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데미안은 의상실에 들어가자마자 손가락을 펼쳐 허공을 가로로 길게 그었다.
“이렇게 다 주시죠.”
점장의 표정이 돈벼락 맞은 사람처럼 환해졌다.
“훌륭한 안목이십니다.”
드레스를 보지도 않고 달라는 사람에게 할 칭찬으로 적절하진 않은 것 같은데.
‘저택에 옷이 넘치도록 많은데 뭐 하러 다른 옷을 사지?’
“전부 짐가방에 포장해서 항구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내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수표를 끊었다.
그러더니 내 간편한 차림을 보며 말했다.
“그 옷도 갈아입는 게 좋겠네요.”
그 한마디에 나는 어두운 흑갈색 원피스를 벗고 흰 블라우스와 산뜻한 녹색 치마, 체크무늬의 고급스러운 재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에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짧은 베일이 달린 모자를 씌우고서야 데미안은 만족했다.
“잘 어울리네요.”
점장도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 생에 이토록 그림 같은 부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군요.”
부부란 말에 데미안의 시선이 루비 반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뭐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반지를 싫어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부부인 척해야 하는데 나만 결혼반지를 하고 있으면 좀 그런가?’
부티크는 장신구도 같이 취급하고 있었다.
나는 은근슬쩍 장신구를 훑어보다가 루비가 큼직하게 박힌 굵고 화려한 반지를 발견했다.
비록 내가 낀 반지와 모양이 같진 않았지만 메인인 루비가 같은 모양으로 세공되어 있어, 한 쌍이라고 우겨볼 만했다.
[반지를 구매하시겠습니까?]
▹산다.
▹사지 않는다.
“이 반지 주시겠어요? 결제는 저 사람이 할 거예요.”
저 사람은 당연히 데미안을 뜻했다.
“알겠습니다. 포장해드릴까요?”
“그냥 주세요. 바로 쓸 거라서.”
나는 묵직한 루비 반지를 들고 본인이 입을 옷을 결제하던 데미안을 부르려 했다.
‘부부인 척하고 있으니까 데미안 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
“여보.”
데미안은 뒤통수를 맞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손 좀 줘보실래요?”
“…….”
“오, 딱 맞네.”
눈대중으로 골라온 반지인데 운명처럼 사이즈가 딱 맞았다.
“진짜 신기하다. 그렇죠?”
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 들자 데미안이 표정을 구겼다.
별론가? 하지만 낙장불입이었다.
“참고로 이거 당신 돈으로 산 건데, 환불은 안된대요.”
그러니 마음에 안 들어도 끼고 있어야지, 어쩌겠어?
데미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주먹만 꽉 틀어쥐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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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죽네ㅠ]
좋아죽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죽이고 싶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부티크에서의 쇼핑은 그럭저럭 잘 끝났다.
이대로 용건은 끝인가 했더니 그는 나를 데리고 본격적으로 쇼핑지구를 돌았다.
“무슨 물건을 이렇게 많이 사요?”
내가 질린 얼굴로 묻자 데미안은 전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이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여행 준비가 필요한 건 맞지만 너무 과소비 같은데…….
‘아무렴 어때.’
어차피 다 데미안의 돈으로 샀으니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쇼핑이 끝나고, 데미안은 묻지도 않고 날 저택에 데려다주었다.
“들어가세요. 왕국으로 떠나야 할 날에 마차를 보낼 테니 그걸 타고 오면 됩니다.”
나는 그가 떠나기 전에 붙잡았다.
“할 이야기가 있어. 잠깐이면 돼.”
이제는 내가 귀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는 것도 우스운 상황이었다.
그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으려 했을 때였다.
데미안은 붙들린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뜻 모를 말을 내뱉었다.
“부인은 이런 게 재밌나 봐요.”
“어?”
“고상한 귀족답게 불쌍한 고아를 후원해주고 내키는 대로 선물도 보내주고. 그걸로 남들에게 으스댈 수 있잖아요. 그런 게 귀족들의 놀이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어요. 절 입양했던 사람들도 그랬거든요.”
그는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당신이 왜 날 보러오지 않을까 고민했어요. 당신은 다를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정말로 달랐어요. 당신은, 나한테 달랐다고.”
“데미안…….”
“그렇게 비참하게 버릴 거였으면 끝까지 날 보러오지 말았어야지.”
데미안은 형형한 눈으로 날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찾았는데.”
나는 차마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데미안은 그런 날 차갑게 비웃었다.
“이 저택에 처음 온 날이 여전히 생생해요. 당신과 마주한 날도, 첫 수업도. 그리고 날 버리고 떠난 날도. 자꾸만 꿈에 나타나서 잊히지 않아요. 빌어먹게도.”
“…….”
“그렇게 떠났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날 찾아온 기분은 어때요? 당신 눈길 하나, 손길 하나에 또 열 살짜리처럼 휘둘리는 날 보니 재밌어요?”
“그런 거 아냐.”
“이제 당신이 하는 말은 듣기 싫어요. 아니, 그냥 당신이 싫어.”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 직설적인 말에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하나 불쾌해할 수 없었다.
먼저 뺨을 맞은 기분을 느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데미안일 테니.
데미안의 눈가는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이 끔찍하게 싫어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이해했다.
그가 나로 인해 악몽을 꾸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그럴만했다.
나는 숨 막히는 죄책감을 안고서 여전히 내 손안에 머무르고 있는 데미안의 손을 좀 더 강하게 잡았다.
“…갑자기 사라진 건 정말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절대로 널 버리려고 사라진 게 아니라 사고가….”
그러자 데미안이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이유가 뭐든 상관없어요. 제 생각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냉정한 거부에 용기를 잃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미안함을 느낀다면 이번엔 사라지지 않겠죠. 뭐, 또 사라져도 별수 없겠지만.”
그는 싸늘한 태도로 마차 문을 닫더니 내가 간신히 짜낸 용기로 한 번 더 붙잡아 볼 새도 없이 떠나버렸다.
여긴 내 집 앞인데, 생경한 곳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나는 멀어지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닿지 않을 사과가 허공에 힘없이 흩어졌다.
* * *
여행 당일 오전.
나는 데미안이 보낸 검은 마차를 타고 항구로 이동했다.
루상트 왕국에 도착하기까지 2주가 걸리는 일정이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계획한 일이니 이제 와 무를 수도 없고.’
왕국에서 지낼 때 머물 타운하우스도 준비해뒀지만 도착하자마자 도로 제국에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
“도착했습니다, 부인.”
마차가 항구에 멈춰서자 나는 흰 드레스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렸다.
꼭 웨딩드레스처럼 보이는 새하얀 드레스와 레이스 장갑, 흰 양산까지.
검은 마차와 대비되어 무척이나 튀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한 번씩은 날 힐끗거렸다.
가뜩이나 의기소침해 있던 나는 바늘처럼 몸에 푹푹 꽂혀 드는 시선에 괜히 고개를 떨궜다.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데미안이 화난 건 알겠는데 내 새끼 가슴에 못 박는 건 못 참아]
띠링!
[성좌 ‘중립 기어’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그건 아니지 ㅋㅋ 테레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솔직히 잘못이 없진 않음]
데미안이 싸늘하게 떠난 이후로 성좌들은 틈만 나면 내가 잘못했다느니 데미안이 너무하다느니 싸워댔다.
띠링!
[성좌 ‘데릴사위 데미안’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해결될 일]
“부인.”
그때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머리를 말끔히 넘기고 안경을 쓴 데미안의 얼굴이 보였다.
크라바트로 목을 가볍게 죈 고풍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지적이고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야말로 잘 배운 귀족 같았다.
나는 우울한 와중에도 생각했다.
‘뉘 집 아들인지 참 잘생겼네.’
데미안의 모습을 본 성좌들도 지겹게 이어지던 싸움을 멈출 정도였다.
그가 팔을 내밀었다.
“늦겠습니다. 들어가실까요?”
“…응.”
나는 닿을 듯 말듯 그의 팔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선원은 우리를 선실로 안내했다.
“여기가 두 분께서 사용하실 객실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우리가 안내받은 방은 급이 아주 높진 않아도 중간쯤은 되는 스위트룸이었다.
침대는 킹사이즈였고 2인용 소파가 있었으며 욕실과 발코니도 널찍하게 잘 빠진 구조였다.
짐을 보관하는 방은 따로 있어서 두 사람이 쓰기에 부족함은 없을 듯했다.
‘우리가 진짜 부부였다면 말이지.’
나는 입구에서 난감하게 머뭇거렸다.
‘분명 트윈 베드로 해달라고 했는데, 왜 침대가 하나야?’
지금이라도 방을 하나 더 잡을 수 있을까?
데미안은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언제까지 거기서 그러고 서 있을 생각입니까? 저랑 한 공간에 있는 게 불쾌해서 그래요?”
“아, 아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밖에서 잘 테니 이 방은 부인이 쓰면 됩니다.”
“나가서 잔다니……. 방이 하나 더 있어?”
“그럴 리가요.”
그럼 어디로 가서 잔다는 거지?
“노숙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야?”
“필요하다면요.”
이 여행을 계획한 것도 나였고 그를 버리고 떠난 것도 나니까 전부 내가 잘못한 건 맞는데, 이쯤 되니 솔직히 부아가 치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멀쩡한 방을 두고 왜 나가서 자려고 그래? 왜, 나는 귀족이고 넌 평민이라서?”
나는 데미안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나갈 테니까 이 방은 네가 써.”
그리고는 선실을 나갔다.
혹시라도 그가 날 붙잡을까, 쓸데없는 염려를 하며 문에다가 30분 후에 저절로 열리는 잠금 마법을 걸었다.
그 사이에 어디든 처박혀 있을 생각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이동하던 중 선실 중 가장 등급이 낮은 일반실에서 나오던 여자를 불러 제안했다.
“저랑 옷 바꿔 입으실래요? 사례할게요.”
여자는 내가 손가방에서 끄집어낸 돈을 보더니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