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으악!”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너무 당혹스러운 상황에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왜 하필 이런 데로 떨어져서!’
일리야는 연구실의 업무용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방금 검은 나비 뭐였지? 누군진 모르겠지만 아군인 건 확실]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일리야는 펜을 내려놓고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동 마법을 연습 중이었나?”
‘그건 아니고 비전 마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나비 떼가 저를 여기로 데려다주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상한 말을 하는군.”
다행히도 일리야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는 왼쪽 서랍을 열어 웬 서류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마침 널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잘됐군. 받아라.”
“이게 뭔가요?”
“그건 펠릭스 교수가 설명해줄 거다.”
“네? 펠릭스 교수님이요?”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연구실 문이 벌컥 열리며 펠릭스 교수가 등장했다.
“다들 안녕…?”
늘 활기차던 펠릭스 교수는 오늘따라 죽을상을 하며 기운 없어 보였다.
그는 울적한 표정으로 소파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내가 차를 좀 타왔는데 마실래? 할 이야기가 있거든.”
나와 일리야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내가 왜 교수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게 된 거지?’
펠릭스 교수는 차를 쪼르륵 따르더니 우리에게 한 잔씩 건네주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법 식물을 키우는 온실에 문제가 생겼어. 그런데 하필 위치도 여기서 너무 가까운 곳이야.
“문제가 뭐죠?”
“고스트 마수가 나타났어. 사람의 형태인데 마법 식물을 죽이지는 않아. 하지만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더라구.”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 형태의 고스트 마수? 게임에서 그런 게 있었나?’
물론 마법 동물이든 마법 식물이든, 게임 전개상 필요해서 창작해낸 것 외에도 다양한 종이 존재했다.
그래서 내가 따로 도감을 읽으며 공부한 거였다.
하지만 어떤 도감에도 사람 형태의 고스트는 언급된 적 없었다.
새롭게 나타난 고스트인 모양인데,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온실에는 내 개인적인 연구를 위해 들여놓은 희귀 마법 식물이 엄청나게 많아서, 이대로 잃으면 내 교수 생활도 끝장이야! 흐흑!”
지나친 비관인 것 같았지만, 그만큼 펠릭스 교수가 매우 상심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펠릭스 교수가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마법 농원을 차린다면서? 내가 가진 희귀한 마법 식물 중에 원하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줄게! 제발 날 도와주지 않겠니?”
사실 그 문제 때문에 펠릭스 교수에게 도움을 구하려던 참이기는 했다.
“이번 일을 잘 처리해주면 내 강의 점수도 무조건 A+를 줄게. 어때?”
띠링!
[퀘스트: 펠릭스 교수의 고스트 마수 토벌 의뢰]
▸보상: 희귀 마법 식물 10종 이상 획득
▸실패: 펠릭스 교수 신뢰도 하락, 고스트 마수 개체 수 증가
‘실패 페널티가 너무 세잖아!’
내가 미간을 좁힌 채 심각한 표정을 짓자,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일리야가 입을 열었다.
“이 임무는 나도 함께할 예정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그렇지 않아도 클라이드가 악마에게 육체를 빼앗긴 상황이라.
어떻게 멤버를 꾸려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내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한 미소를 보이자 일리야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펠릭스 교수는 눈을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더니 곧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흐흠. 그러면 수락한 걸로 안다? 그럼 데이트… 아니, 마수 정화 잘하고 와!”
띠링!
[성좌 ‘주식 천재’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드디어 일리야 상승 기간인가?]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킷 단추를 잠갔다.
“출발하지.”
물론 위험한 마수가 나타나면 바로 출동해야 하는 건 맞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혹스러웠다.
“저랑 교수님 둘이서만 가나요?”
아무리 그래도 멤버를 몇 명 더 모집하고 떠나야 하지 않나?
일리야는 외려 내 말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나로 부족한가?”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러면 문제없군.”
그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았다.
“이동.”
* * *
테레제가 새까만 나비 떼에 뒤덮여 갑작스럽게 사라진 후, 악마는 열람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톡. 톡.
그는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드리더니 이내 어이가 없다는 양 웃어버렸다.
“번번이 예상을 빗나가네.”
자신이 아는 테레제는 분명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앵무새처럼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던 여자였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종종 이성이 나가 버릴 듯한 향기를 풍기기 시작하더니.
델브 던전에서 저 대신 죽을 때는 그녀의 존재감이 영혼에 각인될 정도로 압도되었다.
그런 건 처음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존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 가지고 싶은데.”
마침내 차지하게 된 자신의 육신으로 테레제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집어삼킬 기회가 찾아왔다.
방금까지 잠깐 접촉한 것만으로도 이토록 황홀한데.
그녀를 온전히 손에 넣게 된다면 얼마나 미칠 듯이 좋을까.
악마는 잔뜩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뱉었다.
“테레제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나비는 뭐였을까?
그는 즐거운 의문을 품으며 휘적휘적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거미줄처럼 기운이 발할라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 테레제를 찾기 시작했다.
한데 어디서도 테레제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불어 유일하게 제게 감지되지 않는 영역이 한 군데 발견되었다.
“…그 교수의 연구실인가?”
인간 클라이드가 육신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정보가 너무 둔하게 감지되었다.
딱 인간 클라이드가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의 정보량만 느껴진다는 뜻이다.
지금은 비록 성유물 때문에 본래의 힘을 거의 사용할 수 없지만, 감각만큼은 인간보다 월등히 우월한 악마의 것 그대로 깨어나 있었다.
그런 제 감각에 걸리지 않는 영역이라니.
악마는 굳어진 표정으로 일리야를 찾아갔다.
하나 연구실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일리야가 테레제를 데리고 이동 마법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 안에 있던 펠릭스 교수가 악마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 우리 학생회장! 으응? 오늘따라 굉장히 파격적인 모습인데?”
악마는 인간을 현혹시키는 웃음을 지으며 펠릭스 교수에게 물었다.
“일리야 교수님은 어디로 가셨죠?”
펠릭스는 아는 사실을 술술 불었다.
“어… 방금 테레제랑 둘이서 온실로 갔어. 거기에 고스트 마수가 나타났거든.”
“아아.”
그 순간, 악마는 갑자기 다른 장소에서 새까맣게 지워진 듯한 기운을 느꼈다.
‘마구간 쪽인가?’
이건 사실상 기운이 지워진 게 아니라 거대하게 몸집을 부풀리고 있는 거였다.
올 테면 와보라는 듯이.
자신은 여기에 있다고 친절히 알려주는 듯한 태도였다.
‘감히.’
악마는 인간처럼 걸어서 움직이는 걸 관두고 마력을 사용해 일리야가 있는 곳으로 단번에 이동했다.
일리야는 출발할 준비를 마친 마차에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테레제는 이미 마차에 탄 건지 가지런하게 모인 두 발이 보였다.
악마는 시선을 옮겨 자신을 쳐다보는 일리야와 눈을 마주쳤다.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악마였잖아?”
심지어 제 모친보다 더 강력한 마기를 풍기는 대악마였다.
저런 존재가 왜 인간으로 둔갑해서 교수 노릇을 하고 있었던 거지?
일리야는 악마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상황을 알겠다는 듯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교수님? 누가 왔나요?”
그때 마차 안에서 테레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밖을 확인하려는 듯 몸을 기울였으나 일리야가 손을 뻗어 저지했다.
“잠시 기다리도록.”
그리고는 마차 문을 닫은 뒤 악마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악마는 일리야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의 영혼에 낙인처럼 찍힌 진명을 발견했다.
“당신이 말로만 듣던 그 타락 천사로군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구나, 클라이드. 그런 어설픈 상태로 각성 될 바에 인간인 쪽이 안전할 텐데.”
악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입니까?”
“네 곁에 천족이 있다.”
“…….”
악마는 곧바로 자카리를 떠올렸다.
빌어먹을 인간 클라이드 같으니.
그 몸뚱이로는 다른 종족이 곁에 있어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걸 제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죠?”
“너를 아끼니까.”
일리야의 말에 악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악마가 같은 악마를 아낀다고요? 뭐, 제 어머니도 저를 아끼시긴 합니다. 귀중한 수집품처럼 말이죠. 악마라는 건 원래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생판 남인 악마가, 심지어 악마 대 악마로 마주하는 건 처음인 사이에 아낀단 말을 한다고? 어이가 없었다.
“천계 출신이셔서 그런가.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그러자 일리야가 피식 웃었다.
“나 역시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재미있군.”
왠지 신경이 거슬리는 말에 악마는 조롱하듯 웃던 걸 멈췄다.
“그게 무슨 뜻이죠?”
일리야는 단조롭게 대답했다.
“아직은 알 거 없다.”
“저를 너무 얕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악마의 눈동자가 노여움으로 새빨갛게 물들었을 때, 저지할 새도 없이 일리야가 너무나 간단한 동작으로 그의 눈을 덮어버렸다.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어?
악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뇌리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주르르 지나쳤다.
아찔하게 높은 천공.
반짝거리며 한가롭게 허공을 날아다니는 마법 홀씨들.
등 뒤로 펼쳐진 순백의 날개.
그리고 긴 은발을 휘날리는…… 자신.
“형 노릇 하려고 하지 마, 일리야. 나보다 겨우 1분 먼저 태어난 주제에.”
“네 상관으로서 하는 조언이다. 성질이 급한 건 천사로서 좋지 않은 기질이니 고쳐라, 클라이드.”
“오랜만인데도 변함없이 징글징글하다, 진짜. 어쭈. 웃긴 왜 웃어?”
“천박한 말투도 고치도록.”
악마는 소스라치며 아득한 기억에서 깨어나 정면을 확인했다.
하나 일리야는 이미 마차를 타고 자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뭐야, 방금…….”
내가 왜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거지?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