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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14화 (115/277)

114화

* * *

데미안이 실질적 2인자로 군림해 있는 암흑조직, ‘빈센트 패밀리’.

나는 패밀리 수장인 빈센트와 거래했다.

“귀족 사회에 섞여들 기회를 주지. 대신 날 고용해.”

아무리 날고 기는 암흑조직이라고 해봤자 이들은 평민.

사교계로 저변을 넓히고 싶어도 폐쇄적인 귀족들 사이에 섞여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신분이었다.

파리가 말을 한다고 한들 사람과 섞여 살 수는 없었으니까.

그것이 귀족의 논리였다.

그랬기에 귀족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연줄이 간절했던 빈센트는 내 제안을 매우 기꺼워했다.

“하하하! 데미안은 제게 신의 선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렇게 스콰이어 부인과 연이 닿게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신이 아니라 악마의 선물이지.’

어쩌면 내가 준 선물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그러한 연유로 나는 빈센트 패밀리의 신입이 되어 데미안 앞에 서게 되었다.

데미안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비서를 쳐다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추궁하는 표정에도 비서는 흔들림 없이 가지고 있던 서류 한 장을 내밀 뿐이었다.

“여기 테레제 씨의 이력서입니다. 확인해보시죠.”

데미안은 이력서란 말에 코웃음 쳤다.

“요즘은 깡패 새끼들 조직에도 이력서를 받나 보군.”

“그럼요. 저희 패밀리는 사업체잖습니까?”

비서는 꽤나 유들유들한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원래 세계보다 훨씬 까칠한 데미안의 성격을 잘 받아주었다.

데미안은 이력서를 확인하더니 한 대목에서 시선을 멈췄다.

“22살?”

냉랭한 황금빛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느긋하게 훑었다.

“생각보다 어리네.”

노안이란 뜻인가…?

‘본인은 뭐 얼마나 동안이라고.’

나는 심술 난 눈으로 데미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아는 현실의 데미안보다 조금 더 말랐고 훨씬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마 쭉 찢어진 눈매를 감추기 위해 쓰는 도수 없는 안경이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흥. 나보다 더 나이 많게 생겼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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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 입고 있을 땐 아이돌 같았는데 지금은 퇴폐적이네 야미~]

데미안은 나를 직접 상대하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시선을 거두며 비서에게 물었다.

“빈센트가 저 여자를 왜 나한테 보냈지?”

“데미안 님과 귀족 부부인 척 위장해, 함께 루상트 왕국에 무기를 팔러 가게 될 겁니다. 왕국어를 할 줄 알거든요.”

참고로 루상트 왕국어는 상점에서 100만 코인에 구매했다.

아니면 이 루트를 진행하지 못하기에 바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루상트 왕국은 왜?”

“내전이 터졌다고 합니다. 무기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귀족들이 외국에서 물건을 들이고 있다고 하니, 저희에게 좋은 기회이지요.”

그러자 데미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나더러 무리하지 말라더니, 살가죽이 찢어진 사람한테 루상트 왕국에 가라고?”

그러자 비서가 루상트 왕국으로 향하는 초호화 여객선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겸사겸사 여행도 다녀오시고요.”

나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데미안의 눈치를 살폈다.

‘열받은 거 같은데.’

상식적으로 누가 내전 중인 나라로 여행을 간단 말인가?

데미안은 분노를 누그러뜨리려는 표정으로 이력서를 도로 비서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딴 일이면 나 혼자 다녀와도 돼. 루상트 왕국어는 나도 할 줄 아니까.”

그건 곤란하지.

비서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단칼에 거절했다.

“루상트 왕국의 귀족 사회는 제국보다 더 폐쇄적이라 결혼하지 않은 남성의 사교계 활동은 매우 불리하다더군요. 특히 사업 같은 건 더더욱이요.”

데미안은 마뜩잖게 혀를 찼다.

“알았으니 나가봐.”

“출발은 일주일 뒤입니다.”

비서는 그렇게 말한 후 병실을 나갔다.

내가 비서를 따라 나가지 않고 어물쩍 서 있자 데미안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쪽은 왜 안 나가지?”

[병실을 나가시겠습니까?]

▹바로 나간다.

▹설득을 시도한다.

※‘바로 나간다’를 선택 시 일주일 후로 시간을 건너뜁니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그게… 부부 행세하려면 서로에 대해 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난 그쪽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없는데.”

“저는 많은데….”

“그래서?”

데미안은 성가시다는 티를 팍팍 내며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음. 그렇게 대놓고 싸가지 없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일단 후퇴하는 척하다가 한 번 더 질척거려보자.’

라고 생각하며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문 앞에 다가섰을 때였다.

쾅!

기척도 없이 다가와 어느새 등 뒤에 바짝 붙어 선 데미안이 문을 열지 못하게 부술 듯이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까, 깜짝이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라도 있으신지……?”

데미안이 형형하게 치뜬 눈으로 날 노려보며 한 음절, 한 음절 잘근잘근 씹어 날 향해 뱉어냈다.

“할 말은 당신한테 있겠죠. 부인.”

“네?”

“불쌍한 고아를 짐짝처럼 버려놓고 사라졌으면서, 이제 와 무슨 염치로 제게 접근한 겁니까?”

들켰네.

나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러나 속은 난리가 나 있었다.

‘뭐야, 내가 귀부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분명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데?’

데미안이 몰래 숨어서 내 맨얼굴을 훔쳐본 적이 있지 않고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같이 한집에서 지낸 고작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말이다.

‘빌어먹을. 이래서 암살자라는 것들은! 기척이 없어서 일반인인 내가 상대하기 너무 불리하다고!’

하나 예로부터 우기는데 장사 없다고 했다.

설령 얼굴을 봤다고 해도 벌써 6년 전의 일.

나는 뻔뻔하게 나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는 데미안 님과 초면인데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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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초면이라면 그런 줄 알아~ 반박 시 내 말이 다 맞음~]

데미안이 비틀린 웃음을 띠었다.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당연하지만, 데미안은 전혀 속지 않았다.

“하긴. 22살이면 스콰이어 부인으로 보기엔 너무 어리긴 하네요.”

그가 어설프게 증거품을 숨긴 현장을 발각하듯 내 장갑을 벗겼다.

휑하니 속살이 드러난 손에 지나친 존재감을 과시하는 루비 반지가 번쩍거렸다.

데미안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제가 아는 반지가 부인의 손에 있을까요?”

하여튼 오즈월드 개자식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우연이겠죠?”

데미안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다음 질문을 했다.

“남편 있어요?”

“아뇨. 그리고 저 미혼이에요.”

“결혼반지를 낀 미혼 여성이라.”

데미안은 끈덕지게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힘이 꾹 들어간 게 어쩐지 반지를 그대로 내 손가락과 함께 우그러뜨릴 것 같아서 조금 섬뜩했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 거짓말은 괜찮네요.”

거짓말이 아니라 진짠데.

벌컥!

갑자기 데미안이 문을 열어젖혔다.

“무슨 꿍꿍이인진 차차 알아가는 걸로 하죠.”

그리고는 날 내쫓기 전, 내 주머니에 여객선표를 쑤셔 넣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시간은 넉넉할 테니까.”

* * *

서로에 대해 알아가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뭘까?

그건 바로 만나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오늘로 닷새째, 데미안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볼 수 없었다.

「테레제 출입 금지」

바로 저 황당한 경고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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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싸움 재밌다 깔깔~]

이걸 사랑싸움으로 해석하는 성좌의 긍정적인 마인드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출입 금지에도 꿋꿋하게 병실 앞에 죽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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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조건이 많은 듯한데. 이래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나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이미 6년이나 시간을 점프했을 때부터 망했어요.”

그때는 돌이킬 수 있다고 정신 승리했지만, 사실 그냥 망했다.

“루상트 왕국으로 가는 길이 내 황천길이 되게 생겼구나……. 죽기 전에 하는 일이 초호화 여객선 여행이라니. 쿡. 쿠쿡. 이거 꽤 퍽킹, 아니, 버킷리스트 같고 좋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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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애가 맛이 갔네…]

“하아아.”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려진 질척한 한숨이 입 밖으로 쏟아졌다.

상황은 꼬일 대로 꼬였다.

시스템 오류와 6년이라는 손실, 데미안에게 이미 정체를 들킨 것까지.

만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거지 같은 게임 누가 만들었냐? 어?

“이게 다 오즈월드 때문이야. 하는 일마다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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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ㄷㄷ 그러다 너 큰일 나; 오즈 팬이 얼마나 많은데]

큰일은 이미 벌어졌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으, 추워.”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비참한 상황이었다.

아직 내 마법적 성취가 이런 생리적인 현상까지는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게 무척이나 서러웠다.

그렇지만 꿋꿋하게 데미안이 나오길 기다렸다.

죽을 땐 죽더라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하고 싶었다.

이 던전 속 데미안에게 귀부인의 존재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제작자로서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그는 더 빛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는 암흑조직에 있을 캐릭터가 아니었다.

데미안은 더 사랑받아야 했다.

제대로 된 사람에게서, 아주아주 많이.

“…으음.”

눈꺼풀이 가물가물 감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건 너무 지겨운 일이었다.

“…….”

이내 짙은 잠이 나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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