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138화 (139/277)

138화

21. 천계의 쌍둥이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세상과 반쯤 분리된 듯한 기묘한 감각.

현실인지 꿈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상태로 느릿하게 시선을 움직여 주변을 확인했다.

내가 밟고 선 지면은 아주 작은 규모의 섬이었다.

그것도 공중에 떠 있는 섬.

이런 창공에 뜬 섬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곳곳에 존재했다.

섬의 끝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대한 대지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제작된 맵이었으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갑자기 천계 에피소드 시작이라니.”

원래는 게임 후반부에 진행되는 에피소드였다.

여기는 던전과 시스템이 달랐다.

던전은 주어진 퀘스트를 해결한 후 숨은 악마를 죽이고 현실로 돌아갈 수 있지만, 이곳은 꿈속이었다.

하나 릴리트의 힘으로 생성한 꿈의 세계는 좀 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과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성좌들이 채널 관리자-오즈월드가 제공한 릴리트의 꿈 설명을 확인했습니다.]

[‘일리야’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이번 에피소드에 기대감을 드러냅니다.]

띠링!

[성좌 ‘로맨스극혐’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근데 여기는 어디임? 천계라면서 뭔가 좀 기괴하네]

이곳은 ‘천사 선별소’였다.

막 태어난 천사의 등급을 분류해 천계 곳곳에 배치하여 적재적소에서 쓰임을 다하도록 1차 판별하는 시설이었다.

그리고 나는 현재 갓 태어난 천사가 되어 있었다.

오와 열을 맞춰 줄지어 선 천사들은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물건처럼 앞으로 척척척 걸어갔다.

정면에는 위로 거대하게 치솟은 네 개의 마법 게이트가 있었다.

게이트 앞에 가로로 쪼르르 앉은 제복을 입은 천사들이 단순한 천 쪼가리만 걸친 우리를 평가했다.

“하급.”

“중급.”

“하급.”

“하급.”

“폐기.”

“하급.”

천사들은 자신이 받은 등급에 따라 게이트로 진입했다.

계급에 맞는 장소로 이동되는 것이다.

내가 주변을 보느라 잠깐 멍하니 있자 천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감시관이 차갑게 명령했다.

“앞으로 이동해라.”

나는 딱 한 사람이 설 만큼 비어있는 틈으로 한 발짝 이동했다.

천사들은 대부분 가장 끝 게이트로 보내졌다. 하급이 이동하는 장소였다.

어쩌다 간혹 그 바로 옆으로 이동되는 천사도 존재하기는 했다.

하나 가장 왼쪽에 있는 게이트와 그 옆의 게이트로 보내지는 천사는 아직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최상급과 상급 천사가 들어가는 게이트였다.

그렇다고 해서 최상급 천사가 계층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 위에는 소위 ‘대천사’로 분류되는 완전히 격이 다른 존재들이 있었다.

그래. 그게 바로 일리야였다.

대천사는 여성체와 남성체 천사가 인간처럼 육체적 결합을 통한 생식 활동으로 탄생한다.

고위 천사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그에 반해 여기에 널리고 깔린 천사들은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으로 탄생했다.

바로 천계수라는 나무의 열매로 태어나는 거다.

알처럼 생긴 열매가 무르익어 바닥에 떨어져 금이 가면 안에 잠들어있던 천사가 깨어나게 되는데, 이들은 하루 만에 성체까지 자랐다.

그렇게 성체가 된 천사는 여기 선별소로 보내진다.

선별을 위해 선 줄은 빠르게 앞으로 당겨져 곧 내 차례가 다가왔다.

게임을 정상적으로 플레이했을 때 리비는 최상급 혹은 상급 천사로 분류되었다.

과연 백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나는 어떤 등급을 받게 될까?

선별사가 내 측정값을 보더니 말했다.

“하급.”

…너무하잖아!

나는 즉시 아오지탄광이나 다름없는 천계의 낙후 지역으로 보내졌다.

* * *

계층 피라미드의 최상위에 속한 천사들의 공간인 빛의 탑.

가장 우수한 천사들만 선별되어 오는 이곳에서도 유독 특별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천계의 유일한 쌍둥이 형제였다.

쌍둥이는 역대 대천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타고났으며 개성도 뚜렷했다.

형 쪽은 그 누구보다 천사다운 냉혈함을 지니고 있었고 동생 쪽은 차라리 악마가 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희한한 성격이었다.

아무튼.

쌍둥이 중 형 쪽, 일리야는 우수한 천사의 행보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밟아나가고 있었다.

아니. 가장 앞서나갔다.

그는 천계를 다스리는 대천사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다.

그런 일리야가 유일하게 고개를 숙이는 존재는 고작 원로 천사들밖에 없었다.

사실상 천계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그런 일리야의 일상은 숨 막히도록 똑같이 진행되었다.

천사들이 다소 감성이나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해도 일리야만큼 지독하게 쳇바퀴처럼 사는 이는 없었다.

오전 5:00.

일리야는 화려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침실에서 눈을 떴다.

그는 일과를 언제나 같은 시간에 시작했다.

몸을 씻고 난 후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완벽하게 같은 색상과 형태의 정복이 스무 벌 남짓 걸려 있었다.

같은 구두, 같은 장신구까지 온통 복사해서 붙여넣은 듯한 광경이었다.

한구석에 예외적으로 다른 형태의 예복도 존재했으나 연중 두 번 입으면 많이 입는 옷이었다.

변수에 가까운 일정에 입을 게 필요해서 준비해둔 거였다.

몸단장이 끝나면 곧장 다이닝 룸으로 가서 식사했다.

오전 5:48.

그는 늘 같은 시간에 다이닝 룸에 도착했다.

달칵.

문을 열자 중급 천사가 식탁 위로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일리야 님.”

중급 천사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일리야의 등장에 맞춰 미리 접시 덮개까지 전부 열어둬야 했으나 오늘 주방에서 일어난 작은 사고로 인해 늦고 말았다.

일리야는 넓은 테이블 한가운데에 단 하나만 놓인 자리로 가서 착석했다.

그리고 식사했다.

오전 6:17.

식사를 마치니 평소보다 2분이 늦었다.

일리야는 입술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행 천사를 불렀다.

“델리오스.”

“부르셨습니까?”

그는 수행 천사가 다가오자마자 오늘의 첫 번째 업무를 지시했다.

“다이닝 룸을 관리하는 중급 천사를 다른 이로 바꿔라.”

“알겠습니다.”

오전 6:30.

일리야는 중앙 본부로 출근했다.

그곳에서 천계와 관련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일을 했다.

이외에도 여러 부서와 회의를 통해 천계를 운영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결정하고 해결했다.

오늘 안건은 북부의 얼음 땅에서 하급 천사가 너무 빠르게 소멸하는 문제였다.

“북부의 얼음 땅에서 하급 천사가 소모되는 속도가 극심합니다. 선별소를 쉴 새 없이 가동 중임에도 하급 천사 공급이 압도적으로 부족합니다.”

일리야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문제의 원인은?”

“며칠 새 차원의 균열이 더 커졌습니다. 팽창을 억제하는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합니다.”

“방법은?”

“상급 천사로 이루어진 팀을 배치해 억제기를 설치한 후 이상 없을 시 복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입니다.”

“출정은 누가 가기로 했지?”

“…….”

이번에는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방안을 준비해오지 않은 것이다.

“다시 묻겠다. 최상급 천사 벤. 출정자 리스트가 없나?”

“……죄송합니다. 근무표에 차질이 있어 아직 리스트 작성을 완료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오후 중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기어이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그것은 일리야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무겁고 싸늘한 침묵이 회의장을 짓눌렀다.

10초 정도의 적막이 흐른 뒤, 일리야가 말했다.

“얼음 땅은 내가 직접 가겠다. 자리를 비울 동안 의사결정은 원로원을 통해 내리도록. 다른 문제는 없나?”

“네, 없습니다.”

“그럼 회의를 끝내도록 하지.”

일리야는 회의를 끝낸 후 수행 천사 델리오스에게 오늘의 두 번째 지시사항을 말했다.

“위기 대책본부 팀원들을 조사 후 실적 기준치 미달인 자는 전부 좌천시켜라. 그리고 저 최상급 천사는 빛의 탑에서 추방해.”

추방이라는 말에 델리오스의 입매가 언뜻 경련했다.

빛의 탑에 들어올 수 없는 최상급 천사라니.

사실상 계급을 박탈당하는 거였다.

“알겠습니다.”

빛의 탑은 일리야의 가혹한 기준으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유례없는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최상급 천사의 수가 많지 않은데 일리야의 기준치에 적합한 자는 더더욱 적었으니까.

심지어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무자비했다.

하나 그만큼 그가 압도적인 능력으로 효율을 내고 있었으니, 일리야의 기준에서 무능한 자를 쳐내는 쪽이 천계에 더 큰 이득이 되었다.

따르는 수행 천사들만 과중한 업무로 죽어날 뿐이었다.

일리야는 북부로 가는 게이트 섬에 도착해 날개를 접었다.

게이트 관리자가 극진한 태도로 일리야와 델리오스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일리야 님. 델리오스 님.”

델리오스는 위엄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관리자는 천사 중에서도 상당히 상급에 속하는 위치였다.

그만큼 매우 거만했기에 보통 델리오스 같은 일반적인 상급 천사에게 고압적으로 굴었다.

하나 일리야를 수행하는 이들은 전부 등급과 상관없는 존경을 받았다.

천계를 이보다 더 융성하고 안전하게 만든 통치자와 지지자들이 여태껏 없었으므로.

델리오스는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며 게이트로 진입하는 일리야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일리야 님.”

그러나 정작 철혈의 통치자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지 무표정하게 게이트를 통과할 뿐이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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