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내가 상념에 잠겨 숟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일 동안 엘로이즈가 새로운 교복을 들고 왔다.
오늘부터 발할라 전교생이 하복을 입는 날이었기에 교복도 바뀐 것이다.
엘로이즈는 교복에 문제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입으시기에는 너무 간소한 차림이 아닌가 싶지만, 문제는 없네요.”
발할라 하복은 최대한 싱그럽고 상큼해 보이는 것에 주력한 디자인이었다.
상의는 흰 반팔 블라우스에 푸른 리본이 달려 있었고 하의는 리본과 같은 색의 푸른 스커트였다.
나는 교복을 갈아입은 뒤 리본 위에 인벤토리 아이템인 브로치를 달았다.
그러자 브로치 형태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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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기술 ㄷㄷ]
“어머, 특이한 브로치네요?”
엘로이즈는 던전에서 얻은 물건은 참 이상하고 신기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실제로 마도구들은 이보다 더 특이하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하복으로 갈아입으니 확실히 계절감에 맞게 산뜻해 보였다.
“우리 아가씨가 걸치면 전부 명품이 된다니까요!”
엘로이즈의 콩깍지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다녀올게.”
오늘 등굣길에 읽을 책은 <혈통과 비전 마법>이라는 거였다.
<신의 유희>에서는 스콰이어 가문의 비전 마법에 대해 다루지 않지만 조사해봐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판테온에서 본 그 검은 나비. 분명 스콰이어 가문의 문양이랑 똑같이 생겼었어.’
비전 마법이란 무협지로 비유하자면 가주가 후계자에게만 일인 전승으로 알려주는 가문의 필살기 같은 거였다.
스콰이어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흑마법사들이 세운 가문이었다.
그런데 이 가문은 특이하게도 강력한 흑마법을 사용하는 만큼 반대급부인 백마법 또한 강하게 타고났다.
하나 비전 마법을 잃은 뒤 평범한 마력을 지닌 일반 마법사만 배출했다.
그러다 이번 대에서 리비가 백마법사로 각성하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여기 어디에도 ‘스콰이어 나비’가 등장한다는 설정은 없다고.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휙휙 넘기며 걷고 있을 때, 뒤에서 클라이드가 다가왔다.
“책 보면서 걷다가 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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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ㅊ 그러고 보니 남주들도 하복으로 바뀌었구나!]
흰 상의에 푸른 넥타이를 매고 잿빛 바지를 입은 클라이드는 성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 클라이드. 학교에 있었어?”
클라이드는 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고 제일 유명한 마법사였기에 대외활동도 그만큼 많았다.
그랬기에 꼭 던전을 돌지 않더라도 상황에 따라 종종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꽤 자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클라이드에게 물었다.
“오늘도 같이 점심 먹을 거지?”
내 말에 클라이드가 어딘가 불량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연구실에다 새로 들여놓은 장비값이 얼만데.”
이상하네. 분명 대화 중인데 왜 내용이 맞질 않지?
“으응. 점심 때 보자.”
나는 레이니에게 도시락을 전해주려고 연구실로 향했다.
그러다 자신의 개인 연구실에서 나오고 있던 데미안과 마주쳤다.
데미안도 검은 동복에서 상큼한 하복으로 차림새가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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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게 학원물의 맛이구나]
그를 본 순간 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안녕, 데미안.”
데미안은 어딘가 멍한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약간 당황한 얼굴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야, 테레제.”
우리는 평범하게 인사를 나눈 후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안도했다.
이제 데미안을 보아도 괜히 아련해지거나 마음이 쿡쿡 쑤시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데미안은 눈앞의 데미안과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데미안도 그러길 바랐으니까.’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나는 복도에서 일리야를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불렀다.
일리야는 검붉은색 머리칼을 깔끔하게 묶고 있었으며 계절감에 맞는 가벼운 슈트 차림이었다.
그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용건이라도 있나?”
“아니요. 반가워서 인사드린 건데…….”
내 말에 일리야가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강의 때마다 보는데 왜 반갑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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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라 하찮은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 느낌이라기보단 사회성 학습 중인 안드로이드 같아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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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와의 사랑? 오히려 좋아]
나는 이상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키케와 베니토에게 미안해졌다.
으음. 이래서는 대악마의 질문 지옥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교수님은 제가 반갑지 않으세요?”
질문에는 질문으로 응수한다.
내 역질문에 일리야는 긴 시간 끌지 않고 대답했다.
“썩.”
“아.”
썩 반갑지 않으시구나.
[호감도: ♥♥♡♡♡]
혹시나 해서 확인해본 그의 호감도는 여전히 붉은 하트 2개였다.
‘그래, 일리야가 원래 이런 캐릭터이긴 하지…….’
나는 머쓱하게 인사했다.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내가 언제 귀찮다고 했지?”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의아하게 물었다.
“방금 반갑지 않다고 하셔서….”
“딱히 반가운 감정이 들지 않을 뿐, 네가 귀찮은 게 아니다.”
예에. 무슨 차이인진 모르겠네요.
일리야는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연구실 문을 열었다.
“들어와라. 네가 흥미로워할 만한 책을 줄 테니.”
혹시 나를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려고 이러는 건가?
그가 날 빤히 쳐다보았다.
“왜 웃지?”
“제가요?”
“그래. 너는 날 보고 자주 웃는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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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의 자강두천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웃은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래서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나 스스로도 의문스럽게 이유를 댔다.
“그야… 즐거우니까요?”
그러자 일리야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 교수님도 지금-”
웃으셨어요, 라고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콰앙! 쿠드드드드득! 콰드드득!
정확히 펠릭스 교수의 연구실 쪽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데육시 던전에 휘말리기 전에 축제를 휩쓸었던 마법 식물이 문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아! 사람 살려!”
덩굴줄기에 발이 돌돌 감긴 펠릭스 교수도 함께였다.
덩굴은 과녁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내게 뻗어왔으나 돌연 엄청난 속도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일리야가 마법으로 덩굴을 태우고 있었다.
“자, 잠깐만! 나 먼저 내려주고… 끼악!”
모든 덩굴이 타들어 갔으니 당연히 펠릭스 교수의 발목을 휘감고 있던 줄기도 몽땅 재가 되었다.
펠릭스 교수는 볼품없이 바닥에 추락해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교수님?”
나는 제자 된 도리로 펠릭스 교수를 일으켜주며 물었다.
그러자 펠릭스 교수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나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게 말이지, 덩굴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멋대로 폭주하지 뭐야? 정말 깜짝 놀랐어.”
교수가 놀라든 말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연구실 쪽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동물들은요?”
“으응, 다들 자연으로 돌려보내서 지금은 아무도 없어.”
휴. 다행이었다.
펠릭스 교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날 걱정해주는 사람은 없구나…….”
펠릭스 교수가 둥근 안경 안으로 손을 넣어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콕콕 찍는 시늉을 했다.
나는 대번에 눈을 홉떴다.
“대형 사고를 쳐놓고 그런 소리가 나오세요? 일리야 교수님이 안 계셨으면 어쩔 뻔했어요?”
“에이. 그러면 우리 천재 마법사인 테레제가 해결했겠지!”
“틀린 말은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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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를 혼내도 괜찮은 거냐고 지적해야 할지 얼렁뚱땅 천재 소리에 넘어가는 걸 지적해야 할지 감이 안 오네]
그때 일리야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펠릭스 교수를 불렀다.
“펠릭스 교수. 이건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
“응? 뭘 처리… 헉!”
덩굴이 폭주한 여파로 펠릭스 교수의 바로 옆 방인 일리야 교수 연구실 벽까지 부서져 있었다.
일리야는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걸 싫어했다.
특히 그게 펠릭스 교수 같은 사고뭉치면 더더욱 끔찍하게 여겼다.
일리야가 펠릭스 교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하하. 보수 공사를 해야겠네?”
“…….”
“아니면 일단 커튼이라도 쳐둘까?”
“…….”
“히잉. 테레제, 어떡하지?”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시죠?
“저는 연금술 연구실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안 돼! 날 두고 가지마아아아!”
“질척거리지 마세요. 그럼 이만.”
나는 처참한 사고 현장에서 쏙 몸을 뺐다.
레이니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고 학생회실에 들러서 오늘 임무는 없는지 게시판도 확인한 후 첫 수업 전까지 책을 읽으러 1층 도서관에 갔다.
“오늘따라 사람이 아무도 없네.”
도서관은 원래도 인기가 없지만, 오늘은 이용자가 0명이었다.
“흐음.”
원래라면 좀 더 천천히 낙원의 문을 열어볼 계획이었는데, 방금 펠릭스 교수가 사고 친 일을 떠올리자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계속 던전이 열렸었지.”
다음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로 인해 낙원의 문을 열 타이밍을 지나쳐 버린다면?
‘그건 안 되지.’
낙원의 문은 1층 도서관 제일 끝 개인 열람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 도서관에 사람도 없으니 열어보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차원의 열쇠를 꺼내 개인 열람실이 있는 구석으로 이동했다.
“지금 바로 이스터에그를 확인해볼게요.”
[성좌들이 이곳의 이스터에그는 무엇일지 궁금해합니다.]
발할라의 이스터에그는 전대 스콰이어 공작의 비자금이나 전설의 물약 같은 사기 아이템이 아니었다.
“개인 열람실을 열면 에메랄드빛 해변과 백사장이 펼쳐져요. 해변에 맞게 의상도 바뀌고요.”
보너스 일러스트를 감상할 수 있는 이스터에그였다.
원래 이스터에그로 유의미한 아이템을 숨겨두는 일이 드문 경우였다.
그러니 만일 낙원이 나타나지 않으면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잠깐 해수욕을 즐기고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문고리에 차원의 열쇠를 갖다 대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