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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20화 (121/277)

120화

데미안은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을 되짚듯 남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윌로우 공작가의 후계자, 클라이드 윌로우.

테레제와 신분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상대였다.

저와는 달리.

데미안은 조용히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에는 로드 콘스탄틴이 멋대로 찻잔을 꺼내 향긋하게 우려낸 찻물을 따르고 있었다.

“이제 마음이 좀 잡혔나?”

데미안은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은 테레제와 친구조차 될 수 없는 사이였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예, 로드.”

로드 콘스탄틴이 제게 새로운 지령을 내리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도착했어, 데미안.”

데미안은 갑자기 바늘에 푹 찔린 것처럼 소스라치며 ‘자신의 현실’에서 눈을 떴다.

“왜 그래? 악몽을 꿨어?”

그는 멍한 눈으로 베일에 가려진 얼굴을 응시했다.

테레제는 제 주장으로 인해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그맣게 드러난 버선코처럼 오뚝 선 코와 보기 좋게 통통한 입술, 갸름한 턱선이 그녀가 대단한 미인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데미안은 어리광을 부리듯 테레제의 품에 안겼다.

“네. 너무 무서운 꿈이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다정하기 짝이 없는 부인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몸짓을 클라이드 윌로우에게도 해주었지.

데미안은 섬뜩한 눈빛을 하고 있다가, 테레제가 몸을 떨어뜨린 순간 표정을 바꾸었다.

최대한 순진하고 상냥하게.

테레제는 약한 것에 지나치게 물러지는 성격이었다.

자신이 속은 것도 모르고 스스로 팔을 부러뜨린 어린 시절의 저를 찾아왔던 그때 이미 무른 성격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어떨 때는 과감하고 어떨 때는 염세적이며 어떨 때는 이상할 정도로 순진하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집에 들어가자. 햇살이 잘 드는 곳이라 기분 좋을 거야.”

지금도 제게 드리운 음습한 기분을 어떻게든 해소해주고자 먼저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고 있었다.

데미안은 순순히 이끌렸다.

그래. 꿈은 꿈일 뿐이지.

‘이게 현실이야.’

나와 부인이 존재하는 진짜 현실.

데미안은 부인과 함께 타운하우스로 들어갔다.

이곳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두 사람의 신혼을 보내기에 나쁘지 않을 듯했다.

한데,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 타운하우스,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발할라 귀족 기숙사.’

그곳과 똑같았다.

“…….”

데미안은 갑자기 이 공간에 있는 제 존재에 대해서조차 심한 괴리를 느꼈다.

게다가 테레제는 이곳을 잘 아는 사람처럼 익숙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위쪽이 메인 침실이야. 네가 거길 쓰는 게 어때? 난 아래층 방을 쓸 테니까.”

어떻게 그 사실을 바로 알았을까?

걷잡을 수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데미안은 테레제가 신기루가 아님을 확인하려 걸음을 옮기다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테레제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쉬면 괜찮아져요.’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는데 정작 입 밖에 나온 말은 달랐다.

“저는 가짜인가요?”

테레제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으로 답이 되었다.

* * *

데미안이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장 크게 작용하는 요소는 바로 데자뷔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도 데자뷔가 일어날 요소가 없었다.

[성좌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워합니다.]

[성좌들이 BJ가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할지 주목합니다.]

데미안이 네 번째 꿈을 꾼 건 알고 있었다.

아까 마차에서 깜빡 졸던 중 시스템 창이 떴거든.

[4단계 기억 봉인 해제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네 번째 꿈은 그의 모친이 죽던 날을 보여주었으니까.

‘하지만 그 꿈은 현실을 자각시킬 요소가 없어.’

꿈에서 본 강렬한 무언가와 현재의 무언가가 완벽히 일치해야 하는데.

‘설마 이 타운하우스? 아냐. 발할라 기숙사랑 거의 같긴 하지만, 이게 강렬한 기억일 리 없잖아.’

게임에서는 이런 진행 방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분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상태부터 확인해보자.’

{데미안}

나이: 21세

장래 희망: 테레제와 결혼

상태: 불안하고 혼란스러워함

기억 봉인 해제 진행도: ★★★★☆

“어딜 보는 거예요?”

서늘한 목소리에 나는 퍼뜩 시선을 들었다.

데미안은 고요하게 끓고 있었다.

겉으로는 더없이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뜨겁고 거칠며 끈적한 내면을 지니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런 데미안이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원래대로라면 진작 폭주한 데미안이 모든 걸 다 망가뜨렸겠지만.

‘여전히 장래 희망이 결혼이야.’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하나씩 풀어보기로 했다.

“곧 사용인들이 와서 짐을 정리하기 시작할 거야. 위층 침실로 가서 이야기하자.”

데미안이 조소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 여기가 던전이니까? 당신은 뭐든 훤히 꿰고 있잖아요. 나까지도.”

“데미안.”

“난 그것도 모르고.”

그는 휘청이는 몸짓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내가 당신한테 특별한 줄 알았는데.”

지독한 상실감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특별해.”

“누가요? 내가? 아니면 ‘그’ 데미안이? 그것도 아니면… 클라이드?”

나는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데미안의 꿈 중 클라이드가 나오는 건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꿈이 바뀌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자각이 일어난 거였고.

이건 너무 큰 변수다.

‘어쩌면 좋지?’

미약한 패닉이 왔을 때.

띠링!

[성좌 ‘질서선’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너답게 해]

혼란스러운 상황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건 솔직함이었다.

가장 나답게 행동하는 것.

성좌는 그 점을 상기시켜주었다.

“네게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데미안은 혼란이 걷힌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회를 줘.”

허공에서 한참을 머무르는 내 손을 응시하던 데미안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맞잡았다.

우리는 2층의 침실로 들어갔다.

“짐작대로 여기는 악마 던전이야. 학교 축제 중에 문제가 생겼고, 어떤 남학생이 악마를 소환해 던전을 열었지.”

네 기억은 악마 던전이 만들어낸 허상이며 3개월 후 1월 31일이 되면 원래의 데미안으로 돌아갈 조건이 갖춰진다는 것까지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데미안의 기억이 돌아오면 지금까지의 저는 사라진다는 뜻이군요. 흔적도 없이.”

“……응.”

비관한 데미안이 날 죽여도 어쩔 수 없다고 간신히 마음의 준비를 끝냈을 때, 그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해요.”

“어?”

“제가 22살이 됐을 때 키스하면 기억이 돌아온다면서요? 그래야만 당신이 살아서 그쪽 세계로 돌아갈 수 있잖아요.”

데미안은 내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손등에 입 맞췄다.

“원래는 당신에게 프러포즈할 생각이었는데.”

내 손을 쥔 그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죽여버리고 싶어.”

데미안은 ‘데미안’을 증오했다.

“그 새끼는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째서 내가 가짜인 거지? 말도 안 돼…….”

그는 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절망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미안해…….”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데미안을 안아주었다.

내가 존재하기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미안해. 그 말 외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탁이 있어요, 부인.”

“응.”

“제게 키스해주세요.”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부탁을 들어준다.

▹거절한다.

※‘부탁을 들어준다’를 선택 시 1월 31일로 시간을 건너뜁니다.

“그렇게 하면 악마가 내 시간을 바꿀 거야. 내 기억은 여기서 끊어지고 1월 31일에 다시 이어질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나와 달리 여전히 던전의 주민으로 소속되어 있는 데미안의 기억은 1월 31일까지 쭉 이어진다.

그는 그동안 그간의 데이터로 이루어진 ‘나’와 함께할 것이다.

그게 진짜 나라고 볼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차라리 그게 좋겠어요.”

데미안이 찌푸린 미소를 지으며 내 두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1월 31일에 다시 만나요.”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서로의 입술이 맞물린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내가 눈을 뜬 곳은 하얀 햇살이 들이치는 침실 안이었다.

창밖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순백색으로 희게 덮여 있었다.

겨울.

데미안이 태어난 계절이었다.

그때 뒤에서 날 끌어안은 누군가가 어깨에 입 맞추며 다정하게 물었다.

“잘 잤어요?”

고개를 돌리자 고작 짧은 시간 동안 머리카락이 좀 더 길게 자라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미안이 보였다.

“어… 너도 잘 잤어?”

데미안은 좋아서 죽겠다는 듯이, 너무나 사랑해서 미칠 것 같다는 듯이 웃으며 이마든 뺨이든 마구 입 맞췄다.

그리고는 내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려온 강아지처럼 품을 파고들어 뺨을 비볐다.

나는 어색하게 굳은 채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데미안}

나이: 22세

장래 희망: 테레제와 결혼

상태: 위태로운 행복함을 느끼는 중

기억 봉인 해제 진행도: ★★★★★

“잘 때 추웠어요? 자꾸 품을 파고들던데. 난방을 좀 더 할 걸 그랬나 봐요.”

“내가 그랬다고?”

“네. 부인이 그랬어요.”

데미안은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벽난로에 장작을 더 태우고 침대 근처에 둔 이동식 화로를 뒤적여 불씨를 살렸다.

그리고는 도톰한 겉옷을 가져와 나를 일으켜 직접 팔에 소매를 꿰어 입혀주었다.

정작 데미안은 하의만 입고 있어 매끈한 상체가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였다.

섬세하게 조각조각 박힌 근육들이 움직임에 따라 조였다 풀어지길 반복하며 눈으로 뒤덮인 바깥보다 더한 절경을 만들어냈다.

그가 문득 피식 웃더니 고개만 비스듬히 돌려 내게 물었다.

“왜요? 또 만져보고 싶어요?”

띠링!

[성좌 ‘로맨스패스’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스킵된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영상이 시급합니다.]

내 데이터야,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거니?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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