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한데 막상 문을 열려니 망설여졌다.
이 문을 열었을 때 낙원이 나타나면 게임은 끝난다.
게임에서는 이러한 선택지가 떴다.
[이세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곳으로 차원 이동하시겠습니까?]
▹이동한다. (낙원 엔딩)
▹이동하지 않는다.
사실상 낚시성 엔딩이지만 지금의 내게는 유일한 탈출로였다.
그런데 왜 속 시원하게 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걸까?
과연 이 문을 열었을 때 낙원이 나오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해변이 나오길 바라는 건지 내 진심을 알 수 없었다.
띠링!
[성좌 ‘테레제에 인생 베팅’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해변이니까 수영복? 아니면 바캉스룩?]
띠링!
[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영상 영구 소장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성좌들은 얼른 문을 열어보라며 성화였다.
‘일단 열어보고 생각하자.’
어차피 언젠가 열 거라면 지금 열어보는 거야.
나는 개인 열람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멈칫.
“……여기가 어디지?”
내 앞에는 그림 같은 해변 대신 새까만 어둠만 존재했다.
띠링!
[성좌 ‘물■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엥? 해변■ 아닌■ ■■ ■■■?]
■■! ■■! ■■! ■■! ■■! ■■! ■■! ■■! ■■! ■■!
끼이이이이이이- 쾅!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 없어졌어?!’
미친 듯이 울리던 알림 소리도 뚝 끊겨 완전한 적막이 깔렸다.
방송이 끊긴 것이다.
‘설마 또 시스템 오류인가?’
그렇다면 전처럼 오즈월드가 나타나 뭐라도 조치해야 하는데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오즈월드를 불러보았다.
“오즈월드?”
그러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문제가 자주 생기는 거야? 이 망할 방송 같으니!
“나 이런 거 질색이라고. 게임도 공포물은 절대로 안 했단 말이야.”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으니, 점차 시야가 어둠에 적응해 주변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들어선 곳이 웬 방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간이 어두운 이유는 현재 이곳이 밤이었으며 커튼으로 창을 가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미처 가려지지 못한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달빛이 유난히 창백했다.
흰 달빛에 신경을 집중해 조심스럽게 창문까지 다가가 커튼을 걷은 순간.
“……와.”
너무 가까운 달에 순간 숨이 턱 막히는 압도감을 느꼈다.
달의 표면이 무척 선명하게 육안으로 보였다.
심지어 그림자가 진 부분까지도.
곧 내가 있는 행성으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두려운 광경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무서웠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뒤에서 오즈월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웬 벌레가 궁을 들어왔구나.”
“…?”
한데 말투가 낯설었다.
의아하게 뒤를 돌자 쏟아지는 달빛에 전신이 흠뻑 적셔진 남자가 보였다.
그는 수려한 금빛 머리칼과 짙은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금실로 화려하게 자수를 놓은, 가슴팍을 다 드러낸 새하얀 옷.
해골이나 십자가 같은 모양이 아니라 태양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귀걸이.
그는 분명 오즈월드였으나 오즈월드가 아니었다.
“오즈월드…?”
의아하게 그를 부른 순간, 목이 붙들렸다.
“커억!”
“불경하게 짐의 이름을 입에 담다니.”
짐? 그건 황제가 본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나른한 표정을 한 오즈월드는 내 얼굴과 옷차림을 쭉 훑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행색이군.”
그가 목을 놓아주었다.
털썩!
“콜록! 콜록!”
“궁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궁금하지만, 묻지 않으마.”
오즈월드가 자비롭게 검을 빼 들었다.
은빛의 검날에 달빛이 서늘하게 부딪혔다.
“오늘은 달이 유독 아름다우니 편히 보내주겠다.”
나는 뒤로 더듬더듬 물러나며 경악했다.
“잠깐, 당신 미쳤어? 여기는 대체 어디야? 왜 날 멋대로 죽이려고 해?!”
오즈월드는 대답 없이 검을 휘둘렀다.
‘이렇게 어이없이 죽는다고?!’
그때였다.
화라라라라라락-!
달빛을 등져 내 앞으로 진 그림자에서 수천 마리의 검은 나비가 날아올랐다.
내내 모든 게 시시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오즈월드의 눈이 살짝 커졌을 때, 나비들이 나를 집어삼켰다.
쏴아아아아-
파도 소리가 들렸다.
수천 마리의 나비는 동시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는 환한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곳은 해변가였다.
또한, 내 옷은 오픈 숄더 원피스로 바뀌어 있었다.
낙원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이스터에그였다.
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행성의 오즈월드에게서 살아 돌아왔다.
스콰이어 나비가 날 살려준 것이다.
“대체 거기는 어디였지…?”
“어디를 말하는 겁니까?”
흠칫!
깜짝 놀라며 뒤를 도니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무지개색 화려한 염색모와 새빨간 슈트 차림의 오즈월드가 보였다.
그가 “조심.”하며 벌떡 일어나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날 부축했다.
방금 나를 죽이려던 오즈월드와 달리 퍽 다정한 태도인데 외려 이쪽이 더 소름 끼쳤다.
내가 손을 뿌리치자 오즈월드는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나는 계속해서 어깨를 움츠린 채로 두 손을 꽉 쥐었다.
오즈월드에게 붙들렸던 목이 여전히 시큰거리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방송 신호가 끊겨서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광고 중이고요. 무슨 일이었죠?”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방금도 시스템 오류였던 거야?”
“아마도 그런 것 같군요.”
오즈월드가 돌연 손에 쥔 지팡이 끝으로 내 턱을 휙 들어 올렸다.
“방금까지는 많이 놀란 것 같아서 배려해드렸습니다만. 제가 질문하면 대답하세요, 테레제 양.”
타고난 듯 고압적인 시선과 태도.
행색과 달리 우아한 행동들. 그리고 짐이라 말한 것까지.
오즈월드는 황제였던 적이 있다.
나는 거기까지 추측 후 입을 열었다.
“당신을 보고 왔어. 달이 아주 커다란 곳에서.”
“…아아.”
오즈월드는 내가 말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들은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저번 오류랑 관련 있는 건가?’
오즈월드에게는 적이 많다고 했다.
그러니 이 현상도 그의 적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거긴 어디지? 당신, 황제였어?”
“질문은 제가 하는 겁니다, 테레제 양.”
“말해주기 싫은가 봐? 아니면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든가.”
나는 말을 쏟아내던 중 갑자기 번뜩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혹시 그 세계, 당신 심연이야?”
“거기까지.”
오즈월드는 지팡이를 거두었다.
“어차피 이제 테레제 양과 관련 없을 곳입니다. 왜 궁금해하는 거죠?”
그렇게 묻는 게 외려 더 이상했다.
“그쪽 일인데 당연히 궁금하지. 전에도 말했었잖아, 당신이 궁금하다고.”
혹시라도 네 약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즈월드는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로맨틱한 말이네요.”
그러더니 갑자기 엄지로 내 입술을 쓸었다.
미약한 정전기 같은 게 피부를 간지럽혔다.
나는 아랫입술이 지긋이 눌린 채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뭘 한 거야?”
“쓸데없는 이야기로 귀찮아지지 않게 금제를 걸었습니다. 당신이 방금 다녀온 세상의 일은 이제 발설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재차 오즈월드가 황제였는지, 그곳은 당신의 과거였는지 물어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든 금제를 빗겨 갈 키워드를 꺼내 보려 입술을 벙긋거리자 오즈월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날이 갈수록 성가실 정도로 용감해지네요, 테레제 양.”
“내 안위가 걸린 문제인데 당연히 용감해져야 하지 않겠어?”
그러자 오즈월드가 피식 웃었다.
“하긴, 감히 성좌들을 속이고 낙원을 찾고 있으니 확실히 용감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군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알고 있었구나.’
나는 일부러 낙원 엔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언급하게 되면 내게 불리해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연 문은 세 개.
낙원을 찾을 확률이 상당히 높아진 상황이었다.
한데도 오즈월드에게서 아무런 제재가 없어 혹시 낙원에 대해 모르는 건가 얄팍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역시나 그냥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나는 차분하다 못해 차갑게 식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낙원의 문을 열지 못하게 할 셈이야?”
오즈월드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한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방송은 철저히 <신의 유희>를 기반으로 진행되니 낙원 엔딩을 맞이하더라도 제가 제재할 이유는 없죠.”
“…내가 8월에 낙원을 찾게 되면 어떡하려고?”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그게 방송 규칙이니까요.”
다행인 일인데 어쩐지 허탈해졌다.
이럴 거면 애초에 왜 날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거지? 뭘 위해서?
넌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장난감일 뿐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여전히 기분이 더러웠다.
오즈월드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떠날 시간인지 내 뺨에 키스했다.
“다음번에는 좀 더 느긋하게 보도록 하죠.”
그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후원 알림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띠링!
[성좌 ‘얼굴감별사’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꺄아아아아악!!!!!!!!! 바캉스룩 미쳤다 진짜ㅠㅠㅠㅠㅠ]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왜 갑자기 광고 틀어서 우리 애 못 보게 해!?! 테손실 책임져!!]
띠링!
[성좌 ‘마이너 장인’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뭐야뭐야~? 오사장 우리 테레제 바캉스룩 먼저 보려고 광고 튼 거야~? 이러면 나 착각해~?]
오류에 대해서는 성좌들에게 아예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류에 관한 이야기도 금제에 걸려 있잖아? 지독한 새끼.’
나는 입술을 벙긋거려보다 이내 포기하며 뺨이나 벅벅 닦았다.
“바다는 예쁘네.”
방금 죽을뻔했던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곳 풍경은 천국처럼 아름다웠다.
다만 더 감상하고 있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혹시 또 오류가 생기면 어떡해.’
다시 그 이상한 세계로 끌려가는 경험은 솔직히 사양하고 싶었다.
지금의 양아치 오즈월드도 말이 끔찍하게 안 통하지만, 금발의 오즈월드는 아예 듣지도 않았다.
‘뭐? 달이 예쁘니까 편히 보내주겠다고? 미친놈.’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문을 연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교수님.”
일리야가 앞에 서 있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