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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26화 (127/277)
  • 126화

    * * *

    축제가 끝난 이후로는 소소한 문제들 몇 가지만 제외하면 더없이 평화로운 나날이 흘렀다.

    한데 그건 적어도 나한테는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다.

    여유가 있으니 자꾸 쓸데없는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끄흑… 끕… 으흐흑…!”

    나는 밤만 되면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울었고 다음 날에 붕어눈이 되어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하아. 이 짓도 못 해 먹겠네.”

    이별의 약은 시간이라고 하지만, 좀 더 효과가 빠르고 확실한 극약처방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질질 짜며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데미안에게도 실례인 일이고.’

    그를 멀리서 볼 때마다 혼자 아련해지기나 하고 말이야.

    데미안은 영문도 모르고 얼마나 불쾌하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선택한 극약처방은 술이었다.

    다행히도 내게는 축하할 명분이 있었다.

    바로 클예부가 매출 1위를 달성하고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일이었다.

    “발할라 최고의 사교 클럽 클예부여, 영원하라!”

    “영원하라~!”

    클예부는 매일 같이 모여 축배를 들었다.

    “짠! 여기를 보세요, 여러분~! 오늘 특별한 손님이 오셨어요! 바로바로 클라이드 님이랍니다~!”

    “꺄아아아!”

    축제 이튿날에 일당백을 하며 열심히 도와준 클라이드도 한 번은 술자리에 참석한 적 있었다.

    “우리 술 게임 해요!”

    영애들은 내가 알려준 몇 가지 술 게임에 중독됐는지 술자리마다 게임 하자고 졸라댔다.

    “술 게임이 뭔데?”

    클라이드의 순진한 물음에 영애들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건 마시면서 배워야죠~!”

    띠링!

    [성좌 ‘프로훈수러’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참 좋은 거 가르쳤다…]

    “크흐흠.”

    아무튼 그날 클라이드는 이러려고 클예부를 만든 거냐며 진절머리를 내더니 다시는 끼지 않았다.

    띠링!

    [성좌 ‘클서방’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사실상 클라이드는 술자리에 이용당한 거지]

    나는 클예부에게 노상에서 벌이는 술판의 즐거움도 전파했다.

    “이 경치, 이 바람, 이 햇살… 안주가 따로 필요 없네요.”

    “어우, 점심부터 취하네.”

    “자자, 한 잔 더~!”

    제국의 미래가 참 밝았다.

    그때 근처에 있던 영애들이 우리보고 들으라는 듯이 쩌렁쩌렁 소리쳤다.

    “어휴, 술 냄새가 여기까지 풍기잖아!”

    “클예부 수준도 참 알만하네요.”

    “저런 클럽이 우리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요. 앞으로 발할라가 어찌 되려고 그러는지.”

    교복에 달린 황금 장미 브로치를 보니 그들은 전부 데미사였다.

    데미사는 하필 우리 근처에서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미모사도 있었다.

    미모사는 독사 같은 눈으로 날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실은 던전에서 돌아온 이후 내내 저런 눈빛이었다.

    “감히… 감히 우리 데미안과…!”

    자리를 단단히 잘못 잡은 것 같네.

    까르르 종달새처럼 웃고 떠들던 클예부는 데미사의 시비에 눈빛이 바뀌었다.

    “아, 술맛 떨어지네.”

    순식간에 악귀가 빙의한 것만 같았다.

    “어디 패배자들이 명예의 전당에 오른 우리 클럽 근처에서 차를 마셔?”

    “역시 평화의 날이 너무 길었던 거예요.”

    이러다가 전쟁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술병을 쥐고 벌떡 일어나 미모사에게 다가갔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오는 거야!? 윽, 술 냄새… 너 취했니?”

    “하나도 안 취했어.”

    미모사는 물론 데미사 회원들이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원래 문제가 생기면 수장끼리 싸워야지.”

    콸콸콸!

    빈 물잔에 독주를 들이붓자 미모사가 기겁했다.

    “뭐 하는 짓이야!”

    “자자, 한잔 들어. 주량으로 대결하자고.”

    “너한테 일방적으로 유리한 대결이잖아! 그리고 누가 독주를 무식하게 잔뜩 부어서 마시니?!”

    미모사의 앙탈이 심했다.

    “알았어. 그럼 맛있게 제조해줄게.”

    이들은 마침 좋은 찻잎으로 홍차를 달여 유유히 즐기고 있었다.

    나는 홍차에 냅다 독주를 섞어버렸다.

    “꺄아악! 내 홍차! 정말 너 미쳤어, 테레제?!”

    “미모사 님!”

    데미사는 홍차 섞은 술을 든 나를 불한당 취급하며 우르르 에워쌌다.

    그러자 클예부도 기다렸다는 듯이 우다다 달려와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미모사의 입술에 잔을 가져다 댔다.

    “홍차에 술을 섞어서 마시면 맛있어.”

    사실 모른다. 어디선가 인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술이라고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있을 뿐.

    “딱 한 모금만 마셔 봐.”

    미모사는 질색하는 눈으로 날 노려보면서도 코를 움찔거렸다.

    후후. 향이 나쁘지 않겠지.

    ‘미모사도 테레제만큼은 아니지만 주당이거든.’

    원래 멍청한 악역은 술을 좋아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술 먹고 사고 치니까.

    물론 지금은 사고 치라고 술을 먹이는 건 아니었다.

    미모사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한 모금 마셔 보더니, 연보라색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그러더니 아예 내 손에서 잔을 뺏어 들고 시원하게 들이켰다.

    꿀꺽꿀꺽!

    “…흥, 나쁘진 않네. 한 잔 더 줘봐.”

    새초롬한 눈빛에서 알코올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나는 한 잔 더 제조해준 뒤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는 데미사를 향해 손짓했다.

    “자자, 다들 앉아봐. 한 잔씩 말아줄 테니까.”

    데미사는 기묘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영 적응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일단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가 마실 것도 한 잔 말아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제는 술을 마실 때 서로 합이 딱딱 맞는 클예부 영애들도 나를 따라 술잔을 들었다.

    데미사 회원들만 멀뚱히 손에 술이 섞인 찻잔을 들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첫 잔은!”

    내가 외치자 클예부가 화답했다.

    “원 샷!”

    그리고 술을 쭉 들이켰다.

    띠링!

    [성좌 ‘꼰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악습 냅다 전파하기]

    우리가 원 샷하자 데미사도 얼결에 따라서 술을 홀짝였다.

    “어머.”

    “으악! 독해!”

    몇몇은 취향이 맞는지 좋아했고 또 몇몇은 콜록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술을 즐기지 않는 영애들은 음료를 대신 마시긴 했지만 엉겁결에 우리와 뒤섞여 술자리를 하게 된 걸 마다하지는 않았다.

    가만 보니 내심 클예부의 분위기를 부러워했던 것 같았다.

    하긴. 한창 술 마시고 엉망진창으로 취해 부모님 얼굴도 못 알아봐야 할 나이들이었다.

    한데 들끓는 청춘에 고상한 자태로 차나 마시고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나는 기꺼이 술이라는 이름의 자유를 모두와 공유했다.

    “적셔! 적셔!”

    띠링!

    [성좌 ‘로판중독영애’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아… 두통이…]

    어느새 교정의 반듯한 잔디밭에서 거대한 술 파티가 벌어졌다.

    한창 분위기가 달아올랐다가 하나둘씩 고꾸라지기 시작했을 때, 각 가문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고주망태가 된 영애들을 데려갔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아가씨! 누가 낮부터 술을 이렇게 자셔요!”

    “여기 우리 아가씨 업는 것 좀 도와줘요!”

    나는 멍한 눈으로 사용인들이 술자리를 정리하는 걸 보다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기숙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으으… 길이 이렇게 멀었나…?”

    도저히 걸어갈 힘이 없어 이대로 바닥에 누워 데굴데굴 굴러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좀 쉬었다가 가야지.’

    앉을만한 곳이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자 침대처럼 안락해 보이는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잠들 준비를 했다.

    원래 술은 자고 일어나면 깨니까.

    ‘응. 이성적인 생각이야. 역시 술에 하나도 취하지 않았어.’

    5월의 마지막 날.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훑었다.

    잎사귀가 사각사각 부딪치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 잠이 솔솔 왔다.

    그때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르더니 부드럽게 흔들렸다.

    누군가가 날 안아 들어 이동하고 있었다.

    어라. 라울이 언제 또 학교에 왔지?

    나는 당연히 라울이 술 취한 나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는 거로 생각하고 웅얼거렸다.

    “끄응… 아버지… 저 조금 마셨는데….”

    잔소리를 방지하기 위해 변명하자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마셨네, 테레제. 내가 스콰이어 공작님으로 보이는 걸 보면.”

    “근데 하나도 안 취했어요…. 걸을 수 있어요….”

    “내가 기숙사까지 데려다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품에 조금 훌쩍거렸다.

    * * *

    다음날 눈을 떴을 때 꽤 오랜만에 호들갑스러운 코멘트들을 발견했다.

    [성좌 ‘데릴사위 데미안’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이 나]

    [성좌 ‘데미안 그만 잘생겨’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야]

    머리 아픈 코멘트들에 숙취만 더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으으, 죽겠다.”

    내가 숙취를 호소하자 꿀물을 가져온 엘로이즈가 잔소리했다.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드셨어요?”

    아침부터 시작된 엘로이즈의 타박에 나는 당당히 음주 사유를 댔다.

    “날이 좋으니까 그렇지.”

    “아가씨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에 술을 드시잖아요.”

    띠링!

    [성좌 ‘나 이거 알아’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엘깨비]

    “…….”

    하지만 축배를 들 일이 많아서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어제 축배를 든 사유는 이러했다.

    ‘상태창.’

    [테레제 스콰이어]

    설명: 스콰이어 공녀

    나이: 22세

    마법 등급: A+

    지능: A

    마력: A (99,999/99,999)

    바로 지능이 A급이 된 것!

    총 마법 등급도 무려 A+였다.

    이제 나는 명실상부 초엘리트 마법사가 되었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업적을 어찌 축하하지 않고 넘어가겠는가?

    “기말고사가 기다려져. 후후후후.”

    “아직 술이 덜 깨셨나 봐요…….”

    내가 뜨끈한 수프로 해장하고 있을 때, 엘로이즈가 환기를 위해 창을 열며 말했다.

    “벌써 6월이라니, 시간이 참 빨리 흐르는 것 같아요.”

    “그러네. 시간 참 빨라.”

    6월은 짝수 달이었으니 낙원의 문이 활성화되는 때였다.

    남은 장소는 황궁, 데미안의 집, 발할라로 세 군데가 전부.

    앞선 두 장소는 당장 가보기에는 어려웠으니 이번에는 발할라에 있는 낙원의 문을 열어볼 생각이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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