 또 올 줄 아십니까?! 대천사의 반려가 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영광인지, 당신 앞날에 어떤 꽃길이 깔리게 될지 모르겠어요?!”

    어우… 귀 축축해지겠네.

    나는 최대한 겸허하고 순종적인 태도로 말했다.

    “저는 일리야 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절대 내가 하기 싫은 게 아니다.

    난 상관의 뜻에 따르는 착실한 하급 천사라고.

    내 완벽한 회피에 델리오스는 게거품을 물기 직전의 표정으로 파들파들 떨었다.

    “이,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데…!”

    뭐, 이게 그냥 꿈이었다면 나도 거리낌 없이 각인을 수락했을 것이다.

    어차피 꿈에서 깨면 없어질 일이니까.

    다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현재 일리야는 인물정보창이 뜨는, 현실의 일리야가 빙의된 상태였다.

    그런 일리야와 각인할 수는 없었다.

    나는 천사가 아니기에 영혼의 결속을 벗어날 수 있다.

    하나 일리야는 혼자서 짝을 잃은 천사로 남아 영원히 다른 누군가를 반려로 맞이할 수 없게 된다.

    ‘잔뜩 기대하는 델리오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차피 꿈속이니까.’

    현실의 천계는 이미 존경하는 통치자를 잃고 난 이후였다.

    일리야는 이걸로 일단락됐다는 듯이 상황을 정리했다.

    “마린은 매칭률이 높은 천사가 내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더 알아보도록.”

    “알겠습니다.”

    “테레제만 남고 다들 나가봐라.”

    델리오스는 떠나기 전 내게 악당처럼 속삭였다.

    “두고 보십시오. 당신은 일리야 님과 각인하게 될 겁니다.”

    띠링!

    [성좌 ‘예비 사위 일리야’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델리만쥬 아군으로 판명]

    델리오스와 마린이 떠나고 둘만 남은 집무실에는 불편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니, 나만 지금의 분위기가 불편한 거 같았다.

    일리야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본인의 업무용 책상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에 내게 말했다.

    “잠시 소란스러웠군. 다시 책에 집중해라.”

    “네.”

    나는 후다닥 자리가 빈 소파에 앉아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휴. 뭐라도 신경을 분산할 게 있어서 다행이다.’

    “…음?”

    그런데 왜 책 내용이 익숙하지?

    뒤적뒤적.

    역시나 더 뒤져봐도 다 아는 내용이었다.

    설마 다른 책도 그런가 싶어 확인해보니 마법에 관련된 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쓰여 있었다.

    ‘하긴. 질적인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종족이 사용하는 마법의 근본은 같으니까 당연한 일인가?’

    그나마 내가 모르는 내용은 백마법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천계의 역사나 각 기관에서 하는 일 같은 게 쓰인 책도 대충 보고 말았다.

    ‘좀 더 디테일할 뿐이지 우리 팀에서 짠 설정이랑 똑같네.’

    그렇게 이 책, 저 책 빼고 나니 남은 책은 고작 5권 정도였다.

    ‘이 정도는 가뿐하지.’

    “……?”

    그때 문득 날 향한 진득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서류를 보고 있는 줄 알았던 일리야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치워버린 책과 따로 빼놓은 5권의 책을 눈으로 훑더니 물었다.

    “저 책들은 전부 내용을 아는 것 같고, 새로 익혀야 할 다섯 권의 책은 천사라면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백마법에 관한 거로군.”

    귀신 같은 눈치였다.

    “그런 건 아니고, 이 책들부터 읽고 싶어서요.”

    그때 내 옷이 검붉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흰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고 상의는 한쪽 끈이 타서 아래로 스르르 흘러내리려 했다.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서둘러 마법을 사용했다.

    “…그만! 복원되어라.”

    옷은 도로 원래의 형태를 찾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황당함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는 태연하게 지껄였다.

    “상대의 마법을 파훼하고 복원하는 것까지 가능하다면 지금의 책들은 전부 필요 없겠군.”

    ‘아무리 살갗을 태우지 않는 불이었다고 해도 그렇지, 마법 성취를 확인하겠다고 대뜸 옷에 불을 질러? 미친 건가?’

    딱!

    일리야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가 빼놓은 다섯 권의 책을 제외한 다른 책들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띠링!

    [퀘스트: 훌륭한 천사가 되기 위한 기본 소양 쌓기Ⅰ 완료]

    ▸보상: 다음 업무 진행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이어 새로운 책 한 권이 테이블 위에 생겨났다.

    “이 책까지 읽도록.”

    띠링!

    [퀘스트: 훌륭한 천사가 되기 위한 기본 소양 쌓기Ⅱ]

    ▸보상: 다음 업무 진행

    ▸실패: 재시험

    일리야가 지독한 성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알면 알수록 훨씬 지독했다.

    나는 깊이 반성했다.

    지금까지 일리야가 대천사와 대악마이기 전에 교수라는 종족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런 행동을 하는 데 붉은 하트가 3개나 된다고? 그거 분명 상대를 좋아하는 단계 아니었어?’

    호감도가 적용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현실의 일리야에게 대천사 일리야가 얼마나 영향받고 있는지 알아보면 좋겠는데.’

    내 노골적인 시선을 알아차린 일리야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눈을 마주쳐왔다.

    “내게 할 말이 있나?”

    “네.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

    “저랑 접촉했을 때 갑자기 몸에 이상이 있던 게 사라졌다고 하셨잖아요. 그 외에 다른 변화는 없으셨어요?”

    그건 원작에서는 없는 설정이었다.

    아마 그와 나의 미친 매칭률이 만들어낸 일 같은데, 꿈에서 깰 방법이 필요한 지금으로서는 함부로 넘길 수 없는 단서였다.

    “글쎄. 너를 안아 들기 직전까지 잠시간 일어난 일이어서 정확하게는 모르겠군.”

    “그럼 지금 다시 실험해보면 어떨까요?”

    내 적극적인 태도에 일리야가 미간을 좁혔다.

    “남성체를 유혹하는 방식이 독특하군.”

    “네? 아, 아니, 유혹이라뇨!”

    “아까도 내게 널 보면 끌어안고 싶다거나 키스하고 싶지 않냐고 묻지 않았었나?”

    “그렇긴 한데…!”

    당신 호감도가 정상적으로 반응하는지 확인해보려고 한 질문이었다고요!

    일리야는 골치 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문란한 천사를 중앙 본부로 들인 모양이군.”

    “네? 문란이라니, 제가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황당한 말에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되묻자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너.”

    허! 참나!

    너무 기가 막혀서 겁대가리 없이 주둥이가 또 열일하기 시작했다.

    “일리야 님은 여성체 천사한테 관심 없으시잖아요.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여지도 안 주시는 분이 저한테는 다르게 행동하는 거 스스로 못 느끼셨어요? 그래서 검증해보려고 한 말이었다고요!”

    “나에 대해 뒷조사했나?”

    또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요?!

    “제가 말실수했습니다. 이제 일하시는데 방해하지 않을게요.”

    나는 속으로 궁싯거리며 괜히 일리야를 등지고서 책을 펼쳤다.

    ‘나만 속 타지, 나만.’

    그를 등진 건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는 일리야의 낯짝을 보면 속에서 열불이 터질 것 같아 한 선택이었다.

    한데 그 순간 내가 모로 기대고 있던 소파 등받이와 옆구리 사이로 커다란 손이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기도 전.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뒤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소파로 옮겨 앉은 일리야의 무릎 위였다.

    일리야가 내게 말했다.

    “한 번만 기회를 줄 테니 하고 싶은 걸 해봐.”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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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면 내가 미쳐 안 미쳐?!?!!]

    나는 황당함으로 입을 떡 벌렸다.

    그의 생각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게 없는데 뭘 하라는 거야?’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된 거, 그의 상태를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데 그걸 어떻게 확인하냐고.

    ‘일단 목장에서처럼 안아볼까?’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까처럼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요?”

    “…….”

    “일리야 님?”

    목장에서처럼 그는 또 말이 없어졌다.

    의아하게 상체를 살짝 떨어뜨려 그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타락하기 전의 외형이라 밝은 녹색 눈동자가 평소와는 다른 온도로 날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꼭 잡아먹힐 것 같았다.

    신념으로 이루어진 녹색의 눈빛은 누구보다도 단단하고 강인했다.

    가진 모든 능력은 천계에 헌납하여 개인의 행복 따위는 전부 걷어차 버린 외골수.

    누군가는 답답하다고, 차갑고 냉혈하다고 말하겠지만. 난 내가 가질 수 없는 단단함과 강인함을 지닌 일리야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신이라면 틀림없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창조물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그에게 닥쳐올 끔찍한 불행이, 평생을 믿고 지켜온 신념이 부서질 순간이 걱정되었고 안쓰러웠다.

    나는 그의 단단한 뺨을 쓸었다.

    ‘어차피 여긴 꿈이잖아.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천계를 버리고 당신과 클라이드 둘이서 도망치라고 하고 싶었다.

    깨어나면 바뀐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덧없는 꿈일지라도.

    ‘몽마의 꿈은 현실에도 영향을 주지만, 결국 그 영향이라는 건 감정에 대한 부분이야.’

    꿈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바꿀 수는 있어도 일어난 사건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야 시나리오가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상이라도 좋으니 일리야에게 잠시간이라도 안식이 존재하길 바랐다.

    일리야는 제 뺨을 부드럽게 쓸던 내 손을 감싸 쥐더니 휙 잡아당겼다.

    “!”

    상체가 앞으로 쏠리며 그와 코끝이 살짝 맞닿았다.

    놀라서 살짝 거칠어진 호흡이 섞였다. 상대의 숨이 닿은 입술이 저릿했다.

    섣불리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네 말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일리야가 뜬금없는 말을 해왔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뭐라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입술을 달싹였다.

    “…어떤 말이요?”

    그가 대답했다.

    “네게 키스하고 싶군.”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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