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나는 관리실을 나가 페가수스들을 살펴보는 일리야에게 다가갔다.
그는 천사나 인간에게는 그토록 가혹한 주제에 동물에게는 몹시 관대한 편이었다.
페가수스들이 장난을 쳐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전부 받아주었고, 날뛰다가 다른 페가수스와 부딪칠 뻔한 걸 엄청난 완력으로 가뿐히 막아주기도 했다.
“진정해라.”
그리고는 고작 그 정도 충고만 할 뿐이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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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차갑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타입]
페가수스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금방 장난칠 상대를 바꿨다.
문제는 페가수스들이 잔뜩 신이 나서 내게도 일리야에게 하던 것처럼 거칠게 장난을 걸어왔다는 점이었다.
푸르륵!
“으악! 잠깐만!”
내 나약한 몸뚱이는 페가수스가 퍼덕이는 날개에 맞았다간 척추가 똑 분질러지는 끔찍한 사고를 당할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서둘러 마력을 일으켜 피하려던 그때.
“그만.”
일리야가 특유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경고하자, 페가수스들이 자리에 우뚝 멈췄다.
푸르릉.
페가수스들은 신났던 기분이 좀 진정된 모양인지 내게 미안하다며 애교를 부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으니까 얼굴을 핥는 건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축축해진 뺨을 손등으로 닦으려는데, 일리야가 불쑥 손수건을 내밀었다.
뜻밖의 친절에 나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자선 파티 때 손수건으로 내 손에 떨어진 꿀을 닦아주려다가 꿀범벅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놀리는 투로 물었다.
“대천사님도 손수건 같은 걸 들고 다니세요?”
이런 건 귀족의 매너였지, 대천사가 지켜야 할 매너는 아니었다.
특히 일리야는 손수건이 있다고 해도 타인에게 빌려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일리야가 대답했다.
“안주머니에 있더군.”
“꼭 남의 물건처럼 말씀하시네요.”
“내 물건이 아니니까.”
일리야가 이렇게 농담을 잘하는 성격이었나?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그게 무슨 소리…”
그리고 손수건을 본 순간 웃음이 멎었다.
‘내 손수건이잖아.’
정확하게는 신전 자선 파티에서 일리야에게 선물한 손수건이었다.
그건 다시 말해서 대천사 일리야가 갖고 있을 수가 없는 물건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내 표정을 본 일리야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통은 한 번도 경험하기 어려운 생사의 고비를 벌써 몇 번이나 넘기면서, 내 직감은 날이 흐를수록 날카로워졌다.
더 나아가 한 번씩은 나조차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예지에 가까운 직감이 발휘되기도 했다.
아주 작은 단서 하나만으로도 위기를 읽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였다.
‘인물정보.’
꿈속의 일리야는 허상이었다.
실존하는 인물로 판단되지 않기 때문에 인물정보가 뜨지 않아야 했다.
▼
[일리야 번스타인]
나이: 30세
키: 194㎝
생일: 1월 31일
좋아하는 것: 침묵, 책, 연구
싫어하는 것: 소란, 무지, 천족
호감도: ♥♥♥♡♡
▲
한데 인물정보가 떴다.
심지어 현재 대천사인 일리야의 정보가 아닌, 교수일 때의 인물정보였다.
“교수님?”
“?”
일리야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교수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걸 보니 현실의 기억은 없는 거 같아.’
혹시 단순히 인물정보 창이 잘못 뜨는 오류일 가능성은?
‘없지는 않아. 하지만 그런 오류가 있다면 오즈월드가 시스템 오류를 복구 중이라는 식의 창을 띄웠을 것 같은데.’
그 말인즉 현 상황을 오즈월드도 인지하고 있다는 뜻.
나는 정말 하기 싫은 가정을 떠올렸다.
혹시, 나처럼 일리야도 현실의 육신을 가진 채 꿈에 빙의된 상태라면?
“…….”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쪽으로 직감이 확 꽂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오즈월드가 이 상황을 묵인하고 있다는 거야.’
설령 오류로 인해 [일리야 교수]와 [대천사 일리야]가 결합 되었다고 해도 오즈월드가 조치해줄 것 같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떨고 있군.”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들자 일리야가 눈짓으로 내 손을 가리키는 게 보였다.
그의 말대로 난 언제부터인가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주 심각한 문제가 존재했다.
꿈에서 깨려면 일리야가 죽어야 했다. 하나 만일 그도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죽일 수 없다.
현실의 그가 죽을 테니까.
“제가요? 아니에요.”
나는 뻣뻣하게 웃었다.
꿈속에서 섭취하는 음식물로는 육신에 실제로 영양분을 공급해주지 못한다. 물을 마셔도 수분이 채워지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현실의 시간은 대략 3일 정도.
다행스러운 건 꿈속의 시간이 현실보다 훨씬 느리게 흐른다는 점이었다.
게임에서 설정하기로 이 꿈속에서의 한 달이 현실의 1시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여유 부릴 시간이 있는 건 아니야.’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으니 일리야가 말했다.
“문제를 숨기고 싶다면 행동부터 검열하는 쪽이 좋겠군.”
“…네.”
그는 거기까지만 지적할 뿐, 문제가 뭐냐고 캐묻지 않았다.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여전히 그에게 선물했던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수건 돌려드릴게요.”
일리야는 손수건을 받아 제복 안주머니에 집어넣더니 돌연 내게 안기라는 듯이 팔을 벌렸다.
“…?”
왜 저러지?
갑작스러운 스킨쉽 요구에 당황할 때였다.
“본부로 돌아간다고 했을 텐데.”
“아.”
내게는 날개가 없었으니 일리야에게 안겨서 이동해야 했다.
‘말로 설명해주든가. 민망하게 엉뚱한 착각을 했잖아.’
그래도 민망한 오해 덕분에 방금까지 나를 짓누르고 있던 심각한 기분이 다소 옅어지긴 했다.
나는 다리가 바들거리도록 발뒤꿈치를 높게 들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렇지 않으면 키 차이 때문에 제대로 안길 수가 없었다.
한데 한참 안겨 있어도 일리야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안긴 자세인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일인지 의아해졌다.
“대천사님?”
저, 이 자세 유지하기 힘든데요.
내가 부르니 일리야는 그제야 느릿한 동작으로 날 안아 들었다.
‘뭐였지?’
왜 그가 가만히 멈춰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얼굴을 힐끗 확인했으나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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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사라진 게 신의 한 수였구나]
중앙 본부에 도착하자 경악한 시선이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왜 일리야 님이 하급 천사를 안아 들고 오셨지?’라는 의문을 품은 눈빛들이었다.
일리야는 그런 시선들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날 안아 든 채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저 걸을 수 있는데요…?”
날개가 탄 거지 다리가 없는 게 아닌데 왜 날 안은 채로 움직이는 거야?
“네 짧은 다리로 내 걸음에 맞추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다.”
“…….”
잠재적 생명의 은인도 못 알아보고 말을 함부로 하시네?
일리야는 본부의 중앙 통로에 서서 위로 휙 쏘아지듯 날아올라 최상층에 발을 딛고 섰다.
그가 향한 곳은 본인의 집무실이었다.
문을 열고 집무실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일리야는 날 바닥에 내려주었다.
철컥.
문이 닫혔다.
일리야는 날개를 감춘 후 소파에 앉으며 내게 옆자리를 권했다.
“여기 앉도록.”
“아, 네.”
나는 그제야 이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일리야는 하급 천사인 날 찾을 이유가 없었다.
설령 용건이 있다고 해도 출입 자체가 어마어마한 특권으로 취급되는 그의 집무실에 들인 건 확실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저를 왜 데려오신 건가요?”
“중앙 본부 어디에도 네 수준으로 일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 하지만 난 널 여기로 발령시켰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나를 중앙 본부로 불러들인 이유를 설명해주려는 모양이네.’
그러고 보니 얼음 땅에 있을 때 황금빛 기둥이 하늘로 치솟는 광경을 본 적 있었다.
그 일과 일리야 사이에 연관이 있는 듯했다.
일리야가 말을 이었다.
“네가 눈에 거슬린다.”
“……네?”
“너의 불성실함과 자유분방함이 거슬려.”
나는 할 말을 잃고서 멍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렸다.
일리야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 설득된 듯 고개까지 주억거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혹시 거슬리는 게 아니라 다른 감정을 느끼신 게 아닐까요?”
“어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나는 직접 그의 상태에 대해 알려주었다.
“제가 예뻐 보이지 않으세요?”
“그런 것 같군.”
너무 쉽게 긍정하니까 당황스러웠다.
“…질문을 바꿀게요. 제가 다른 천사에 비해서 유독 특별해 보이세요?”
“어느 정도는.”
‘역시 호감도의 영향을 받고 있어!’
나는 조금 신나서 더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그럼 절 보면 끌어안고 싶으신가요? 키스하고 싶어진다거나.”
일리야가 미간을 찡그렸다.
“널 보고 욕정을 느끼냐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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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예비 사위 일리야’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네.]
“아니요!?”
이 천사가 무슨 애먼 소리를 하는 거야!
“욕정이 아니라 애정이 느껴지냐는 거죠! 사랑하면 그렇다잖아요.”
“난 그런 걸 느끼지 않는다.”
그의 단호한 말에 어이가 없었다.
“천사도 감정이 있는데 왜 못 느껴요?”
일리야는 날 바보 취급하듯 나직하게 한숨지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천사라 잘 모르는 모양이군. 천사는 원래 감정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종족이다.”
“그게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내 반박에 일리야의 한쪽 눈썹이 휙 들렸다.
“확실히 너는 교육이 필요하다.”
“예?”
교육이 여기서 왜 나와?
“곡괭이질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하는지 알려주시는 건가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빈정거렸는데 일리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게는 그 정도 교육이 적합하겠지만, 좀 더 수준 높은 가르침을 주고자 한다.”
“……예에. 무슨 교육인데요?”
라고 질문하기가 무섭게 내 무릎 위로 책이 한 권 툭 떨어졌다.
“<하급 천사용 마력의 질적 향상과 응용법>? 이걸 읽으면 되는 건가요?”
책을 읽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목도 흥미로웠고.
‘아오지탄광을 벗어나 책 읽기 업무라니. 완전 꿀이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을 때였다.
툭! 툭툭! 투두두두두두두두두둑!
한 권으로 끝난 줄 알았던 책이 와르르 소환되어 하반신을 뒤덮었다.
“다 읽으면 시험 칠 것이다.”
띠링!
[퀘스트: 훌륭한 천사가 되기 위한 기본 소양 쌓기Ⅰ]
▸보상: 다음 업무 진행
▸실패: 재시험
“…….”
혹시 여기 천계가 아니라 대학연구실이었나?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