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 버럭 소리쳤다.
“넌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우리가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사실혼 관계이지 않나요?”
데미안은 나를 이불로 둘둘 감싸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는 쪽 소리가 나게 입술에다 뽀뽀했다.
“사랑해요.”
불시에 당한 고백에 숨이 턱 막혔다.
“오늘도 대답이 없네.”
그는 “그래도 괜찮아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소파에 던져둔 상의를 주워 들어 몸에 걸쳤다.
“모처럼 눈도 내렸으니까 나갈까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괜히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런 분위기 못 참겠어.’
정확히는 면역이 없었다.
뭐라도 달리 집중할 게 필요해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펴보았다.
건축 양식을 보니 제국인 듯했으나 이 저택은 낯선 곳이었다.
‘알렌도 보이지 않고.’
우리 둘만 지내는 집인 걸까?
루상트 왕국에서 언제쯤 돌아온 걸까?
데미안이 ‘나’와 어떤 시간을 보낸 건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이 순간 가장 적절한 말을 꺼냈다.
“생일 축하해, 데미안.”
그러자 데미안이 단꿈에서 깨어나 악몽 같은 현실을 직면한 사람처럼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입매를 손으로 가만히 쓸어 만지더니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오늘이 1월 31일이었군요.”
그제야 오늘이 며칠인지 깨달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방안에는 시계도, 달력도 없었다.
짐작건대 데미안이 없앤 듯했다.
“기적 같은 건 없었네요.”
나는 그가 바랐을 기적이 뭐였을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데미안이 내게 다가오며 대뜸 제안했다.
“키스할까요?”
그리고는 입술을 겹치려 했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그를 피해버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데미안은 애정과 행복으로 가득하던 방금까지와는 달리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피하지 마세요. 현실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꼭 사람이 바뀌어버린 것처럼.
그래. 그의 말이 옳았다.
바깥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던전에 오래 머무는 게 안전하진 않았다.
언제 데미안의 장래 희망이 결혼에서 다른 걸로 바뀌어버릴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어서 데미안의 기억을 되돌려, 그가 암살 능력으로 ‘악마’를 죽이게 해야 했다.
이 던전은 데미안의 암살 능력이 아니면 클리어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성적으로는 그게 맞지만. 나는 그렇게 냉정할 수 없었다.
입 맞추는 순간 지금의 데미안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게 살인과 뭐가 다르지?’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될까?”
데미안은 이제 막 22살이 되었다.
그런 그를 바로 죽이는 건, 나로서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냥 지금 키스해요.”
차라리 내가 대신 죽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내가 대신 죽고 싶었다.
클라이드 때처럼.
“조금만 더 같이 있자. 네 생일이잖아.”
“…….”
데미안은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처럼 큰 보폭으로 창가에 다가섰다가 두 손으로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역시 지금 상황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내 그가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울지 마세요, 부인.”
나는 어느샌가 울고 있었다.
데미안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다가와 나를 품에 당겨 안았다.
“알겠으니까 울지 마세요. 일부러 못되게 굴었어요. 당신이 상처받았으면 해서……. 미안해요.”
아냐, 괜찮아. 너는 그래도 돼.
“원래는 당신을 원래 세계로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다 망쳐버릴 생각이었는데, 왜 살리고 싶게 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요.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정말로 지겹게 들었으니까.”
“…….”
“사랑한다고 해주면 될걸. 그 말은 죽어도 안 해주고.”
그러게. 그 말이 뭐라고 왜 너한테 해주지 않았을까?
“사랑해.”
“…….”
“내가 대신해서 죽고 싶을 만큼 사랑해.”
데미안은 앓는 소리를 내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언뜻 욕설이 들려왔다.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 내 사랑과 다르다는 건 알겠어요. ……그래도 좋은 걸 보면 내가 진짜 미쳐버린 거지.”
“차라리 날 사랑하지 말지 그랬어.”
“그건 너무 어려운 이야기네요.”
내 훌쩍임이 잦아들자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나갈까요?”
끄덕끄덕.
나는 옷을 두껍게 껴입고 털모자까지 꼼꼼하게 쓰고 나서야 데미안과 함께 눈 쌓인 마당으로 나올 수 있었다.
“좋다.”
모든 게 다 지워져 버린 것처럼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무척 아름다웠다.
무거웠던 마음마저 조금 들뜰 정도였다.
밤새 눈이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발목까지 발이 푹푹 꺼졌다.
이 정도면 눈사람을 손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눈을 작게 뭉쳐 열심히 굴리기 시작하자 데미안이 옆으로 툭 쳐버리며 심술을 부렸다.
“아! 왜 그래?”
“부인이 나 말고 눈만 보니까 질투 나요.”
“뭐라는 거야. 너도 눈 뭉쳐서 가져와. 같이 눈사람 만들자.”
데미안은 나와 하고 싶었던 일이 눈사람 만들기가 아니었던 모양인지 심드렁하게 굴었다.
“이런 건 마법으로 몇십 개든 만들 수 있잖아요.”
“뭐든 마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 나쁜 버릇이야.”
“씻는 것조차 마법으로 하려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네요.”
데미안은 묵직한 팩트로 나를 때리더니 이내 얌전하게 눈 뭉치를 만들어서 살살 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크게 만들어요?”
“으으음, 너만큼?”
우리는 경쟁적으로 눈을 굴리다가 흰 시트 같은 눈밭에 누워 숨을 고르기도 했다.
“와. 힘들어.”
“혹시 저보고 남은 눈사람 다 만들라고 눈치 주는 거예요?”
“잘 알아듣네.”
힘이 다 빠져서인지 실없는 농담에도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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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데 난 왜 눈물이 나냐…]
데미안이 내게 굴러와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물었다.
“눈 좋아해요?”
예전에도 이 질문을 들어본 적 있었다.
“좋아해.”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웃으며 대답했다.
데미안은 오즈월드처럼 내 뺨에 멋대로 키스하는 대신 웃으며 이마를 맞대었다.
“저도 좋아해요.”
그게 눈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좋아한다고 속삭이는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흐에취!”
어느새 눈사람으로 대가족을 이루었을 때, 갑자기 재채기가 나왔다.
“이럴 줄 알았어.”
데미안은 당장 나를 안아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슬슬 배고프죠?”
“응.”
“오늘은 닭고기 스튜랑 가지를 구워서 먹죠. 지난번에 부인이 만든 온실에 가지가…….”
데미안은 입을 다물더니 말을 돌렸다.
“씻고 나오세요. 먹을 걸 준비해둘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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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잔인한 상황이다… 상대는 알지 못하는 모든 추억을 데미안 혼자서만 안고 사라져야 하잖아… 그러고 나면 또 이 모든 추억이 전부 테레제 혼자만의 몫이 되는 거고…]
“그러게요.”
왜 이렇게까지 잔인한 상황을 만들었을까?
남은 사람은 어떡하라고.
사라질 사람은 어떡하라고 이딴 상황을 만들었을까.
나는 또 죄책감에 휩싸여 기분이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는 걸 느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며 밖에서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눈물을 떨구다가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남은 시간을 우울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달칵.
욕실을 나와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감싸며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곳으로 이동했다.
“뭐 만들어? 냄새 좋다.”
데미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운 차림으로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요. 옷 갈아입고 오세요. 음식은 다 됐으니까.”
“알았어.”
난방을 잘해두었다고 해도 가운만 입고 있기에는 꽤 추워서 순순히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데미안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날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이럴 때 귀족인 게 티가 나요.”
나 서민 출신인데…….
이상하게 심한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어디에 쓰는 건지 몰라 허리에 감아둔 끈을 풀어 휙 잡아당겼다.
“으앗!”
덕분에 나는 데미안에게 와락 안긴 자세가 되었다.
“이 줄은 허리에 둘둘 감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렇게 등에 고정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옷이 아래로 흘러내리니까.”
슥슥슥.
그는 나를 품에 가둔 채 고개를 숙여 운동화 끈 묶듯 줄을 교차해 엮어 나갔다.
“…그런데 굳이 이런 자세일 필요가 있어?”
“네, 필요해요. 지금 당신한테 개수작 부리고 있는 거니까요.”
“아.”
그런 거였구나. 그러면 할 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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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백일몽이라니 난 믿을 수 없어ㅜ 데미안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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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제라고 지금 마음 편하겠냐고요; 방금도 질질 짰는데 얘 마음 아픈 건 생각 안 함?]
하아. 또 성좌들이 싸웠다.
‘지긋지긋해.’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나는 데미안의 품에 뺨을 대고서 가만히 있었다.
데미안 역시 끈을 다 묶었음에도 내 허리를 안은 채 침묵했다.
우울한 정적을 깨뜨린 것은 내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였다.
“이제 밥 먹어요.”
식사가 시작되었을 때는 우리가 언제 우울했냐는 듯이 수다를 떨었다.
그와 나는 마법에 관해 토론하기도 했고 내일 뭘 할지도 고민했다.
“근처에 호수가 있어요. 호수가 단단하게 얼었을 테니 썰매를 타도 좋겠네요.”
“그러자.”
“며칠 후에는 시장이 열려요. 거기에 가볼까요?”
“응. 거기도 가보자.”
그러다 대화가 끊기면 금방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끝이 정해져 있기에 마냥 행복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자러 가요, 부인.”
나는 데미안의 손을 잡고 생각했다.
이제 하루가 흘렀을 뿐이라고.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