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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32화 (133/277)

132화

성가신 일들이 마무리되자 어느새 파티의 순서는 꿀 채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띠링!

[성좌 ‘예비 사위 일리야’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뭐야… 무슨 파티가 갑자기 현장 체험 학습을 시켜? 키스 타임이나 열어줄 것이지]

‘키스 타임은 또 뭐야?’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어린 신관들이 나눠주는 손바닥만 한 유리병을 받았다.

신관은 맑은 황금빛 꿀을 흘리는 거대한 아카시아꽃 나무로 우리를 안내하며 설명했다.

“유리병에다 ‘지식 창고 아카시아’에서 떨어지는 꿀을 받으시면 됩니다. 정해진 양 이상은 채집하실 수 없으니, 주의해주십시오.”

‘지식 창고 아카시아! 마법 식물도감에서 본 꽃이야. 학습 능력을 높여주는 꿀을 흘린다고 했지.’

아카시아를 앞에 두고 눈을 반짝거리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자리에 모인 귀족 부부들 역시 표정이 비장하게 싹 바뀌어 있었다.

파티 참석자 중 나와 일리야가 유독 젊은 편이었고, 대부분은 중년이었다.

그러니까 학업에 신경 쓸만한 나이의 자녀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자식의 학업 성취에 효과가 있다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법.

‘사실 이 꿀 때문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나 역시 곧 다가올 기말고사에 대비해, 두뇌활동을 원활하게 해주어 집중력을 높여주는 신비한 꿀이 몹시 간절한 상황이었다.

내가 눈에 불을 켜고 느릿하게 떨어지는 커다란 꿀방울을 유리병에다 열심히 담고 있을 때였다.

일리야는 꿀 채집에 썩 열의 없는 태도로 내게 물었다.

“마법 식물은 왜 키우려는 거지?”

“어쩌다 보니 이래저래 재산이 많이 쌓여서 좀 굴려보려고요. 미래를 대비해두면 좋으니까요.”

“어떤 미래를 대비하려는 거지?”

“그건…….”

말하려니까 민망한데.

내가 머뭇거리자 일리야가 말했다.

“말하기 어려운 계획이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 건 아니에요.”

원래도 발표를 가장 싫어하는 성격이라 내 계획이나 생각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게 조금 민망했다.

실은 아무도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을 거 같아서 그랬지만.

‘차라리 보고서로 써서 내라고 하면 잘할 자신 있는데.’

나는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마법 식물을 기르는 농원이 있으면 가문에서 보유한 연금술 공방이나 병원 쪽에 득이 되잖아요.”

한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일리야는 마차에서 내 대답을 기다렸을 때처럼 무시하거나 지루해하는 기색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말이 술술 나왔다.

“저는 정화 마법에 재능이 있고 저를 도와주는 마법 동물 친구들도 있으니까, 위험한 상황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환경도 개선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니,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머릿속으로만 어렴풋이 떠올렸던 것들을 말로 꺼내며 훨씬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배 중에 레이니라는 친구가 있는데, 연금술에 재능이 있거든요. 그 애의 연구에 필요한 재료를 바로 충당해줄 수 있을 테니, 마법 농원을 차리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라고 생각했어요.”

레이니는 악마와 마수를 상대할 때 유용한 것들을 연구하는 연금술사였다.

그런 레이니를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일리야는 이제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그런 방식으로 스콰이어 가문을 장악하려는 계획인가?”

“네? 전혀 아니에요.”

내가 황급히 주변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마법을 펼치며 부정하자 일리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계획이 아니라고?”

“전혀요.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그럴 깜냥도 아니고, 잘해 낼 자신도 없고요.”

나는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애초에 저는 테레제가 아니니까요.”

가주 자리에 관심이 없는 것도 맞지만, 껍데기만 테레제인 내가 스콰이어의 주인이 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의 최대치는 가문의 서포터 정도가 아닐까?

‘물론 지금도 충분히 내 존재가 스콰이어 가문에 득이 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시나리오상 원래의 테레제가 존재함으로써 반드시 일어났을 불행한 일들이 나로 인해 사라졌다.

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내 가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으앗.”

잠깐 상념에 잠긴 사이에 하필 알사탕만 한 크기의 꿀방울이 유리병이 아닌 내 손에 떨어졌다.

“아깝게.”

나도 모르게 손에 흐른 꿀을 핥아 먹으니 일리야가 미간에 실금을 만들어내며 행동을 저지했다.

“보기 좋지 않은 행위다.”

그는 유리병을 옆으로 치워버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꼼꼼한 손길로 내 손을 적신 꿀을 닦아주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오히려 제 손이 꿀범벅이 되고 있는데요, 교수님.”

내 손가락은 황금빛 꿀에 뒤덮여 사탕 표면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닦는 것보다는 물로 씻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일리야는 꿀이 엉망으로 뒤엉겨 둥글게 뭉쳐진 손수건을 쳐다보더니 순순히 긍정했다.

“내 생각에도 그게 낫겠군.”

그러면서 날 따라 작은 분수대까지 졸졸 쫓아오는 게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대악마가 귀엽다니. 제정신이 아냐.’

하지만 빈틈 하나 없을 것 같은 일리야에게서 의외의 허술한 모습을 발견하니 묘한 친근감이 느껴졌다.

“손수건은 따로 세탁을 맡기는 게 좋겠어요. 대신 이걸 쓰실래요?”

나는 손가방에서 꽃과 나비가 수 놓인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교수님이 사용하시기에 모양이 좀 그런가요?”

“상관없다.”

일리야는 손수건을 받아 슈트 안주머니에 고이 집어넣더니 본인 몫의 꿀을 내게 주었다.

“이건 네가 가져라.”

‘대충 채집하시는 것 같더니 언제 유리 꿀단지를 다 채우신 거지?’

띠링!

[성좌 ‘예비 사위 일리야’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상견례는 아까 했으니까 이제 예물 교환하는 거야?]

나는 환하게 웃으며 사양하지 않고 꿀을 받았다.

“정말로 저 주시는 거예요? 와, 감사해요.”

이걸로 기말고사는 확실히 문제없겠군. 후후후후.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을 때 일리야가 스치듯 머리를 쓰다듬더니 손을 내리며 말했다.

“이만 돌아가지.”

“네!”

얻을 것도 다 얻었으니 신전에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마차에 타자마자 눈에 들어온 책을 집어 들었다.

신전으로 올 때 일리야가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혹시 무슨 책인지 봐도 될까요?”

일리야는 허락의 말 대신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구슬을 소환했다.

“밝아져라.”

마차 안에도 램프가 있기는 했지만, 밤이라 내부가 어두워서 책을 읽기에는 마땅하지 않았다.

“눈에 좋지 않으니 빛은 정면으로 쳐다보지 말아라.”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일리야는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이 다리를 꼰 자세로 비스듬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띠링!

[성좌 ‘주책바가지’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하… 이게 연상의 맛이구나]

띠링!

[성좌 ‘로맨스극혐’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일리야 정도면 연상이 아니라 조상 아닌지…]

띠링!

[성좌 ‘썩은 취향’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히려 좋아]

성좌들이 헛소리를 떠들 동안 열심히 책을 읽어보았으나 골치만 아파져 덮어버렸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이해하지 못했다고 상심하지 마라.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

“아, 예에….”

실제로 지옥에서 오셔서 그런가, 지옥의 주둥이를 가지셨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전문 용어로 범벅되어 있는 책을 멀리 치워버린 뒤 유리 꿀단지를 만지작거렸다.

‘나 혼자 두 병 다 먹기는 많을 거 같은데. 기숙사에 리비랑 레이니를 초대해서 꿀차에 디저트를 먹을까?’

마음 같아서는 꿀주를 만들어 클예부와 함께 또 아무 이유나 붙여 축배를 들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꿀이 부족했다.

‘내 마법 농원에 지식 창고 아카시아꽃 나무를 심어야겠어. 지능 상승과 음주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니, 이건 포기 못하지.’

과연 신전에서 묘목을 줄지 의문이지만.

세상의 종말이 다가와도 한그루의 아카시아꽃 나무를 내 농원에 반드시 심겠다고 생각하며 창밖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스콰이어 공작저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저택으로 진입할 때쯤 일리야가 내게 물었다.

“곧 기말이 시작될 텐데 시험공부는 잘하고 있나?”

띠링!

[성좌 ‘눈치 챙겨’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 일리야 형!!!]

나는 여유로운 미소로 대답했다.

“저 A+급 마법사예요.”

“등급이 높다고 성적이 높게 나오지는 않는다. 충분한 이론과 실전 경험이 동반되어야 하지.”

같은 등급의 마법사라도 지닌 능력치에 따라 편차가 컸다.

그렇다지만 이런저런 요소들을 감안하더라도 A+급 마법사는 엄청난 상위 등급이었다.

내가 괜히 우쭐거리는 게 아니라고.

마차는 어느덧 로비 앞에 멈췄다.

일리야는 흑표범처럼 매끄러운 동작으로 마차에서 내려 나를 에스코트했다.

문득 심술기와 장난기가 솟아 유일하게 일리야가 찾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을 물었다.

“혹시 지금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답을 찾으셨어요?”

“성미가 급하군. 마법사로서 좋지 않은 버릇이다.”

괜히 장난쳤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나를 마중 나온 엘로이즈를 본 일리야가 제자리에 멈춰 서며 내게 말했다.

“아까의 답은 아니지만 지금 내 생각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뭔가요?”

“두 가지 감상이 있다. 하나는 오늘의 파티가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것.”

“그럼 두 번째는요?”

내 질문에 일리야가 갑자기 허리를 숙이더니 엘로이즈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널 집에 보내기 싫군.”

“……네?”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다가 뒤늦게 반응했을 때는 일리야가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린 뒤였다.

“학교에서 보도록 하지.”

그가 제 용건은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뒤돌았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성좌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후원 코멘트를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일리야의 호감도를 확인했다.

[호감도: ♥♥♥♡♡]

갑자기 낙원의 문 앞에 나타나 사람을 기겁하게 하더니.

오늘은 내가 테레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던져놓고, 이젠 호감도로 놀라게 하고 있었다.

일리야때문에 다른 생각할 여유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계속 혼란스러웠다.

머리는 또 왜 쓰다듬는 건데?

“알 수가 없어, 정말…….”

정말이지, 악마의 농간에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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