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 *
슥슥.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고 재밌었던 페가수스 빗질하기 미션 막바지.
나는 찌뿌둥한 몸을 쭉 폈다.
“끄으으…… 됐다. 빗질 끝!”
띠링!
[퀘스트: 페가수스 빗질하기 완료]
▸보상: 다음 업무 진행
푸르릉!
페가수스들은 내 주위를 한가로이 거닐며 연신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빗질하기 전보다 털에 윤기가 차르르 흘렀다.
“델리오스가 늦네.”
퍼뜩퍼뜩 움직여서 다음 임무나 줄 것이지.
난 이 목장 섬에서 혼자 벗어나지도 못하는 신세라고!
‘콱 페가수스 타고 탈주할까.’
풀밭에 퍼질러 앉아 이제 다음 업무로 뭘 받게 되려나, 짧은 상상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사박사박, 풀 밟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긴 적갈색 머리칼의 여성체 천사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페가수스들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페가수스들은 대천사 정도 되는 고귀한 존재가 아닌 이상 이토록 잘 따르지 않는데. 놀랍군요.”
“그런가요?”
그녀는 내가 입은 옷과 흡사한 형태에 치마만 종아리까지 내려온 옷차림이었다.
‘중급 천사로군.’
이곳 목장의 관리자인 듯했다.
여자는 40대처럼 보였고 조금 무뚝뚝한 인상이었다.
하나 날 향한 시선에 약간의 온기가 스며있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었다.
“이름이 테레제라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네, 그렇습니다.”
여자가 미소 지었다.
“중앙 본부로 들어간 하급 천사가 당신이었군요.”
이 동네도 인간 사교계만큼이나 소문이 빠르네.
“여기는 중앙 본부에서 업무 지원을 올 만한 장소가 아닌데.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모양이죠?”
“뭐… 조금은요?”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선뜻 긍정하자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관리실에서 차라도 한 잔 들래요? 당신을 괴롭히고 싶어 하는 천사는 없을 거예요.”
나는 하늘을 확인했다.
어디에서도 델리오스가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함께 관리실로 들어갔다.
“내 이름은 비올레타예요.”
비올레타는 우리 팀에서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천사들은 쉽게 미소 짓지 않는데 이 천사는 잘 웃어. 감정표현이 능숙하고 자연스럽네. 마치 인간처럼.’
몰개성하기 짝이 없는 오만한 천사들 사이에 있기에는 상당히 수더분한 분위기의 천사였다.
게다가 관리실은 아늑한 분위기가 흘렀고 말려둔 마법 식물들로 인해 은은하고 좋은 냄새가 풍기는 곳이었다.
내가 멍한 시선으로 마법 식물들을 쳐다보자 비올레타가 설명했다.
“이 관리실을 사용하는 천사는 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자유롭게 취미 생활을 할 수 있죠.”
확실히 이 천사는 개성적이었다.
“멋진 취미네요.”
비올레타는 엷게 웃으며 자리를 권하듯 의자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차를 내릴 도구를 꺼내기 시작하며 말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다들 생산적이지 않다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거든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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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은 무례할 정도로 너무 직설적이군요.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정확한 감상이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매우 우월한 종족이라는 종교적인 믿음이 있었으나 설정을 짠 내가 볼 땐 그냥 덜떨어져 보였다.
쪼르륵.
찻물은 순식간에 우러나 좋은 향기를 풍겼다.
차에는 전혀 일가견이 없는 나라도 이 차가 상당히 괜찮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향이 좋아요.”
“다행이네요. 까다로운 페가수스들도 이 향기는 무척 좋아해요.”
비올레타는 중급 천사에 불과했지만, 마법 식물을 이용한 지혜로 페가수스들을 무리 없이 돌보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차를 홀짝홀짝 잘 마시니 비올레타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처럼 귀여운 천사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푸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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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의 손에 쥐어지는 합격 목걸이]
나는 비올레타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젖은 입가를 닦으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올레타는 쿡쿡 웃었다.
“칭찬에 약하군요?”
“그게… 아마도요.”
정확하게는 칭찬에 약한 게 아니라 귀엽다는 말에 면역이 없었다.
곤란하게 미간을 긁적이고 있을 때, 갑자기 관리실 문이 벌컥 열렸다.
‘델리오스인가?’
나는 들어온 천사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자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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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드 사용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천사였었나?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포스 있네 ㄷㄷ]
‘당연히 포스 있겠지. 군사경찰대장이니까.’
비올레타는 갑작스럽게 천계에서도 손꼽히는 거물이 등장하자, 당황하며 날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카리 님을 뵙습니다.”
자카리는 기계적인 반응을 보인 후에 날 쳐다보았다.
영 예감이 좋지 않은데.
“그쪽이 하급 천사 테레제인가?”
“그런데요…?”
처컥!
대답하기 무섭게 자카리가 손에 쥔 금빛 진압봉을 펼쳤다.
“전산 오류로 폐기 대상 천사가 중앙 본부에 발령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따라오도록.”
“네? 천계에 무슨 전산 오류가 나요!”
나의 항의에 자카리가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렸다.
‘상대를 귀찮아할 때 그러는 거, 다 알거든?’
“나는 본부의 지시에 협력하는 것뿐이다. 명령을 따르지 않을 시 현장에서 즉결 처분할 수 있으니 얌전히 따라와라.”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야, 이렇게 끌려가는 건가?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을 때였다.
“누가 그런 보고서를 올린 거지?”
그때 새로운 인물이 난입했다.
관리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휙 쏠렸다.
빛을 등지고 서서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커다란 몸집.
옮기는 발걸음에 따라 서서히 선명하게 비치는 대천사의 제복.
상대는 나만큼이나 머리카락이 새까맸고 기억보다 밝은 녹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대천사, 일리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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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대천사 일리야는 머리 풀고 있잖아? 날 벌레 보듯 쳐다볼 것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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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랑 눈동자 색이 교수일 때랑 달라 보이네? 대악마가 되면서 좀 달라졌나 보다]
나는 일리야를 확인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환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 보려나 했던 반가운 얼굴을 마주해서 하마터면 ‘교수님!’하고 그에게 달려갈 뻔했다.
하나 지금의 일리야는 교수가 아닌 대천사였다.
지금 우리는 초면이라는 뜻이었다.
내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애매해졌다.
자카리는 갑자기 나타난 일리야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진압봉을 아래로 내렸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일리야가 내게 시선을 던졌다.
“저 하급 천사에게 볼일이 있다.”
이번에는 일리야에게 쏠려있던 시선이 내게 몰렸다.
일리야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천사의 발령은 내가 직접 지시한 내용이다. 누군가가 공문서를 조작한 게 아니라면 내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일을 벌였다는 뜻이겠지. 조사해라.”
그의 말에 외려 놀란 쪽은 나였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중앙 본부에 온 게 일리야 때문이었어? …왜 그런 거지?’
의아함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 사이 자카리는 진압봉을 아예 집어넣고 고개 숙였다.
“즉시 착수하겠습니다.”
금방이라도 날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하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깔끔한 태도였다.
이런 지나친 충성스러운 태도 때문에 천계에서도 자카리를 두고 ‘본부의 개’라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었다.
“…….”
“…….”
“…….”
관리실에는 이제 나, 비올레타, 일리야 세 천사가 남게 되었다.
먼저 행동한 천사는 비올레타였다.
“중급 천사 비올레타입니다. 대천사 일리야 님을 뵙습니다.”
나도 뒤이어 일리야에게 예를 갖추었다.
일리야는 우리를 향해 고개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만 빤히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투 때문인지 나를 추궁하는 것 같은 물음이었다.
비올레타도 별반 다르지 않게 느낀 모양인지 나를 변호해주었다.
“아직 천사 테레제에게 다음 업무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 제가 차를 내어주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일리야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비올레타에게로, 그리고 말려둔 마법 식물과 찻잔으로 이동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 닿았다.
“본부로 돌아가지. 비올레타라고 했던가? 관리실 안에 있는 것들은 다 치우도록.”
그건 곤란한데.
내 주둥이는 개기면 안 되는 대상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멋대로 움직였다.
“그러면 페가수스를 돌보는 일이 어려워집니다!”
비올레타는 몹시 놀라며 날 만류하듯 붙들었다.
“죄송합니다. 내부는 확실하게 치워두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급 천사이니 부디 선처해주십시오.”
하지만 이제 와 만류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방금보다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덧붙였다.
“페가수스는 중급 천사의 능력으로 수월하게 돌보기 어려운 마법 동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상급 천사도 어렵다고요.”
델리오스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기 비올레타는 마법 식물을 이용해 까다로운 페가수스들을 훌륭하게 돌보고 있습니다. 만일 마법 식물을 치우게 된다면 일의 능률이 떨어지게 될 겁니다.”
“그래서?”
“관리실 내 마법 식물 반입을 허가해주시면 안 될까요?”
설명에 덧붙이진 않았지만, 비올레타는 종일 페가수스와 함께 이곳에서 고립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차 한잔 즐길 수 없는 환경은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일리야의 시선이 내 얼굴 위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또 그러는군.”
“네?”
뭘 또 그런다는 거지?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진작 보고서로 작성해서 상부에 해당 방식을 알렸어야 했다. 이는 아직 ‘업무’로 분류되지 않은 행위이기에 개인의 일탈이나 다름없지. 처벌 대상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생각하기는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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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사죄하니까 일리야 표정 약간 이상해진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표정이 이상해졌다고?’
나는 얼굴을 확인하려고 아래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빼꼼히 올렸다.
하나 시선이 미처 얼굴에 닿기도 전, 그가 뒤돌았다.
“들었으면 보고서로 작성해서 제출하도록.”
비올레타는 뒤늦게 자신에게 한 말임을 알아듣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예를 갖추었다.
“예, 일리야 님. 관용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어정쩡하게 허리를 폈다.
‘오… 대화가 통하네?’
관용이라니. 그건 일리야와 세상에서 제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
어쨌든 잘 됐다.
“감사합니다, 일리야 님!”
내가 활짝 웃으며 인사하자 밖으로 나가던 일리야가 멈칫하더니 날 향해 고갯짓했다.
“따라 나와라.”
“네!”
나는 부리나케 뒤를 쪼르르 따르다가 비올레타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동시에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테레제.”
“별말씀을요. 차 잘 마셨어요.”
어쩐지 이제부터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