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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25화 (126/277)

125화

스콰이어는 오랜 세월 영지전을 통해 벌어들인 배상금과 땅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지닌 가문이었다.

비록 비전 마법을 잃은 지 100년이나 흘러 과거의 영광이 많이 바래기는 했지만, 땅은 사라지지 않는 법.

스콰이어 소유의 도로나 도시를 이용하지 못하게 봉쇄하는 순간 대단히 곤욕스러워질 가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히 카펜터 공작도 스콰이어가 가진 도로들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애들 싸움에 가문을 끌어들이는 것이오?!”

“이건 애들 싸움이 아니오. 카펜터 공작 네놈의 멍청한 대처가 일을 키운 것이지.”

“라울 스콰이어!”

“남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지? 네 비천한 입에서 내 이름을 들으면 기분 더러우니까.”

“네놈은 학부 시절부터 최악이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그리고 나이가 들 대로 든 동갑내기 중년의 공작 둘은 이사장실에서 주먹다짐을 벌였다.

그날 바로 수도 전역에 두 사람이 싸웠단 소문이 쫙 돌았다.

풍문에 의하면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순수 무력 싸움에서 카펜터 공작이 일방적으로 밀렸다고 한다.

아무튼.

혼란스러운 일들이 연달아 터지며 모두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릴 동안 데미안은 다른 곳에 온 신경을 몰두하고 있었다.

바로 테레제가 작성한 던전 보고서였다.

보고서는 검토가 끝나면 발할라의 던전 기록 보관실에서 열람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작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이상할 정도로 힘들었다.

던전에서 의식이 깨어났을 때 어째서 테레제와 눈물에 젖은 채 입술을 겹치고 있었는지, 왜 저를 보며 오열했는지 궁금했다.

정말이지 화가 날 정도로.

벌컥!

기록 보관실에 테레제의 보고서가 들어온 당일 오전.

데미안은 평소보다 훨씬 이르게 등교하여 곧장 기록실로 향했다.

가장 최신 보고서를 비치해두는 자리에 그토록 확인하고 싶었던 보고서가 꽂혀있는 걸 확인한 순간 데미안은 잠시 망설였다.

이 보고서를 읽는 게 과연 제게 도움이 될까?

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는 테레제와 깊게 얽혀서는 안 돼.’

뇌리에서 시끄러운 경종이 울렸으나 그의 손은 이미 보고서를 빼 들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자신이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10살의 고아인 자신을 후원하는 테레제. 그녀와의 첫 만남. 자신의 비이성적인 집착. 시간의 뒤틀림과 자신이 한 나쁜 선택들.

“암흑조직이라니.”

그 대목에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던전에서 새롭게 구성된 자신도 지금의 저와 딱히 다를 게 없는 쓰레기였던 모양이었다.

한데 테레제는 ‘데미안’을 포기하지 않았다.

몇 차례 자신이 차갑게 거부한 정황이 읽혔는데도 끊임없이 손을 내밀었다.

‘과연 전부 사실일까?’

던전 보고서는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기에 조작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다만 그랬다가 ‘눈’이 좋은 황제에게 찍혀 참수당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이상할 정도로 희생적인 테레제의 태도가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너무나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장 이상했던 건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방법이었다.

“완벽한 호의를 얻은 후 입을 맞췄을 때 기억이 돌아온다…….”

완벽한 호의.

에두른 표현이었으나 보고서 내용을 쭉 읽으며 파악한 문맥상 자신이 테레제를 사랑했고 결혼을 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끈.

데미안은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불쾌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언가 안에 갇혀 몸부림치고 있는 것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과 증오가 끓어올랐다.

“…….”

데미안은 보고서를 덮으며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 ‘데미안’은 자신이 아니다.

악마가 제 육신으로 장난을 쳐 만들어낸 찌꺼기 같은 존재일 뿐.

그러니 이 데미안이 한 행동과 선택은 저와 무관했다.

어쩌면, 혹시, 만에 하나와 같은 가정은 필요치 않았다.

데미안은 던전 보고서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려다가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여기서 널 보네, 클라이드.”

클라이드가 손에 쥔 던전 보고서를 들어 올렸다.

“궁금했거든.”

원본은 데미안이 보고 있었기에 그가 집어 든 것은 사본이리라.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생각했다.

‘기분 나쁜 새끼.’

기록실의 규모가 방대하기는 했어도 이렇듯 서로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그런 일에 특화된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거나, 인간 수준으로는 쉽게 감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 쪽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동시에 던전 보고서를 한 자리에 꽂아 넣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클라이드는 데미안을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곧장 걸음을 돌렸다.

하나 걸음을 옮기기도 전, 데미안의 말에 발이 묶였다.

“테레제는 참 다정한 것 같아.”

클라이드는 삐딱한 시선으로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다정? 헛소리를 하는군.”

“진심인데. 아, 너한텐 다정하지 않았던 건가?”

데미안이 신경을 확 긁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클라이드는 아예 몸을 돌려 데미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다정한 게 아니라 미친 거겠지. 타인 따위를 위해 대신 죽어주고, 죽음을 무릅쓰다니.”

이번에는 데미안의 미소가 삐뚜름해졌다.

죽음을 무릅썼다는 것은 저를 겨냥한 말이었으니.

데미안이 물었다.

“넌 테레제를 믿어?”

“어.”

몹시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러는 넌 테레제를 믿지 않는가 보군. 아, 믿고 싶지 않은 건가?”

클라이드의 빈정거림을 들은 데미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런 유치한 기 싸움을 하고 있는 건지. 시간이 아까웠다.

“마음대로 생각해.”

데미안은 쓸데없는 시비에 응하지 않겠다는 듯 기록실을 나왔다.

하나 차가운 비웃음이 걸린 입술과 달리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울컥 솟았다.

클라이드가 가진 견고한 신뢰를 어떻게든 부숴버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럽게 달구어졌을 때.

아래층에서 계단을 오르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감지되었다.

이건 테레제의 기척이었다.

데미안은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목적지를 바꾸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데 바로 곁에 누군가가 따라붙고 있었다. 클라이드였다.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위층으로 올라오던 테레제를 불렀다.

“테레제.”

“테레제!”

“악! 깜짝이야.”

테레제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며 어리둥절하게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나한테 볼일 있어?”

두 사람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테레제를 독점하고 싶은 거였지, 용건이 있어 그녀를 찾은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클라이드였다.

“점심 같이 먹자.”

그러자 테레제가 뺨을 긁적였다.

“어쩌지? 나 선약 있는데.”

그때 막 학교에 도착해 강의실로 가던 리비가 활기찬 목소리로 테레제를 불렀다.

“언니!”

리비는 언니에게 깡충깡충 달려와 와락 팔짱을 꼈다가 층계참에 나란히 선 클라이드와 데미안을 발견하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 안녕하세요. …언니, 연구실로 가는 길이죠?”

“응. 너도 레이니한테 갈래? 오늘 점심도 같이 먹기로 했거든.”

“네! 얼른 가요.”

테레제가 자리를 뜨기 전 두 남자에게 통보했다.

“난 먼저 가볼게.”

그들은 테레제와 리비를 보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

클라이드는 오랜만에 던전 대신 학교에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학생회 일도 하고 수업도 듣고 종종 테레제를 찾아가기도 했다.

한데 테레제와 밥 먹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요즘은 동생과 사이가 부쩍 친밀해졌는지 어딜 가든 끼고 다니는 게 상당히 눈꼴시었다.

클라이드는 한적한 복도에서 리비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리비는 그의 눈빛이 사냥감을 발견한 양아치 같다고 느끼며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렇게 도망치듯 후다닥 지나치려는데 클라이드가 손을 까딱거리며 불렀다.

“야, 테레제 동생. 이리 와 봐.”

하는 행동만 보면 학생회장인지 양아치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제 이름은 리비인데요….”

클라이드는 리비의 중얼거림은 무시하고 제 용건을 말했다.

“오늘 테레제랑 점심 먹지 마.”

“네에?”

“대신 학생회장의 권한으로 원하는 거 들어줄 테니까.”

“원하는 건 딱히… 아.”

리비는 뭔가 생각난 표정으로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그러면 저 자카리 씨랑 같이 점심 먹을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물론 자카리 씨가 원한다면요.”

“자카리를 만난 적 있나?”

리비는 뺨을 붉히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네에. 도움받은 게 있어서 꼭 답례하고 싶어서요….”

자카리는 사회성, 교류, 사교 등의 개념이 아예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런 면에서 딱히 일가견이 없는 클라이드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무릇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카리의 무미건조한 표정과 말투에서 벽을 느끼고 선뜻 친해질 생각을 하지 못할 텐데.

‘과연 테레제 동생이라 그런가, 얘도 좀 이상한데.’

“거절할 것 같진 않지만 물어보지. 그럼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가?”

“네!”

클라이드는 리비를 격퇴한 후 이번에는 레이니를 찾아갔다.

레이니는 연구실까지 찾아온 클라이드의 앞으로 엉거주춤 다가서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연구실까지 어쩐 일로…?”

“내가 오늘 테레제랑 같이 점심을 먹고 싶은데, 네 양해를 구하려고.”

기꺼이 양해해주지 않으면 연구실을 폭파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 그러시구나….”

레이니는 어쩌다 보니 테레제와 점심 메이트가 되긴 했지만 사실 혼자 먹어도 상관없었다.

그랬기에 외려 역제안했다.

“선배님이 학교에 계실 때는 테레제 선배랑 점심 안 먹을게요. 어떠세요?”

클라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말이 통하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학생회로 찾아와.”

레이니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손을 맞잡고 힘차게 악수했다.

“좋아요. 제가 더 협조할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그렇게 점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제 방해꾼은 모두 치웠다.

클라이드는 전공 수업이 끝나자마자 테레제의 앞을 가로막고 맡겨 놓은 돈을 찾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요구했다.

“오늘은 나랑 점심 좀 먹자.”

“…? 그래.”

테레제는 오늘 점심 약속이 없어서 혼자 샌드위치를 먹으며 책이나 읽으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클라이드가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두 사람은 테레제 식당으로 향했다.

“너랑 밥 한번 먹기 참 힘들다.”

“무슨 소리야?”

클라이드가 피식 웃었다.

“몰라도 돼.”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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