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133화 (134/277)
  • 133화

    20. 잠에서 깨어난

    모닥불을 지펴놓은 동굴 안.

    클라이드를 비롯한 황실 마법사들은 악마 계약자를 죽이기 위해 던전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곧 던전을 나간다는 사실에 대한 고무적인 성취감이나 해방감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를 앞두고서 담담하게 시간을 죽이는 건조한 오만.

    또는 압도적인 강자에게 느끼는 경외와 질투 정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중 무엇도 클라이드의 내면에는 존재치 않았지만.

    “클라이드 님. 정말로 불침번을 서시려는 겁니까?”

    그때 나이 지긋한 황실 마법사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가와 물었다.

    황실 마법사들 사이에서 가장 경력이 긴 자라. 그나마 발언권이 있어, 모두를 대표해서 클라이드에게 불침번 사실을 확인받으러 온 눈치였다.

    클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쉬십시오.”

    나는 괜찮다, 내가 체력적으로 우세하니 걱정하지 마라, 그런 부연 설명은 없었다.

    무례할 정도의 단답이었지만 황실 마법사는 익숙한지 불쾌한 내색도 없이 수긍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는 다가올 때와 달리 빠른 걸음으로 클라이드에게서 멀어져 자신의 동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그와 그들 사이에는 멀지는 않지만 확실한 거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당연한 일이었다.

    클라이드는 지닌 신분이나 쌓은 위용만으로도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으니까.

    거기에다 살갑지 않은 비사교적인 성격이 발 디딜 수 없는 성역처럼 타인의 접근을 차단시켰다.

    밤이 깊어갔다.

    어느새 황실 마법사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클라이드는 별이 총총 박힌 하늘을 쳐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거추장스럽군.’

    황실 마법사들을 두고 한 생각이었다.

    사실 이 던전은 클라이드 혼자서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나 황실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런 식의 협력 아닌 협력을 오랫동안 유지 중이었다.

    클라이드는 언제나 긴장 상태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긴장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높아졌다.

    그럴 수밖에.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이 있었으니까.

    -인간의 꿈을 먹어보고 싶지 않아?

    그는 최근에 거의 쉬지 않고 악마보다 더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황실 마법사들을 데리고 던전을 돌아다니느라, 긴장감은 물론 피로가 매우 무겁게 쌓인 상태였다.

    그의 반쪽은 정신에 생긴 틈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특히 테레제의 꿈을 맛보고 싶지 않냐고. 이 머저리야.

    클라이드는 닥치라며 사납게 위협하는 목소리를 내고 싶었으나 성유물만 손아귀에 꽉 붙든 채 인내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아. 테레제 스콰이어는 데미안을 사랑하게 된 모양이던데.

    꽈아아악.

    클라이드는 어금니를 세게 악다문 채 손에 핏기가 가시도록 유리 방울을 세게 쥐었다.

    -널 좋아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 클라이드.

    악마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키득거리며 계속해서 그를 조롱했다.

    클라이드는 목소리를 무시하다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져 목걸이에 걸린 결혼반지를 꺼냈다.

    델브 던전에서 테레제와 결혼했을 때 나눠 낀 그 반지였다.

    그는 왼손 약지에 반지를 꼈다.

    가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 때면 이렇게 반지를 꼈다.

    그러면 확실히 기분이든 인내심이든 더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봐. 결국 테레제도 널 사랑하지 않게 되어버렸잖아?

    킥킥킥. 비웃는 소리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악마의 조롱에 반응하고 말았다.

    “혀가 길군. 그래봤자 머릿속에서 떠들어대는 게 고작인 주제에.”

    이번에는 악마의 기분이 몹시 나빠진 모양인지 섬뜩한 기운이 한 차례 육신을 훑었다.

    -날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한층 음습하게 낮아진 음성.

    클라이드는 같잖은 위협에 조소하며 손바닥을 길게 찢어 상처를 냈다.

    촤악!

    그러자 성유물의 힘이 훨씬 강하게 발휘되었다.

    ‘이걸로 오늘은 끝이겠군.’

    클라이드는 악마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온기가 스민 시선 끝에 짝을 잃은 결혼반지가 있었다.

    처지가 처량 맞은 게 저와 꼭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게 현실이었고 한계였다.

    여기서 뭔가를 더 바라는 건 테레제에게 못 할 짓이었다. 악행이었다.

    자신은 인간과 공존해서는 안 될 반마였으니.

    “클라이드.”

    그때, 달콤한 단잠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클라이드는 기척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정면으로 다가온 여자를 발견하고서 두 눈을 부릅떴다.

    보랏빛 머리 위에 쓴 검은 가시 왕관, 밝은 회색빛 피부, 새까맣고 긴 손톱, 검게 칠한 입술.

    그리고 붉은 눈.

    “오랜만에 보는구나.”

    제 어미이자 몽마의 왕, 릴리트였다.

    릴리트는 길고 새까만 손톱으로 클라이드의 맑은 뺨을 쓸었다.

    “치워.”

    “까칠하기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니?”

    “손 치우라고!”

    “쉬잇.”

    릴리트가 검은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대었다.

    “저기 인간들에게 황홀한 꿈을 보여주고 있단다. 네가 시끄럽게 굴다가 깨면 얼마나 슬프겠니?”

    그야말로 개소리였다.

    몽마의 왕이 재운 인간이 어떻게 이깟 소리 정도로 잠에서 깰 수 있단 말인가?

    클라이드는 당장 릴리트를 밀쳐내 어떤 반항이라도 해보고 싶었으나, 현실은 사지의 통제권을 빼앗겨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게 전부였다.

    “만일 저 인간들이 죽으면 어떻게든 당신을 죽여버리겠어!”

    “저런.”

    아들의 패륜에 릴리트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네 인간성은 언제 보아도 귀엽지만, 솔직히 조금 성가시구나. 그러지 말고 이만 집으로 오지 않으련?”

    클라이드는 그 말을 비웃었다.

    “지옥에 내 집이 있었나?”

    “나의 성이 바로 네 집이지. 다음 대 군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제 소꿉놀이는 그만하려무나.”

    릴리트는 그렇게 말하며 아들의 심장에 검은 손톱을 박아넣었다.

    “-!!”

    클라이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릴리트가 심장에서 손톱을 빼냈다.

    한데 마땅히 흘러야 할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진짜 육신을 꿰뚫은 게 아니라 성유물의 보호막에 조그마한 금을 내는 행위에 불과했으니.

    “일어나렴, 내 아가.”

    “…….”

    그러자 릴리트의 품으로 쓰러졌던 클라이드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신에서 울컥, 사악한 기운이 토해졌다.

    이내 클라이드가 완전히 고개를 들자 두 눈에 담긴 눈동자가 환히 드러났다.

    완벽한 붉은색이었다.

    “오셨어요? 어머니.”

    릴리트는 사랑스러운 아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가 여전히 그의 육신을 휘감는 성유물의 힘에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널 깨우기 위해 오랫동안 힘을 비축했는데. 성유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에는 여전히 모자란 모양이구나.”

    악마 클라이드는 슬퍼하는 어미를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이렇게 저를 밖으로 꺼내주셨잖아요?”

    단지 상심한 릴리트를 위로하려 한 말이 아니었다.

    악마 클라이드는 너무나 오랜 시간 밖으로 나오지 못하다가 간신히 육체의 통제권을 가진 이 순간이 감격스러웠다.

    “그래. 집으로 가서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악마는 고개 저었다.

    “아니요. 아직은 인간계에 머물고 싶어요.”

    “어째서?”

    악마의 붉은 두 눈이 반지에 닿은 순간 황홀한 미소가 그려졌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 * *

    발할라 본관의 4층.

    그곳은 가문의 혈족들이 사용하는 층이었다.

    하인은 사용하지 않아 가끔 먼지만 치워두는 클라이드의 방을 단속한 후 뒤를 돌았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한데 여기는 어쩐 일로…”

    딱!

    악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인이 까무룩 잠에 빠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시시하네.”

    인간계는 참 시시했다.

    생긴 것도, 이곳을 이루는 생명체들도 전부.

    한데도 꾸역꾸역 던전을 깨고 나와 발할라에 돌아온 건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악마는 기분이 좋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걸음은 커다란 거울이 놓인 콘솔 앞에서 멈췄다.

    쯧. 거울에 비친 고리타분한 모습에 절로 혀를 차게 되었다.

    “답도 없는 새끼.”

    얼굴이 잘생기면 뭘 하나?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거지 같은데.

    자신의 반쪽은 미적 감각이 최악이었다.

    통제를 잃는 순간 붉어지는 눈동자가 두려워 길게 기른 앞머리도 최악.

    항상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꼬박꼬박 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모습도 최악.

    장신구 하나 없이 수수하게 다니는 것도 최악.

    정말 다 최악이었다.

    “봐줄 거라고는 껍데기 말고 없는 주제에 무슨 자신감인 건지.”

    악마는 멍청하고 가엾은 반쪽이 제 육신에 저지른 망측한 짓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헝클어뜨리듯 넘겨 이마를 드러내고 목을 답답하게 조이는 넥타이는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단추도 끝까지 채우지 않으니 한결 봐줄 만했다.

    그런데도 성에 차지 않았다.

    악마는 먼지가 쌓인 보석함을 열어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내내 처박혀있던 귀걸이나 팔찌 등을 꺼냈다.

    푹푹. 그는 무자비하게 귀를 뚫어 귀걸이를 걸었다.

    “흐음. 이러니까 한결 괜찮네.”

    고약한 성격과는 별개로 늘 우수한 모범생처럼 반듯하게 보이던 껍데기는 순식간에 양아치로 탈바꿈되었다.

    “역시 난 이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린다니까.”

    악마는 이제야 흡족한 듯 거울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인간인 척해야 해서 두 눈동자가 파랬지만, 그 정도는 봐줄 만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휘적휘적 방을 나갔다.

    그러다 이사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클라이드?”

    이사장은 두 눈을 의심했다.

    늘 단정한 모습을 고수하던 손자가 여러모로 파격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탓이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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