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솔직히 내 정리 실력은 꽝이다.
그랬기에 적당히 할 생각이었는데 꿈에 들어온 이후 내내 잠잠하던 퀘스트 창이 떴다.
띠링!
[퀘스트: 비서실 청소]
▸보상: 다음 업무 진행
▸실패: 능력 증명 실패로 폐기
“…….”
정리 좀 못했다고 폐기행이라니?
폐기는 사망이잖아!
델리오스가 떠나고 나만 덩그러니 남은 사무실은 꽤 절망적인 풍경이었다.
서류 무덤과 온갖 물건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어떤 규칙으로 정리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내게 휙 맡기고 떠난 것은 명백히 직장 내 괴롭힘이었다.
나는 갑갑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어쨌든 정리하기는 해야 하는데…….”
정리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
2.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종합함.
3. 문제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을 줄이거나 없애서 말끔하게 바로잡음.
뭐야, 간단하잖아.
“이걸 다 없애버리면 되는 건가?”
띠링!
[성좌 ‘프로훈수러’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되겠냐?]
쳇.
“천사라는 놈들이 정리 정돈도 제대로 안 하고 말이야. 일이 바쁘다는 핑계는 누가 못 대? 인간보다 훨씬 우수한 종족으로 설정해뒀는데 이 정도는 마법으로 간단히 치울 수 있잖아.”
나는 궁싯거리며 아무도 없는 비서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비슷하게 생긴 것끼리 뭉쳐두면 되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바닥에 굴러다니는 타자기도 아무 책상 위에나 올려두고, 벽에 꽂힌 깃펜도 뽑아서 펜꽂이에 꽂아두고.
폭격당한 19세기 유럽 신문사 같은 풍경은 대충 강풍이 불어닥친 사무실 정도로 정리되었다.
“이 정도면 깨끗하네.”
하급 천사의 능력으로 이만큼 했으면 열심히 한 거다.
하지만 퀘스트 완료창은 뜨지 않았다.
띠링!
[상점에 입고된 상품이 있습니다.]
이런 타이밍에 입고되는 상점 아이템은 무조건 도움이 되는 거였다.
“상점.”
▼
[상점]
▹소원권 [1,000,000,000코인]
: 어떤 소원이든 1회 들어준다.
▹정리벽 [5,000,000코인]
: 엄청난 정리 정돈 능력이 생긴다.
▲
“[정리벽] 구매.”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후원금이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해보지 않았다.
‘그동안 워낙 많은 일이 터져서 정신이 없었으니까.’
“방송 설정.”
▼
[방송 설정]
채널명: BJ악역영애
채널 등급: 플래티넘
채널 순위: 37위
후원금: 81,156,000코인
▲
“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성좌들이 채널의 흥행에 감탄합니다.]
띠링!
[성좌 ‘성적충’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테레제 월드클래스 아닙니다. 유니버스클래스입니다.]
띠링!
[성좌 ‘방송 천재 테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보통 50위가 순위 정체 구간인데 고속으로 뚫어버렸죠?]
성좌들은 축배를 드는 분위기였으나 정작 나는 심드렁했다.
‘그러면 뭘 해. 정리 하나 못한다고 바로 사망 위기에 처하는 처지인데.’
[정리벽]이라는 새로운 스킬도 생겼으니 어디 주변을 둘러볼까?
“……우욱.”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내 기준에서는 나름 괜찮아 보였던 사무실 꼴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이딴 돼지우리에서 어떻게 살아? 정신이 혼미해졌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꼴을 한 사무실을 보자 움직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새롭게 정리를 시작했다.
과연 500만 코인이나 들인 스킬답게 내 눈에 필요한 정보와 정리 방법이 읽혔다.
여기는 회의록만 꽂아두는 책장. 저기는 비품 선반.
폐쇄할 용지는 모아서 묶어두기. 반납할 자료는 북카트에 실어두기.
나는 일일이 마법으로 물건을 모으고 이동시키다가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마법 술식을 연구했다.
바로 청소 마법이었다.
그렇게 모든 정리를 마쳤을 때였다.
웅성웅성!
사무실 밖에서 천사들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치겠네. 그만한 물량은 또 언제 확보합니까?”
“하라면 해야지.”
“일할 천사 수가 너무 부족하다고요. 이번에 또 최상급 천사 하나가 추방당한 거 들으셨어요? 이대로라면 중앙 본부에 천사가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별수 있나. 어쨌든 그만큼 성과가 나오고 있으니까.”
“제발 천사 하나만 더 추가된다면 좋을 텐데……, 누구십니까?”
천사들은 비서실에 들어오자마자 동시에 나를 보더니 의아하게 정체를 물었다.
예전이었다면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을 상황인데 데육시 던전을 다녀온 이후로는 갑작스러운 시선에도 딱히 아무렇지 않아졌다. 무뎌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기로 한 테레제입니다.”
“테레제? 그런 이름의 상급 천사는 처음 듣는…….”
천사들은 일제히 내 옷차림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들은 심한 모욕을 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급 천사가 어떻게 중앙 본부에 있지?”
“델리오스 님이 여기를 정리하라고 하셔서요.”
“델리오스 님이?”
천사들은 미심쩍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심결에 감탄했다.
“크흠.”
하나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본심을 감췄다.
하급 천사의 능력을 인정해주기 싫다는 기색이었다.
띠링!
[퀘스트: 비서실 청소 완료]
▸보상: 다음 업무 진행
퀘스트 완료창이 뜨자 천사들의 뒤쪽에서 어디론가 사라졌던 델리오스가 재등장했다.
델리오스는 한껏 호통칠 준비를 마친 표정이었다가 비서실을 둘러보더니 푸시시 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네요. 할 일이 더 있으니 따라오십시오.”
위엄을 부리는 모습이 어쩐지 일리야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델리오스가 날지 못하는 나를 대롱대롱 손에 들고 날아가 내려준 곳은 전체가 목장으로 이루어진 한 섬이었다.
천계에 웬 목장인가 싶겠지만, 천사들은 인간과 달리 마법 동물을 기를 수 있었다.
이곳은 페가수스로 이루어진 목장이었다.
‘페가수스는 날개가 달린 말인데 따지고 보면 목장이 아니라 새장이 필요한 거 아닌가?’
물론 전부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새장을 만들기가 어려울 것 같기는 하지만.
델리오스는 어딘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내게 턱짓했다.
“페가수스들의 털을 빗질해두십시오. 두렵다면 그만둬도 좋습니다만, 이외에는 시킬 일이 없으니 그때는 알아서 본부를 나가줘야겠습니다.”
띠링!
[퀘스트: 페가수스 빗질하기]
▸보상: 다음 업무 진행
▸실패: 능력 증명 실패로 폐기
나는 심드렁하게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뭘 두려워해야 한다는 거야? 페가수스의 털을 빗질하는 게 사망보다 두려울 일인가?’
실제로 페가수스를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두려운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외려 아름답고 신비로운 외관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빗은 어디에 있어요?”
내가 묻자 델리오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객기부리지 마십시오. 하급 천사가 페가수스를 어떻게 상대하려는 겁니까? 페가수스는 중급 천사 이상의 마력만 먹이로 먹습니다. 하급 천사는 접촉하려는 것만으로도 뒷발에 차여…!”
델리오스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푸르릉!
“예? 뭐라고요?”
갑자기 멀리 떨어져 있던 페가수스들이 몰려와 내게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다투어 쓰다듬어 달라고 떼를 쓰는 페가수스들을 진정시켰다.
“얘들아, 그렇게 서로 밀치면 안 돼. 씁. 애교 부려도 소용없어.”
델리오스는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뭡니까, 지금…? 얘들이 왜 이러는 거죠?”
“저도 모르겠는데요? 페가수스가 원래 애교가 많은가 봐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페가수스는 상급 천사도 등한시하는 고등 생물인데!”
나는 페가수스가 뺨을 핥으려 드는 걸 막으며 되물었다.
“예? 등한시한다고요?”
델리오스는 거의 바람피우는 연인을 발견한 표정으로 나와 페가수스를 번갈아 보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띠링!
[성좌 ‘하하버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어서 와 테레제 월드는 처음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서야 한 마리씩 제대로 빗질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아, 그래서 두려우면 그만두라고 하셨구나?”
내 말에 델리오스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띠링!
[성좌 ‘사이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테레제는 참지 않아]
지금까지 짐짓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태도를 고수했던 델리오스가 거의 이를 갈 듯이 내게 경고했다.
“…아무튼 잔말 말고 시킨 일이나 잘해두십시오.”
푸르륵! 푸르르릉!
그러자 페가수스들이 홰치듯 날개를 활짝 펼치며 델리오스를 향해 위협적인 콧김을 내뿜었다.
나는 페가수스들을 달랬다.
“워워. 진정해. 저 천사 나쁜 천사 아니야.”
“허!”
델리오스는 날 노려보더니 상대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목장을 떠났다.
페가수스들의 기세에 짓눌려 도망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맘씨를 곱게 써야지.
“성질 참 고약하네. 쯧쯧. 그렇지, 얘들아?”
푸르릉!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페가수스를 쓰다듬어주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업무가 수월하기는 한데, 이래서 언제 일리야를 만나지?”
이곳은 정확히 말해서 ‘일리야의 꿈속’이었다.
그러니 일리야가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나는 현실로 돌아가지 못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릴리트와 대치 중이겠지.’
[성좌들이 꿈에서 깨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합니다.]
“일리야가 저를 꿈에서 꺼내주거나 제가 깨워야죠.”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당연히 플레이어가 직접 활동해, 꿈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했다.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하나.
“일리야를 죽여야 해요.”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