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나는 경악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불시에 칼에 찔린 사람처럼 입술 새로 신음이 흐를 것 같았다.
당연히 오즈월드나 시스템이 초월적인 힘으로 나를 <신의 유희> 속에 완전히 귀속시켰을 거라고 믿었다.
마치 던전의 데미안처럼.
하나 여권 없이 밀입국한 불법 영혼 체류자 신세임을 일리야에게 들키고 말았다.
심각한 에러 같은 상황이었다.
심하게 놀라긴 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숨을 고른 뒤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일리야는 내 정체를 알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 관련 없다는 듯이 방관자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 점에 용기를 내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첫마디를 내뱉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무엇을?”
“제 정체 말이에요.”
“난 네 정체를 알고 있다고 말한 적 없다. 네가 테레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지.”
일리야는 대화가 길어질 것을 짐작했는지 거기까지 대답하고 손에 든 책을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정확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범위를 상정해 물어라. 그래야 나 역시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있다.”
지독하게 이성적이라 무정하게까지 느껴지는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네가 얼마나 괜찮은 질문을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교수님 같잖아. 물론 교수님이 맞기는 맞는데…….’
내가 필사적으로 어떻게 질문해야 좋을지 떠올릴 동안 일리야는 독촉하지도, 지루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히 내 질문을 기다렸다.
덕분에 목소리를 떨거나 말을 더듬지 않고 침착하게 질문할 수 있었다.
“지난번 도서관에서, 제가 개인 열람실과 연결된 가상 공간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셨죠. 그 공간이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일리야가 대답했다.
“가상 공간이라는 말은 틀렸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바닷가더군.”
이미 확인해봤다는 투였다.
‘그건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이스터에그로 해변 바캉스만 만들어냈을 뿐, 그런 설정까지는 넣지 않았다.
시스템이 제멋대로 연관성을 만들어낸 듯했다.
해변이 실존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기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럼 테레제의 영혼이 저로 바뀐 건 언제 아셨어요?”
“이상한 건 처음부터 느꼈다. 확신하게 된 건 델브 던전에 휘말린 네가 황실 마법사들과 돌아온 날이었지. 그때부터 네 영혼과 특유의 향기가 잘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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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브 던전에서의 사망, 판테온을 거친 영혼이라는 점, 시스템 오류 등의 특이점이 몇 가지 존재. 그 사이 오류가 섞여들었을 가능성이 있음.]
나 또한 델브 던전이라는 말에 성좌와 같은 생각을 했다.
하나 문제로 삼을 게 너무 많다.
게임이었다면 오류 전으로 롤백하거나 디버깅을 하는 등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마련하겠지만, 지금은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냉혹한 현실 속이었다.
그러니 다른 방식의 디버깅이 필요했다.
“제가 테레제가 아닌 걸 아셨으면서 왜 지금까지 문제 삼지 않으셨어요?”
“문제가 아닌데 문제 삼아야 하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대답이었다.
“그야 이 몸 안에 들어온 게 뭔지도 모르고, 이상한 존재일 수도 있잖아요?”
“글쎄. 내 눈에 너는 딱히 이상한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외려 이제야 자리에 있어야 할 게 돌아와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군.”
내가 테레제에 빙의하고 나서 뭔가 크게 바뀌었다는 건가?
물론 시나리오가 좀 바뀌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큰 틀이 변한 건 아닌데 대체 어떤 변화를 감지한 걸까?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일리야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 세계는 마치 톱니바퀴는 제대로 맞물려 있지만, 바늘이 돌아가지 않는 시계 같았지. 한데 네가 나타난 순간부터 시곗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곗바늘이 움직인다…….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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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제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거 같은데]
‘만일 내가 그런 존재라는 걸 안 일리야는 어떻게 행동할까?’
내가 판테온으로 떠나있던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세상은 갑자기 먹구름을 드리우고 비를 내렸다.
마수도 급증했으며 이상할 정도로 더 포악해져 수도까지 쳐들어와 인간을 공격했다.
인간계를 멸망시키기 최적화된 환경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날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자신의 계획에 내가 변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
나는 최대한 동요한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다.
“이상한 말씀이시네요. 저는 그냥 인간일 뿐인데요.”
일리야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다만 이상할 정도로 테레제의 육신과 동기화율이 높은 특이한 영혼을 지닌 인간이지. 어떠한 존재도 그럴 수가 없는데도.”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긴장감이 높아져만 갔다.
나는 차라리 대놓고 묻기로 했다.
“교수님은 저를 뭐라고 생각하세요?”
쏟아지는 질문에 한 번도 막힘없이 대답을 내놓던 일리야는 처음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그래서 더 떨렸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뜸을 들이는 걸까?
나를 어떻게 명명하려고?
초조함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표정을 잘 간수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점점 간곡히 애원하는 듯한 기색이 스미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을 때였다.
일리야가 느릿한 속도로 입술을 떨어뜨렸다.
“그냥 제자라고 생각했는데.”
했는데?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겠군.”
나는 성급하게 되물었다.
“어떻게 다른데요?”
그러자 놀랍게도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지 못한 사이보그처럼 보이던 일리야가 미간을 좁히며 선명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쉽지 않은 문제를 만나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 그런 얼굴이었다.
“잘 모르겠구나.”
극적인 표정 변화에 비에 맥 빠지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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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인걸~ 사랑인걸~ 지워봐도 사랑인걸~ 아무리 비워내도 내 안에는 너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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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집중하고 있는데 누가 후원 코멘트로 노래 부르냐]
“…….”
성좌들의 황당한 코멘트에 더 맥 빠졌다.
‘사랑은 무슨.’
[호감도: ♥♥♡♡♡]
이 호감도를 보고도 사랑이라는 소리가 나오냐고.
‘여전히 붉은 하트가 2개인 걸 보면 조금은 안심해도 되는 거겠지?’
“어쨌든 제가 싫은 건 아니시죠?”
내 질문에 일리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널 싫어할 이유가 있었나?”
“없죠, 없죠.”
나는 황급히 부정하고 나서야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겨 경직된 몸을 풀었다.
아무튼, 당장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일까? 괜히 실없는 농담도 나왔다.
“그나저나 교수님도 모르는 게 있으시네요.”
일리야는 도로 기계 인간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네 지식수준에 비해 아는 것이 많으니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지만. 나 역시 세계의 일부분에 불과한 작은 존재일 뿐이다.”
“아, 네에….”
그렇군요. 그런데 굳이 제 지식수준을 언급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일리야가 창밖을 확인했다.
“신전에 곧 도착할 듯한데. 더 질문할 건 없나?”
“질문보다는 부탁드릴 게 있어요. 저에 대한 걸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런 건 애초에 말할 생각 따위 없었다.”
이윽고 마차가 멈췄다.
일리야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 커다란 몸으로 나를 집어삼킬 듯한 거리에서 말했다.
“아. 네가 어떻게 다른지는 더 알아본 후 알려주지.”
그는 당혹스러운 선언 후 마차에서 내려 날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리지.”
띠링!
[성좌 ‘일리야 교수님은 이상해’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어떻게 다른지 연애와 결혼이라는 실험을 통해 알아보자는 말씀이시죠?]
‘아니요. 전혀요.’
나는 일리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대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빙의한 지도 벌써 4개월 차에 접어드는데. 제대로 된 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신전을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대신전은 확실히 종교적인 요소 때문인지 황성이나 발할라와는 차별화된 신성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흘렀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흰 사제복을 입은 어린 신관이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번스타인 공자님, 스콰이어 공녀님. 화원으로 모시겠습니다.”
대신전의 화원은 초대장 없이는 황족이라 해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랬기에 소수의 선택된 권력자만이 이 자선 파티에 초대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확실히 발할라 축제와는 성질이 완전히 다른 파티였다.
화원은 마법 식물로 가득 차 있어 천계에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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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에서도 마법 식물을 키우는 일에 민감한 듯하던데, 신전에서는 보란 듯이 대규모 화원을 만들었군요. 아마도 신전이 마법 식물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테죠.]
성좌의 말대로였다.
신관이 사용하는 ‘신성력’은 마수를 쫓는 특이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랬기에 수도 안에 당당히 마법 식물로 이루어진 화원을 꾸릴 수 있는 거였다.
또한, 신전은 마법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마법 식물을 기르는 농원을 만들려면 신전의 허가가 필요했다.
마법 식물은 연금술과 의학에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고 미용에도 엄청난 효과를 냈기에 큰돈이 되었다.
‘그러니 귀족들이 너도나도 평민 마을에다 마법 식물을 재배하는 거지.’
나는 반짝거리는 꽃가루를 품은 히아신스를 톡 건드렸다.
그러자 기분 좋게 달콤한 향기가 화답하듯 풍겨왔다.
“과연 마법 식물도 너를 좋아하는군.”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일리야가 꽃을 가리켰다.
“네게 반응하고 있지 않나. 마법 동물들처럼.”
“아….”
일리야는 내가 당황하고 있으니, 외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만물이 네게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몰랐나?”
으악! 모르고 싶어요!
만물이라니. 너무 거창한 표현에 절로 낯이 뜨거워졌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띠링!
[성좌 ‘하하버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진짜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그러니까 대체 뭐 때문에 미친다는 거냐고.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