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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18화 (119/277)

118화

* * *

데미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육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긴 했다. 여긴 꿈속이니까.

그는 벌써 세 번째로 전생을 떠올리는 것처럼 희한하리만치 생생한 꿈을 꾸고 있었다.

처음은 자신이 카펜터 공작가의 사생아로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 꿈이었고.

두 번째는 빈센트 패밀리 같은 평범한 암흑가 조직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상한 집단인 스티그마타의 일원이 되어 백마력을 몸에 주입하는 꿈이었다.

그런데 이번 세 번째 꿈은 앞선 꿈들보다 훨씬 이상했다.

“네가 데미안 웨스트니?”

누가 봐도 나 귀족이오, 하고 말하는 듯한 화려한 교복을 입은 테레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학교 학생으로, 동급생이었다.

또한 자신을 후원하는 장학재단의 이사이기도 했고.

‘까마귀 부인과 동일인인 것 같은데 어쩐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네.’

이쪽 테레제는 그야말로 개망나니였다.

자신을 추종한다며 따라다니는 미모사 브루니 공녀와 쌍으로 제정신이 아닌 여자.

데미안은 그녀를 혐오했다.

“평민 마법사들이 주제도 모르고 버릇없이 구는 경우가 종종 있다더니. 네 주인인 내게 좀 더 극진하게 경의를 표해야 하지 않겠어, 데미안?”

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자신의 까마귀 부인이 아니었다.

까마귀 부인도 귀족이긴 하지만, 그녀는 다른 귀족들과 달랐다.

외려 자신이 놀랄 만큼 예법이 엉망진창이었고, 너무 급진적인 사상이 엿보일 때도 있었다.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지만 그런 면이 따뜻하게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나의 까마귀 부인은.

“……하.”

데미안은 불쾌한 기분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항상 이 이상한 꿈을 꾸고 나면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다.

심지어 자신의 실제 성격마저 크게 영향받는 기분이었다.

‘대체 뭐야, 이 꿈.’

그는 고개를 돌렸다가 창백한 낯으로 잠든 여자를 발견했다.

꿈속의 가짜가 아닌 진짜 테레제였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정신을 날카롭게 헤집던 불쾌감이 잦아들며 눈빛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는 몸을 일으켜 테레제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이 그대론데.”

테레제는 며칠째 심한 고열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배에 의사가 있어 고비는 넘겼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테레제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부인. 입술 좀 벌려보실래요?”

몸이 아프니 입맛이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테레제는 지나치게 먹질 않아 애가 달았다.

달콤한 간식이나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죽으로 식욕을 자극해보아도 관심 한 자락 주질 않으니 이젠 그냥 뭐라도 억지로 먹이는 중이었다.

또, 테레제는 뭐든 성가셔했다.

한 번은 정신이 좀 돌아왔을 때 쉰 목소리로 “어차피 죽을 텐데 내버려 둬.”라며 몹시 비관적인 말을 내뱉기도 했다.

“부인?”

지금은 약을 먹여야 하는데, 비몽사몽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몇 번 스푼으로 먹여보다가 하는 수없이 며칠째 해온 대로 약을 머금고 입술을 겹쳤다.

약이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테레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억지로 삼켜냈다.

데미안은 입술을 떨어뜨리며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죄악감으로 얼룩진 달콤한 설렘으로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이 행동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는 억지로 자신의 상태를 부정했다.

‘난 이 사람이 싫어.’

다만 어린 시절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었으니 딱 그만큼만 도와줄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은 어느새 테레제 곁에서 하염없이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

테레제는 몸이 나아지는 듯하다가도 하룻밤 새에 갑자기 상태가 확 나빠지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데미안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앞으로는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해야겠어.’

아니, 애초에 부인을 알아봤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그대로 완벽하게 연을 끊고 남으로 살아야 했다.

엉망진창인 자신과 얽히기엔 부인은 고귀했으니까.

“제가 잘못했어요.”

데미안은 무력감에 휩싸였다.

“제발 일어나세요, 부인…….”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행을 이겨낼 수 없어 빠르게 냉소적으로 변해버렸던 보육원생 데미안으로 돌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 * *

데미안이 의사를 부르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오즈월드가 나타났다.

그는 검은 장갑 한쪽을 벗더니 테레제의 이마를 쥐었다.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BJ의 병환은 때때로 콘텐츠를 자극적으로 풀어나가는 좋은 소재가 되기도 했다.

데미안이 하루하루 무너져내리며 미쳐가는 중인 바로 지금처럼.

오즈월드는 침대에 걸터앉아 색색 뜨거운 숨을 몰아쉬는 중인 테레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강화도 이루어지지 않은 인간의 육신은 이렇게나 약하군요.”

테레제는 다른 BJ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허약했다.

그냥 마법만 좀 쓸 줄 아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니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주인님.”

오즈월드의 곁으로 다비드가 나타났다.

다비드는 잠깐 침대에 누워있는 테레제에게 주의를 빼앗겼다가 늦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일에 사사로운 감정을 섞어선 안 된다. 아무리 저 여자가 안쓰러워 보여도 개인적인 관심을 드러내선 안 된다.

그것은 오즈월드가 정한 규칙이었다.

“저번 시스템 오류 전의 체크 포인트로 데이터를 롤백할까요?”

자그마치 6년이 스킵 되어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정해진 시간 내에 퀘스트를 완료해야 하는 육성시뮬레이션 던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오즈월드는 그 또한 운명이라며 그대로 살라고 하는 무책임한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웬일로 백업 데이터를 불러올지 고민했다.

테레제에게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롤백은 괜찮습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죠.”

오즈월드는 테레제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졌다.

스토리가 꼬여버린 상황에서 테레제는 데미안을 찾아가 사과하는 선택을 했다.

그러자 다 망해버린 줄 알았던 전개가 정상궤도를 찾았다.

데미안은 테레제에게 강한 애증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오즈월드는 테레제를 품에 받쳐 안은 채 약을 먹였다.

“쟝에게서 받아온 약입니다.”

성좌들이 데미안의 병간호하는 모습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너무 잦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건 곤란했다.

“아직 남자주인공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조심해야죠.”

오즈월드가 약을 다 먹인 후, 이곳을 떠나기 전 테레제의 뺨에 키스했을 때였다.

달칵.

데미안이 객실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맞부딪친 순간, 데미안이 칼바람으로 오즈월드의 목을 그었다.

괴한의 정체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오즈월드가 지팡이로 바닥을 찧었다.

딱!

시간이 멈추고 데미안이 쓴 마법이 허공에서 흩어지며 소멸했다.

데미안 역시 입구에서 멈춰선 모습 그대로 굳어 있었다.

오즈월드는 혀를 찼다.

“광고는 틀어두었는데, 시간 멈추는 걸 깜빡했네요.”

이런 실수는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그사이 다비드는 데미안이 방금 본 것을 잊도록 기억을 지웠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오즈월드가 떠나고.

“……허억!”

시간의 속박에서 풀려난 데미안은 살가죽을 뚫고 튀어나올 듯이 심장이 뛰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미칠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분노와 질투, 살해 욕구가 내면을 뒤틀고 부술 것처럼 날뛰고 있는데 정작 대상이 없었다.

그는 테레제에게 달려가 무사한지를 확인했다.

불안했다. 이상할 정도로 몹시 불안해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들어가겠습니다, 데미안 씨.”

밖에서 그를 부르는 의사의 목소리에 데미안은 퍼뜩 정신 차렸다.

“들어오십시오.”

의사는 테레제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열이 떨어졌는데요? 걱정이 커서 미열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신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까 분명 테레제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부인께서 괜찮아지셔서 다행입니다. 부군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신께서 보살피신 모양입니다.”

“…….”

분명 다행인 일인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최악으로 가라앉았다.

* * *

나는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이승에 발붙이게 된 소감을 짤막하게 표현했다.

“어으, 찌뿌둥해.”

기지개를 켜자 몸에서 뚜두둑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왔다.

띠링!

[성좌 ‘방송 천재 테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개같이 부활]

아직 컨디션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만하면 완쾌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런고로 개운하게 샤워부터 했다.

그간 제대로 씻지 못했던 탓에 온몸이 찝찝했다.

그렇게 가운을 입고 나오자 식사를 가져온 데미안이 보였다.

“어, 데미안.”

심하게 앓아눕기 전, 그와 험악한 분위기를 풍겼던 일은 머릿속 저편으로 지워져 있었다.

“배고팠는데 잘 됐다. 같이 먹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스튜를 한술 뜨려 소파에 앉았는데, 데미안이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옷 입으세요.”

“가운 입고 있는데?”

“가운은 옷이 아니니까요.”

잠옷이나 샤워 가운이나 몸을 가리는 면적은 거의 비슷하지 않나?

‘어차피 방 안인데 좀 편하게 있어도 되잖아.’

하지만 데미안에게 불쾌감을 주는 차림일 수도 있었으니 새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다 입었어. 눈 떠도 돼.”

다 입었다는 데도 데미안은 내 쪽을 쳐다보지 못하고 아예 창가로 피해버렸다.

진짜 유난이야…….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데미안이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띠링!

[성좌 ‘주책바가지’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입술을 그렇게 비벼놓고 새삼스럽게 가운 정도로 부끄러워하긴~ㅎ]

“푸흡! 쿨럭, 쿨럭!”

후원 내용을 보자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맞다. 쟤 나한테 입으로 약 먹여줬었지?

“…….”

“…….”

잠시 굉장히 불편하고 서먹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데미안이었다.

“죄송해요.”

“…으응?”

“부인께서 저 때문에 아프셨잖아요. 그리고 허락 없이 입을 맞춘 것도…….”

“잠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말을 끊었다.

“일단 내가 아팠던 건 내 잘못이지 너와는 관계없어. 오히려 돌봐줘서 고마워. 그럴 필요 없었잖아. 그리고 그… 입… 그건.”

입맞춤이라 표현하긴 좀 머쓱한 그 행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건 그냥 의료행위였지. 그러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띠링!

[성좌 ‘철벽왕 테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릴 하네]

나는 최대한 데미안이 신경 쓰지 않도록 배려해서 말했다고 생각했다.

한데 데미안은 어딘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료행위…….”

그는 내 말을 곱씹듯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날 뚫어지게 쳐다보며 다가왔다.

“…데미안?”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그보단 뭔가 더 내밀한 느낌의…….

지익-

그때 데미안이 갑자기 약봉지를 찢어 가루약을 물잔에 부었다.

나는 가루가 물에 용해되는 것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데미안이 물잔을 쥐고서 물었다.

“의료행위, 한 번 더 할까요?”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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