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 *
어느 날, 얼어붙은 호수에서 썰매를 탔다.
집으로 돌아온 데미안이 “그곳에도 당연히 겨울이 있겠죠?”라고 물었다.
어느 날, 시장이 열린 마을 광장으로 나가 먹을 것을 잔뜩 사 왔다.
데미안은 “‘그’ 데미안은 요리를 잘해요? 뭘 먹어봤어요?”라고 물었다.
내가 아이스 커피를 마셨다고 말하자 “거긴 좀 이상한 세계네요.”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산책하던 중 데미안이 “발할라는 어떤 곳이에요?”라고 물었다.
내 설명을 들은 데미안은 “‘그’ 데미안은 우수한 모양이네요. 나와는 달리.”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데미안은 사랑하지 마세요.”
데미안은 참고 참았던 불안과 증오를 터뜨렸다.
“데미안은 나밖에 없어요. 나만 데미안이에요. 당신이 알고 기억해야 할 데미안은 나밖에 없다고!”
데미안은 현실을 잊으려, 억지로 행복한 날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도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화를 내고 울고 체념하기를 반복할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같잖은 위로와 사과밖에 없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나는 데미안의 절망에 빠르게 젖어 들어 언제부터인가 진짜 현실을 잊어버렸다.
그렇게 우리의 날은 대체로 슬펐고 때때로 행복하게 흘렀다.
쨍그랑!
바닥에 부서진 잔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파편에 긁힌 다리에서는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또 새 걸 사야겠네.”
요즘 이런 일이 잦았다.
속이 매스꺼워 먹은 걸 다 게워내다 보니 손아귀에 힘이 없어서 그런 듯했다.
깨진 조각을 마법으로 없애버린 후 거실로 나가자 데미안이 연고를 들고 나타났다.
이틀에 한 번은 다치니 그도 익숙해진 것이다.
데미안은 다리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더니 문득 차분한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벌써 봄이네요.”
그는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부터 내게 과할 정도로 애정을 퍼붓거나 증오를 터뜨리며 감정의 격랑을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이런 데미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바깥은 그의 말대로 영원할 것 같았던 싸늘한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꽃이 피고 있었다.
“날씨도 좋으니 같이 나가서 새로운 잔을 사 올까?”
내 제안에 데미안은 걸어도 괜찮을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상처를 다시금 살피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랜만에 나가서 데이트해요.”
나는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오늘의 데미안은 기분이 좀 괜찮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꽃나무 사이를 걸었다.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고 간만에 감정이 요동치지 않고 평온했다.
휘청!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새까매졌다.
엄습하는 두통에 신음하며 비틀거리자 데미안이 황급히 날 부축하는 게 느껴졌다.
“나 괜찮아.”
요즘 들어 현기증이 좀 잦게 일어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를 안심시키려 식은땀으로 이마가 젖은 채 힘없이 웃었다.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가 봐.”
내 농담에 데미안은 웃지 않았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무에 기대어 앉은 내 곁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보내줄게요.”
“…뭘?”
나는 괜찮았다. 정말로 아직 괜찮은데 그가 날 떠나보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요, 부인. 이제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아요.”
“왜 그래? 아직 시간 남았어.”
여름도, 가을도, 네 생일이 오기 전까지의 겨울도 남아있었다.
데미안이 고개 저었다.
“더 길어지면 위험해요.”
“하나도 안 위험해.”
“언제부터 음식을 못 먹었어요?”
“…….”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잔 날은 며칠이나 되고요?”
데미안이 아프게 미소 지었다.
“먹으면 자꾸 토해내는 거 알아요. 최근에 제대로 잠든 적도 없잖아요. 제가 부인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렇지 않아.”
“당신이 야위어가는 걸 보는 게 더 아파요. 내가 사라지는 것보다 그게 더 싫어.”
“데미안…….”
나는 그의 입술을 막으려 했으나 손쉽게 손을 붙들렸다.
“마지막 인사로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는데, 하나 말곤 생각이 안 나요.”
데미안이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뺨 위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눈물이 흠뻑 흘러내렸다.
“나도 사랑해.”
내 대답에 데미안이 웃었다.
“거짓말.”
그 말을 끝으로 눈물에 젖은 입술이 포개졌다.
벌어진 틈으로 짠맛이 섞여들었음에도 아리도록 달았다.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쥐어 비틀어대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졌다.
데미안의 젖은 눈꺼풀이 서서히 들리며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의아하게 뜬 눈에는 나를 향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테레제?”
그가 나를 테레제라 불렀다.
“……안녕, 데미안.”
그리고 나는 오열했다.
* * *
오즈월드는 점점 생기를 잃어가면서도 데미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테레제를 지켜보았다.
테레제는 점점 미쳐가는 데미안을 재우고 정작 본인은 잠들지 못했다.
그런 날은 외로운 밤이 너무 길었는지 달빛 아래로 나가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달과 별을 좋아했다. 눈만큼이나.
고요하게 달빛을 쬐는 모습은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겁 많고 방어적이고 미련한 여자.
테레제는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꽤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나 그건 단순한 방어기제였다.
사랑하면 모든 걸 내어주는 헌신적인 성격을 가진 탓에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는 걸 경계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두겠다고 생각하던 스콰이어 공작가 사람들도, 남자주인공들도 내치지 못하고 결국 품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도망칠 생각이나 하고 있고.”
그래서 보고 있으면 재밌었다.
더 지켜보고 싶었다.
얼마나 더 무너지게 될지를.
[“…….”]
테레제는 방송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혼잣말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완벽히 잊었으리라.
오즈월드가 일부러 후원창이 뜨지 않게 제어 중이었으니까.
다만 성좌들은 서로의 후원 코멘트 내용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매일 싸웠다.
테레제가 너무하다. 데미안의 문제다. 둘 다 불쌍하다. 자업자득이다. 그냥 또 죽어버려.
“주인님.”
다비드가 통제실로 들어왔다.
“저번 시스템 오류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예측대로 안티들의 짓이었습니다. 그쪽에 거물이 있는 모양입니다.”
거물이라.
“위원장 중 하나입니까?”
“하나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건 아직 파악 중입니다.”
오즈월드가 피식 웃었다.
“어지간히 급했나 봅니다. 시스템을 건드리면 엄청난 코인이 들 텐데. 심지어 이번 오류는 우리 쪽에 호재로 작용하기도 했으니 꽤 화가 났을 듯하군요.”
이 이상 현상에 대해 판테온의 관심이 쏠린 이후, 테레제는 너무나도 훌륭하게 망가져 갔다.
50위 안에 든 채널은 전부 팬덤이 엄청나기에 순위를 겨우 하나 올리는 것도 몹시 어려웠다.
하나 테레제는 달랐다.
[BJ악역영애 39위▴]
데육시를 진행하며 그녀는 단숨에 11위나 상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녀는 현재 판테온의 기록이란 기록은 모조리 갈아치우고 있었다.
정작 테레제는 본인의 인기가 어떤지 조금도 관심 없는 모양인지 순위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알파에게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하라고 전달하세요. 이번은 운이 좋았지만, 또 오류가 생기면 곤란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다비드가 보고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방금 알파에게서 채관위가 BJ악역영애 채널에 유해 콘텐츠 경고를 내리겠다고 하니, 대비하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사유는?”
“판테온 내 분란 조장입니다.”
방송에서의 싸움은 판테온 내의 분위기와도 직결되었다.
그만큼 채널 영향력이 컸다.
“유해 콘텐츠 경고는 꽤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예. 정작 지난 복수물에서는 뜨지 않았었는데 말입니다.”
엄청난 트래픽을 생성하여 판테온에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주는 채널이라 차마 정지시키진 못하고 고작 하는 짓이 경고였다.
“방송 유행을 바꾸어도 성좌들은 결국 분란을 일으킵니다. 전쟁물이나 복수물이 문제가 아니었던 거죠.”
사랑은 충분한 파괴력이 있다.
오즈월드는 테레제가 그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채관위에서 일부러 로맨스를 부흥시켰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했다.
방송이 존재하고 자신이 계속 채널 관리자로 있는 한 어떤 유행이라도 분란 거리로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다비드는 오즈월드의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도 약간의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뭔가 달라졌어.’
아직은 뭐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변화가 분명 일어나고 있었다.
판테온이 아니라 오즈월드에게서.
‘주인님이 한낱 BJ에게 이렇게나 너그럽게 행동하신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다비드는 무심결에 화면 속 테레제를 바라보았다.
장면은 빠르게 바뀌어 어느새 데미안과 입을 맞춘 뒤 오열하는 테레제를 비추고 있었다.
“테레제 양이 꽤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다비드는 흠칫하더니 빠르게 고개 돌렸다.
“죄송합니다.”
오즈월드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더니 그 역시 화면을 쳐다보았다.
약간 미간을 찡그린 듯도 했다.
“아닙니다. 테레제 양은 보고 있으면 재미있죠. 이해합니다.”
저 모습을 과연 ‘재미’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지만.
다비드는 다시금 테레제를 힐끗 보았다.
“…성좌들이 왜 그녀에게 동화되는지 알 거 같습니다.”
상황 파악도 못 했으면서 쓰러지는 테레제를 끌어안고 백마력을 주입하는 중인 데미안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듯했다.
덕분에 시들어가고 있던 테레제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엷은 분홍빛 입술이 생기로 붉어진 순간 오즈월드가 입을 열었다.
“시스템을 복구시키도록 하죠.”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