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 *
클라이드는 쓰나 마나 한 은빛 나비 가면으로 얼굴의 일부를 간신히 가리고 있었다.
눈부신 은발과 투명하게 빛나는 연푸른 눈동자, 그것들을 더욱 수려하게 빛내는 가면까지.
“저기 윌로우의 소공자 아닌가?”
“어머머, 그렇네요!”
“이야, 세상에서 가장 많은 부인을 거느린 남자로군. 부러운데?”
사람들은 전부 클라이드를 알아보았다.
얼굴을 꼭꼭 감춘 다른 게임 마스터들과 달리.
“클라이드 니임! 코인이 다 떨어졌어요! 어서 복사해주세요!”
“클라이드 님! 표정이 너무 굳어있어요. 활짝 웃어주세요~”
클라이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코인을 대량으로 복사하는 마법을 선보이는 진기명기 마법쇼를 펼치고 있었다.
그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어째서 나만 일하는 것 같지?”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클라이드가 저 혼자만 지나치게 바쁘다고 느끼는 원흉이 있긴 했다.
“테레제 님, 어떡해요? 코인이 모자라요!”
“클라이드가 복사해줄 거야!”
“테레제 님! 저기서 싸움 붙었어요!”
“클라이드가 처리해줄 거야!”
“테레제 님!”
“클라이드한테 가 봐!”
저게 진짜…….
클라이드는 테이블을 뒤엎으려다가도 꾸역꾸역 요청을 다 들어주었다.
그래도 경고는 잊지 않았다.
“언젠가 이 클럽 박살 내줄 테니까 지금을 잘 즐겨둬. 알겠어?”
“꺄르륵!”
미치광이 소굴인 클예부는 자신의 경고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자지러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클라이드는 ‘발할라 오락실’의 새로운 명물이 되어 더 많은 손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덕분에 테레제와는 말 섞을 겨를도 없을 정도였다.
대체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데미안과 어땠길래 그를 보고 눈물을 흘린 걸까?
게다가 키스라니, 빌어먹을.
차라라라라락!
클라이드의 분노에 반응한 카드들이 허공에 휘날리며 나비 그림이 입혀졌다.
“오오!”
“진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네요. 아름다워라.”
다행히도 사람들은 일종의 이벤트라고 생각하고 환호했다.
“클라이드.”
그때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와 저도 모르게 저항 없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검은 나비 가면을 쓴 테레제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쉬러 가자.”
끔찍하게 나빴던 기분이 매우 간사하게도 금방 괜찮아졌다.
그는 순순히 테레제를 따라 휴게실로 향했다.
테레제가 가면을 벗으며 물었다.
“갑자기 왜 성질부렸어?”
“뭐가.”
“방금 마력을 남발했잖아. 일을 많이 시켰다고 그래?”
클라이드는 바보 같은 테레제에게 기분이 나빴단 사실을 간파당하자, 미묘한 자괴감을 느꼈다.
이 바보는 평소에는 그렇게 눈치가 없더니 이런 건 어떻게 알아차리는 건지.
그러면서도 또 성질부린 이유는 맞추지 못하는 게 테레제다웠다.
“수고해준 값은 치를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
어쭈. 이제는 어르고 달래네.
클라이드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수고해준 값을 얼마나 제대로 치르려고 날 부려 먹지?”
테레제는 대번에 뚱한 표정으로 조그맣게 꿍얼거렸다.
“뭐야, 부자면서……. 있는 것들이 더하다더니.”
“다 들린다.”
테레제는 괜히 말을 돌렸다.
“이제 바쁜 건 좀 지났어? 언제까지 던전만 돌아다닐 생각이야?”
“글쎄.”
할아버지가 날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까지 그러겠지.
클라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테레제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더니 로브를 벗었다.
“이왕 축제 기간에 돌아왔으니 즐겨야지. 나가자. 내가 게임 가르쳐줄게.”
그는 누가 누굴 가르치냐고 대꾸하며 로브를 벗었다.
그들은 함께 발할라 오락실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게임들을 즐겼다.
“야! 방금 나 일부러 건드렸지?”
“누가 할 소릴. 네가 먼저 방해했으면서 뻔뻔하군.”
테레제는 생각보다 승부욕이 강했다. 그리고 결과를 잘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해. 다시. 방금 바람이 불어서 그랬어.”
“실내인데 어디에서 바람이 부는데?”
“그러니까. 누가 창문을 열었지?”
실은 변명이 아니라 진짜로 바람이 불었다. 클라이드가 마법으로 일으킨 바람이었다.
그는 게임 승패에 관심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건 오직 하나. 테레제의 상태였다.
“…….”
테레제는 조금이라도 생각할 틈이 나면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충격이 좀처럼 수습되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무력하고 우울하게 보였다.
그때마다 클라이드는 일부러 반칙하거나 마법으로 테레제의 관심을 끌었다.
“으악! 뭐야, 지진이라도 났나? 갑자기 이게 왜 쓰러져!”
뭐, 이런 식으로.
테레제는 “굿이라도 해야 하나….”라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헛소리하는 걸 보면 상태가 아주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신경 쓰였다.
이 맹한 얼굴에 또 눈물이 흐를까 봐, 그게 짜증 날 정도로 신경 쓰여서 여기까지 따라와 성격에 맞지도 않는 호구 노릇을 했다.
클라이드는 문득 테레제의 왼손을 힐끗 확인했다.
그나저나 자신과 나눠 꼈던 결혼반지는 어디로 갔을까?
루비 반지는 어디서 난 거지?
이상하게도 그 반지를 테레제가 직접 사지 않았으리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보자마자 몹시 불쾌해져 저도 모르게 집어던지고 말았다.
클라이드는 테레제와 함께 가장 인기 있다는 ‘클라이드 카드 뒤집기 게임’ 부스로 향하며 물었다.
“반지는 어쨌어?”
그러자 테레제가 저를 미친놈 보듯 보았다.
“네가 버렸잖아.”
“그거 말고 우리 반지 어쨌냐고.”
“아, 그거? 없어졌는데?”
“뭐? 없어져?”
제게 아직 멀쩡히 존재하는 반지가 테레제의 것만 사라졌을 리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거야?’
클라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반지를 줄에 걸어 목걸이로 하고 다니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테레제는 추궁당한 게 퍽 억울한 모양인지 제 손을 붙들어 요리조리 확인했다.
“뭐야. 너도 없으면서.”
“……됐어. 말을 말자.”
그들은 카드 뒤집기 게임장 앞에 도착했다.
그는 심드렁한 눈으로 사람들이 열을 내며 게임 하는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1등은 뭘 주는데?”
그러자 영애들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테레제 님을 극진히 모실 수 있는 기회와 클라이드 카드 세트랍니다!”
어처구니없는 상품이었다.
클예부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잔뜩 들뜬 표정으로 테레제에게 옹기종기 달라붙어 속닥거렸다.
“테레제 님 이건 기회예요!”
“아냐. 기회 아니야.”
“저희가 팍팍 밀어드릴게요!”
“그거 나 절벽으로 미는 거야. 하지 마.”
“화이팅!”
그 사이 클라이드는 코인을 9장 내고 [4×4]부터 차례로 깨부수기 시작했다.
[4×4 1위 클라이드 윌로우]
[8×8 1위 클라이드 윌로우]
[12×12 1위 클라이드 윌로우]
그는 단 한 번씩의 플레이로 모든 단계의 1위 기록을 갈아치웠다.
“와아아아!”
“과연 저래서 이런 팬클럽을 거느리는 거였군!”
“나도 오늘부터 클예부가 될래!”
더군다나 이제 폐장할 시간이라 클라이드가 1위 확정이었다.
플레이어들은 그 사실에 분해하기는커녕 재미있어했다.
“껄껄! 과연 남편은 달라!”
클라이드는 문득 짙은 회의감이 들었지만 인내했다.
그는 괜한 승부욕으로 1위가 된 게 아니라 목적이 있었다.
“1위 했으니까 소원 들어줘.”
“내가 왜?”
테레제는 불합리한 요구에 미간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그럼 내가 널 극진히 모셔줄까?”
극진히 모셔준다는데 왜 이렇게 위협적일까?
테레제는 일단 들어나 보자는 투로 떨떠름하게 물었다.
“…무슨 소원 빌 건데?”
“나중에.”
클라이드는 테레제의 머리 위로 손을 툭 얹었다.
조그만 머리로 그만 끙끙 앓으라는 듯이.
“나중에 말할 테니까 긴장하고 있어.”
신경 쓰이는 일을 만들어두면 쓸데없는 생각을 좀 덜 하겠지.
* * *
축제는 성황리에 끝났다.
아니, 역대급 화제성을 일으켰다.
테레제와 데미안이 고작 둘이서 1시간 만에 던전을 클리어한 일이 엄청나게 회자 되어 연일 관심이 증폭된 게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클예부의 기상천외한 행사였다.
발할라 오락실을 다녀온 귀족들은 너도나도 비슷한 게임을 도입해 사교계에 새로운 유행을 퍼뜨렸다.
축제 중 매출 1위는 당연히 클예부였고 학교 설립 이래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
클예부는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러나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또다시 학교에 던전이 열렸단 소식을 들은 라울이 정식으로 항의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온 일이 사교계를 휩쓸었다.
듣자 하니 이사장실에서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고.
그런 와중에 카펜터 공작까지 학교를 찾아왔다.
카펜터 공작은 세실리아에게 망신을 준 사람이 리비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몹시 노여워했다.
“리비 스콰이어를 당장 퇴학시키십시오!”
이사장은 그런 카펜터 공작에게 웬 진술서를 내밀었다.
“예술과 교양 사교 클럽 회원들이 작성한 진술서요, 카펜터 공작.”
“진술서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실리아 양이 리비 양을 따돌린 정황 증거란 말이오. 더 자세히 파악하고 있지만, 만일 진술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세실리아 양은 물론 가담한 학생은 전부 정학 처리될 것이오.”
세실리아가 그저 그런 가문이었다면 당장 퇴학 당했을 일이었다.
하나 이사장은 카펜터 공작가의 체면을 생각해서 정학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 사실을 들은 라울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계산이 깔린 행동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라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사장의 기억으로, 라울은 과거 발할라 학생이었을 때도 걸출한 망나니였고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라울이 차갑게 분노했다.
“앞으로 카펜터 공작가와의 모든 연을 끊겠소. 다시는 스콰이어 가문이 운영하는 유통망을 사용하지 못할 거요.”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