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 *
데미안은 매일 테레제가 자신을 찾아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테레제 역시 본인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는지 억지로 쳐들어오지 않고 문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하염없이. 또 하염없이.
조용히 복도로 나온 데미안은 벽에 기댄 채 오들오들 떨다 잠든 테레제를 내려다보았다.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차라리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간신히 가슴에 묻었는데.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를 보았을 때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매일 기억이 닳고 헤지도록 떠올린 얼굴이었다.
그랬기에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화가 났다.
자신의 첫사랑은 기억보다 더 아름다웠다.
제 속도 모르고서.
“이제야 제가 가여워졌어요?”
제게 전부를 주고 전부를 빼앗아버린 여자였다.
증오스러웠다. 용서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처절히 되갚아줄 수 있을까?
고약한 복수심이 울컥 솟았다.
데미안의 속마음을 모르는 이들은 그를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며 냉정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웃기지도 않는 말이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감정적이었다.
증오와 분노, 복수심은 늘 자신을 움직이는 가장 훌륭한 연료였다.
그런 추악한 감정 외에는 내면에 존재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꽉 틀어쥔 주먹을 풀어, 험한 일들로 굳은살 벤 손가락으로 테레제의 흰 뺨을 건드렸다.
여리고 부드러운 살결이 거칠고 단단한 살갗에 감기듯 달라붙었다.
그 순간 마음에 불안이 번졌다.
심장이 거칠게 뛰며 손가락 끝이 저렸다.
흡혈귀. 마녀.
까마귀 부인은 그런 소리를 들을만한 얼굴이었다.
외려 기억보다도 더 어려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데미안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정체가 뭐야, 당신.”
영원히 이 여자를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이 오랜 증오를 뒤덮었다.
* * *
잘 잤다. 그래서 생각했다.
‘…왜 잘 잤지?’
찬 바닥에서 자느라 입이 돌아가기는커녕 쪼그린 자세로 인해 쑤셔야 할 삭신조차 멀쩡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부스스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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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악! 으아악! 으아악! 으아악! 으아악! 으아악! 으아악! 으아악! 으아악! 으아악! 으아악!]
“…….”
이 성좌는 또 왜 이래?
기분이 찜찜해지는 호들갑을 치워내자 눈에 들어온 풍경이 퍽 익숙했다.
‘데미안의 병실이잖아?’
내가 잠시 신세 진 곳은 병실 안에 마련된 길쭉한 카우치 소파였다.
나는 환자가 누워있을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쟤가 날 안으로 옮긴 거겠지?’
근데 살가죽이 찢어졌다는 사람이 그래도 괜찮은 거야? 상처가 터지지 않나?
머릿속에 퐁퐁 솟아나는 의문을 고스란히 안고서 잠든 데미안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혹여라도 그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흐… 으….”
데미안은 식은땀에 절어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신음과 잔뜩 찌푸린 얼굴.
“가지 마…….”
버려진 아이처럼 웅얼거리는 목소리에서는 물기가 느껴졌다.
나는 손을 움찔거리는 데미안을 붙들었다.
그리고 안심시키는 목소리로 말했다.
“떠나지 않을게.”
그러자 마법을 부린 것처럼 데미안의 표정이 서서히 편안해졌다.
이윽고 그가 스르르 눈을 떴다.
잠으로 혼몽한 시선이 느릿느릿하게 내 얼굴을 쓰다듬듯 훑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찰나.
“…?!”
데미안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뭐야. 당신.”
자다가 가위눌려서 귀신 본 사람도 그렇게는 안 놀라겠다.
나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악몽을 꾸는 것 같길래 깨우려고 했죠…….”
“악몽…….”
데미안은 멍하니 중얼거리더니 피식 웃었다.
“악몽이긴 하네요. 당신 꿈을 꿨으니까.”
그렇다는 건 가지 말라고 애원한 상대가 나라는 뜻인가?
6년이나 그를 내버려 둔 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피치 못할 사고였지만 이는 사과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기, 데미안…”
하지만 데미안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제 나가주실래요?”
그는 무심하게 말하며 환자복을 벗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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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상반신에서 중력이 느껴져서 나갈 수가 없어…]
나는 갑작스럽게 목격하게 된 그의 위협적인 상반신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데미안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미끈한 눈썹을 휙 들었다.
“어디까지 구경할 생각이신가요?”
“어? 아, 으응. 미안.”
깜짝 놀라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놔버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사과할 시간에 나가줬으면 좋겠는데요.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요.”
날 내보내려고 옷을 벗어버리다니.
축객령이 참 화끈했다.
나는 자꾸만 눈에 어른거리는 떡 벌어진 어깨와 흰 붕대에 감겨 있음에도 짙은 음영을 만들어내는 근육을 애써 떨치며 벌서는 아이처럼 멍하니 복도에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꽤 많은 사람이 병실을 들락거렸다.
비서, 의사, 조직원, 웬 기업인으로 보이는 이들까지 직군도 다양했다.
그들은 밖에서 장승처럼 서 있는 나를 힐끔거렸다.
‘저 여자는 뭐지?’하고 의아해하는 표정들이었다.
그중에는 호기심을 넘어선 관심을 드러내는 남자도 있었다.
“안녕?”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척 봐도 질 나쁜 일을 업으로 삼은 외형의 남자였다.
내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남자가 픽 웃었다. 그리고는 내 코를 톡 건드리려 했다.
짝!
내가 남자의 손을 매섭게 쳐내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심기가 뒤틀릴 만도 한데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보통 성질머리가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앙칼지게 굴어도 귀여운데? 너 신입이라면서?”
그는 느끼하게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이런 게 우리 조직에 굴러들어왔지? 살면서 너처럼 예쁜 애는 본 적이 없어.”
“미친놈인가.”
“쿡.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더 마음에 드는걸?”
아……. 이 정도면 죽여도 정당방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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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아예 내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벽을 짚고 서서 물었다.
“너 내 애인할래?”
“싫어. 꺼져.”
“그러지 말고… 컥!”
그는 돌연 뒤로 휙 날아가더니 벽에 처박혔다.
어느새 병실을 나온 데미안이 그의 목덜미를 잡고 패대기친 것이다.
데미안은 친절한 미소로 물었다.
“이 사람이 내 아내라는 말을 듣지 못했나? 비서실에서 조직원들한테 전달했다고 들었는데. 아, 상관의 아내라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러자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데미안 님의 여자인 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모른다고 다가 아니지.”
데미안은 남자의 손을 구둣발로 짓밟았다.
“끄윽….”
저러다 손이 다 으스러질 듯했다.
“그만해.”
나는 서둘러 데미안을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나 데미안은 시선 한 자락 주지 않고 남자를 짓밟는 데에 몰두하고 있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분명 웃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남자의 태도가 재수 없긴 했어도 유혈사태까지 바라진 않았다.
나는 다소 엄격한 표정으로 데미안의 뺨을 감싸 쥐고서 날 쳐다보게 끌어당겼다.
“데미안. 그만하라고 했잖아.”
데미안은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감에 놀랐는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자식이 아까부터 벌레 보듯 피하면서 자꾸 사람 상처 주네?’
내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데미안이 남자를 발로 차며 비서에게 말했다.
“이거 치워.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게 해.”
“알겠습니다. 이래서 눈치가 없는 것들이 항상 문제라니까요.”
비서가 혀를 차며 바닥에 옹송그리고 있는 남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험악한 인상의 조직원들이 다가와 남자를 끌고 나갔다.
데미안이 날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은 왜 그 엿 같은 베일을 안 뒤집어쓰고 다니는 거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고장 난 인공지능 같은 내 대답에 데미안이 코웃음 쳤다.
“방금까지 제게 편하게 말씀하셨잖아요, 부인. 말투를 통일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저도 당신을 신입 조직원으로 대할지, 귀부인으로 대할지 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할 말을 잃고 머뭇거리고 있자 비서가 끼어들었다.
“두 분의 사랑싸움은 마차에서 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부티크 예약 시간이 다 되어서 말입니다.”
비서의 말에 지적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데미안이 말없이 몸을 돌리려 하자 비서가 그를 불렀다.
“데미안 님. 방금 같은 일을 피하시려면 테레제 씨를 제대로 에스코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만.”
데미안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듯 손을 내밀었다.
내가 손을 올리자 그는 손끝만 간신히 닿을 정도로 움켜쥐고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데미안은 고집스럽게 정면만 응시하며 대답했다.
“가보면 압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도착하고서 비서가 말한 ‘부티크’가 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이곳은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의상실이었다.
데미안이 퇴원하자마자 날 의상실로 데려온 이유가 뭔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재벌 3세가 가난한 주인공에게 옷을 사주는 그런 클리셰인가 싶다가도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왜냐하면 난 부자니까.
그리고 드레스 룸에 옷도 많았다.
“여기는 왜 온 거예요?”
내가 묻자 데미안은 왜 이딴 질문이 나오는지, 외려 본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신한테 상복 외에 멀쩡한 옷이 있습니까? 지금도 위아래로 새까만 걸 보면 아닐 거 같은데.”
“……아.”
난 드레스가 많았다. 전부 어두운색뿐이라 그렇지…….
“저는 어둡고 짙은 색이 잘 받아요.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건 정확히 이야기하면 흑갈색…….”
“헛소리하지 말고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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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드도 그랬는데 이젠 데미안까지 테레제가 하는 말을 헛소리로 치부함 ㅋㅋ]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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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테소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