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 *
철컥철컥!
데미안은 거칠게 문고리를 돌려보다가 마력으로 인한 반발을 느끼고는 헛웃음 지었다.
“마법까지 써서 가둬?”
그 짧은 새에 이토록 정교한 마법으로 저를 가둔 게 대단했다.
그는 술식을 하나하나 해체하며 분노한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얼마나 좋은 교재를 남겨두고 떠났는지 모르나 본데.”
자신의 마법 선생님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교재를 만들어 제게 선물해주었다.
그것으로 마력 술식을 만들어내는 기본기는 물론, 응용하는 법까지도 쉽게 깨우칠 수 있었으니까.
데미안은 15분 만에 문을 열고 나왔다.
테레제가 호기롭게 방을 나선 후로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데미안은 금방 찾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여자는 지나치게 예뻤다.
자신이 선물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화가 날 정도로 아름다워서 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저조차 그런데 남들이라고 다를까.
분명 지금도 진흙탕 위를 팔랑팔랑 지나치는 배추흰나비처럼 온갖 시선을 끌어모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방을 나온 지 고작 10분 만에 흰 양산을 쓴 채 갑판 위를 거니는 여자를 발견했다.
어쩐지 알던 것보다 키가 살짝 작아 보이긴 했지만, 그녀를 불렀다.
“부인.”
그러자 여자가 뒤를 돌았다.
그런데 테레제가 아니었다.
분명 옷도, 양산도, 손에 낀 장갑마저도 자신이 사준 것이었는데, 테레제가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낯선 여자가 저를 보더니 수줍게 붉어진 얼굴로 되물었다.
“저를 부르신 건가요?”
그럴 리가.
데미안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물었다.
“이 옷 어디서 났습니까?”
“…제, 제 옷인데요?”
대답에서 몇 가지 단서를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원래 입고 있던 옷은 싸구려 기성복일 가능성이 컸다.
또한, 테레제가 대가를 지불하고 그 옷으로 바꿔 입었으리라는 것도.
테레제는 예쁘다. 몇 번이고 말해도 전혀 과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 여자가 혼자서 싸구려 기성복 차림으로 다닌다고?
데미안은 욕설을 삼켰다.
돈은 명예로운 자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에는 분명 암흑가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녀석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테레제가 마법사이긴 해도 마법이 예상치 못한 위기까지 막아주는 만능의 힘은 아니었다.
데미안은 스산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똑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여자는 아가리를 벌린 짐승 앞에 알몸으로 선 사람처럼 위축되었다.
“이 옷 주인, 어디로 갔습니까?”
* * *
초호화 여객선은 만만치 않은 비용에 걸맞게 다양한 부대시설이 존재했다.
식당과 카페가 널리고 깔렸으며 무료함을 달랠 게임장, 사우나, 음악실, 소규모 도서관 등도 존재했다.
내가 선택한 장소는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없는 도서관이었다.
외진 곳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도서관은 이용객도, 사서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으으, 추워…….”
아무리 그래도 난방은 좀 해주지.
날도 추운데 하필 바꿔입은 드레스는 시멘트에다 실수로 코코아 가루를 쏟아버린 듯한 오묘한 색으로, 걸음마다 치맛자락이 하늘거릴 정도로 두께가 얇았다.
심지어 옷이 좀 작아서인지 몸에 딱 달라붙기까지 했다.
본의 아니게 몸매를 과시하는 듯한 꼴이 되어버려 사람이 많은 곳으로는 다니기가 뭣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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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도망 여주]
“도망친 게 아니라 당당하게 제 발로 나온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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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눈 뒤집혀서 찾고 있겠지? 맛있다…]
찾기는 무슨. 제 발로 사라져줬다고 후련해하지 않을까.
“이제 첫날인데…… 하아.”
지금이라도 바다에 뛰어내려서 헤엄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배는 주위에 바다만 보일 만큼 멀리 나온 상황이었고 가을이라 바닷물은 매우 차가울 것이며 결정적으로 나는 수영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리야한테 공간이동 마법을 배워둘걸. 아니다, 마력이 부족해서 안 되려나.’
자칫 잘못해 바다 한복판에 떨어지면 수를 써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익사할 테니까.
“여기 사용인으로 고용해달라고 해서 숙식 제공받으면 안 되려나?”
어떻게든 방을 구해야 할 텐데.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연신 손바닥으로 쓸고 있을 때, 도서관으로 웬 남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구석에 처박힌 날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오우, 네 말대로 대박인데?”
이거 어째 날 찾아온 거 같은데.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는 듯 남자들이 휘적휘적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해? 혼자 왔어?”
한 녀석이 피식 웃으며 내 옷차림을 끈적하게 훑었다.
“혼자 맞을걸? 아까 일반실에서 저 여자가 나오는 거 봤거든.”
“그래? 잘됐네. 우리가 긴 여행 심심하지 않게 해줄 테니까 방 옮길래?”
이상하네. 이곳 던전 원주민 녀석들이 유독 그런 건진 몰라도 껄떡거리는 놈이 자주 붙는 기분이었다.
‘이제 겨우 두 번째니까 자주까진 아닌가?’
아무튼 성가셨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내 경고에 남자들이 폭소했다.
“푸핫! 귀엽네. 이름이 뭐야?”
“좋은 말로 할 때 가라고 했다.”
“씁. 적당히 튕겨야 예뻐해 주지.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 오빠 돈 많아.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그들은 아예 날 둘러싸더니 한 놈은 멋대로 허리를 안으려 했다.
하아. 말을 안 듣네.
나는 목을 뚜두둑 소리가 나게 양옆으로 꺾었다.
꽉 쥔 주먹에는 마력을 둘러 단단한 글러브 효과를 줬다.
무력이 형편없는 가련한 나를 위해 새로 개발한 마법인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좀 맞자, 너희들.”
감히 죽을 날 받아놓은 악역의 사색을 방해하는 조무래기들은 흠씬 두들겨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 * *
나는 뒷짐 진 자세로 엎드려 뻗친 놈들에게 호령했다.
“복명복창 실시. 하나에 나대지, 둘에 않는다. 하나!”
“나대지!”
“둘!”
“않는다!”
“하나!”
“나대지!”
“둘!”
“않는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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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군부물이었나요?]
“쯧, 터가 안 좋나. 별 이상한 것들이 짜증 나게 하고 있어.”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놈들을 도서관에 고이 가둬놓은 뒤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어디 보자. 숨어있기 적당한 장소가… 푸엣취!”
계속 추위에 떨다가 기어이 재채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카페 같은 데라도 가서 따뜻한 차를 좀 마셔야 할 것 같은데.
이 꼴로 돌아다녔다간 비키니 차림으로 시내를 행보하는 사람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거의 비슷한 수준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을 게 분명했다.
내가 망연자실하게 바다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외투를 깜빡하셨습니까?”
꽤 멀끔한 외모의 남자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빌려드릴까요?”
그는 본인 외투를 가리키며 물었고, 나는 고개 저었다.
“괜찮아요. 으엣취!”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요?”
남자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외투를 벗었다.
“사양하지 말고 입으세요.”
나는 경계하는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또 흑심을 갖고 접근하는 남자인가 싶어서였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수작을 부릴 거였다면 제 방으로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외투를 거절하기엔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너무 추웠다.
저체온증이 올 바에야 그냥 외투를 빌리고 같잖은 수작질을 걸기 시작할 때 어퍼컷을 먹인 뒤 튀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럼 잠깐만 빌릴게요.”
하는 수 없이 외투를 건네받으려 하자 남자가 내 뒤로 옷을 휙 둘러 주었다.
“신사로서 이 정도는 하게 해주시죠. 아름다운 아가씨.”
그때였다.
콱!
“아악! 누구야!”
외투를 입혀주던 남자가 팔이 꺾여 뒤로 물러났다.
데미안이 남자의 팔을 부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지금.”
그는 매우 화가 나 보였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화가 났다.
“왜 그래? 친절을 베풀어주시려는 분한테.”
“친절?”
데미안이 신랄하게 비웃었다.
그러고는 남자의 손을 확 꺾자 뭔가가 툭 떨어졌다.
“아아악!”
“요즘은 친절한 남자가 주사기도 들고 다니나 보죠?”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바닥에 떨어진 주사기를 응시했다.
“당신이 좋은 옷을 입고 남편과 함께 다닐 때는 세상이 안전하겠지만. 그런 차림으로 구석진 곳을 돌아다니면 이런 쓰레기들의 표적이나 될 뿐입니다.”
데미안은 친절한 말투로 세상의 위험함을 알려주더니 남자를 난간 밖으로 던졌다.
너무 순식간이라 비명조차 지를 틈 없이 소스라치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게 남자를 바다에 버린 데미안은 태연하게 조언을 이어 나갔다.
“바깥세상은 꽤 험하고 무서운 곳이거든요. 그리고.”
데미안은 내가 걸치고 있는 재킷을 우악스럽게 잡아채 집어던졌다.
“당신한테 친절하게 다가오는 남자는 더더욱 조심하세요. 분명 불순한 목적이 있을 테니까.”
“…그래. 충고 고마워. 너한텐 항상 유익한 정보를 듣게 되는 거 같네.”
발할라에서나 지금이나.
데미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그러자 데미안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흘리며 내 앞을 막아섰다.
“어딜 가는 거예요, 그 꼴로?”
“추워서 어디든 좀 들어가려고.”
“지금 당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나 있어요?”
나는 어떻게 보일지 알면서도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데?”
데미안은 확인하듯 시선을 내렸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곧 인내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잔말 말고 방으로 돌아가요. 제발.”
나 역시 더는 밖에서 버티고 있을 재간이 아니었기에 마지못해 그와 객실로 돌아왔다.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차라리 밖에서 덜덜 떨고 있을 걸 그랬나?’
나는 소파에서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내다보느라 날 등지고 선 데미안을 힐끗거렸다.
기분이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으며 눈앞이 어지러웠다.
뜨끈한 열기가 머리로 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좀 피곤하네.’
그러나 이 분위기부터 어떻게든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 채 그를 불렀다.
“데미안.”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말했다.
“…미안해. 진심이야.”
난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 그와 감정 상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꼬여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난 한 번도 널 갖고 논 적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려서일까?
웅크린 몸이 소파 아래로 푹 꺼져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넌 나한테 소중해.”
나 잘 말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서 더 미안해. 날 용서하지 않아도 돼……. 미안…….”
“……부인?”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세 번쯤 반복한 것 같다.
더 사과하고 싶은데, 입을 열 때마다 팔팔 끓는 물이 뿜어내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 피곤한 게 아니라 아픈 거였나 봐.
‘어쩐지 더럽게 춥더라니.’
“부인!”
데미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뭉그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