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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13화 (114/277)

113화

“이거 받아.”

소녀가 뭔가를 건넸다.

몸통을 비틀면 환한 빛을 뿜어내는 마도구였다.

소녀는 진심으로 데미안을 걱정했다.

“혹시라도 그 여자가 널 잡아먹으려고 하면 이걸 사용해. 흡혈귀는 빛에 약하다잖아.”

빛이 필요하면 마법을 사용하면 그만이지만, 소녀는 데미안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몰랐다.

데미안은 피식 웃으며 마도구를 받지 않았다.

“그분은 흡혈귀가 아냐. 그러니까 그런 황당한 이야기는 그만둬.”

“하지만 데미안!”

“그만.”

부드럽게 유선을 그리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소녀는 순간 목덜미에 칼날이 닿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싹한 감각에 소녀는 미세하게 떨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난, 가볼게.”

“응, 잘 가.”

데미안은 소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책을 펼쳤다.

* * *

[성좌들이 마녀사냥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이 던전에는 흡혈귀나 마녀 같은 존재를 두려워하는 정서가 깔려 있어요.”

자유자재로 마법을 쓰는 늙지 않는 괴물.

“이 특징에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플레이어잖아요? 던전에서 플레이어를 찾아내 죽이려고 깔아둔 장치죠.”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을 테니 던전을 유지하기 위해 악마 계약자가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할 터.

슬슬 시간을 넘길 때가 되었다.

“알렌. 남부로 갈 테니 짐을 싸둬.”

“알겠습니다, 주인님.”

소문이 들끓는다면 자리를 피해 있으면 그만이었다.

계속 수도에 머물러있어봤자 불온한 관심의 대상만 될 테니까.

알렌이 짐마차를 꾸리고 있을 때 데미안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저건 다 뭔가요?”

“여행 짐이란다. 남부 별장에 1년간 머물 생각이거든.”

데미안의 표정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럼 저는요?”

“넌 여기서 지내야지. 학교도 가야하고. 마법 교재는 네 방에 가져다 뒀으니까 그걸로 공부하면 돼.”

“저도 남부로 갈래요. 데려가 주세요, 부인.”

[데미안을 함께 데려가시겠습니까?]

▹데려간다.

▹데려가지 않는다.

※‘데려가지 않는다.’를 선택 시 1년 후로 시간을 건너뜁니다.

애원하는 눈으로 보는 데미안이 안타까웠지만 그를 데려가면 마녀사냥 이벤트가 불식되지 않는다.

“1년 뒤에 보자, 데미안.”

데미안은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인은 저를 싫어하시나요? 제가 미운 아이라 데려가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 난 널 좋아해.”

“그런데 왜…!”

나는 데미안을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데미안이 놀란 모양인지 몸을 움찔거렸다.

“건강하게 잘 있어.”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깍째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때 갑자기 시간의 흐름이 기이하게 늘어졌다.

“흐읍…!”

공간이 뒤틀리며 내 육신마저 휩쓸려 오그라지는 끔찍한 감각이 전신을 날카롭게 파고들었을 때.

“쉬잇. 잠시만 숨을 참으세요.”

오즈월드가 나타나 나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자마자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턱 옥죄어오는 바람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오즈월드가 구명줄인 양 꽉 붙들고서 힘껏 숨을 참는 수밖에.

딱!

오즈월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시야가 뒤바뀌었다.

“……푸하! 허억, 허억.”

나는 물살에 휩쓸렸다가 뭍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전신에 힘이 쭉 빠져 그대로 허물어지려는 나를 오즈월드가 안아 들었다.

치지직. 치지지지직.

사방이 회색 노이즈로 뒤덮인 이상한 공간이었다.

“시스템의 사각지대입니다.”

내가 여기가 어디냐고 물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오즈월드가 선수 쳐서 답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의문이 완전히 해결될 리 없었다.

“그게 뭔데? 왜 갑자기 내가 여기로 온 거야?”

“시스템 오류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 겪는 상황이라 원인을 파악 중입니다.”

태평스러운 어조에 비해 사안이 심각했다.

모르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오즈월드의 입에서 ‘처음’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오즈월드는 노이즈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 한복판에 널찍한 소파를 생성하더니 나를 길게 눕히듯 앉혔다.

그리고 본인은 내 발치에 앉아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겨내는 게 아닌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저기,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은데.

“갑자기 내 신발은 왜 벗겨?”

물론 소파 위에 앉으면서 신발을 신고 있는 건 더럽긴 하지만, 그런 이유로 신발을 벗긴 게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내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며칠간 시종이 하는 일을 배워봤습니다.”

“…?”

그래서 나더러 어쩌란 거지?

“잠깐만, 윽! 아파!”

내가 고통을 호소하자 그가 시선만 위로 올려 날 쳐다봤다.

“최대한 살살한 건데. 아픕니까?”

“혹시 날 죽일 셈이야?”

오즈월드는 미간을 좁히더니 한결 부드러워진 손길로 발을 주물렀다.

나는 잔뜩 움츠려있던 몸을 서서히 편안하게 펴면서도, 의아함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오즈월드를 힐끗거렸다.

‘대체 왜 이런 이상한 일에 꽂힌 거야? 누가 봐도 남의 시중만 받고 살았을 사람이.’

나는 속으로 궁싯거리다가 문득 왼손에 번쩍번쩍 붉은 광채를 흩뿌리는 루비 반지를 발견했다.

“이 반지는 왜 손에서 안 빠지는 거야? 설마 발할라로 돌아갔을 때도 계속 안 빠지는 건 아니겠지?”

“반지가 마음에 안 듭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오즈월드는 내 손을 가져가 반지 위에 키스한 후 말했다.

“던전을 나가면 빠질 겁니다.”

듣던 중 다행인 말이었다.

띠링!

[성좌 ‘성적충’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즈 ㅎㅇ 광고 끝나서 들어왔더니 이게 뭔 상황임?]

오즈월드는 후원창이 뜨는 것을 확인하더니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제 오류가 복구된 모양이군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았네요.”

띠링!

[성좌 ‘마이너 장인’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즈테레를 밀고 나의 성공시대 시작됐다]

오즈월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노이즈 낀 화면이 막을 올리듯 걷히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오류가 발생했음에도 던전은 시간이 흐른 모양인지 내 옷차림이 바뀌어 있었다.

그래봤자 검은 베일과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드디어 수도로 돌아오셨군요, 주인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알렌에게 대꾸하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얼마나 수도를 떠나있었지?”

“올해로 6년째입니다.”

“……6년?”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얼른 데미안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데미안}

나이: 21세

장래 희망: 암흑 길드 수장

상태: 세력 싸움 중 부상

기억 봉인 해제 진행도: ★★☆☆☆

그때 곁에 서 있던 오즈월드가 남의 일이라는 듯 태평스럽게 말했다.

“난이도가 꽤 어려워졌네요.”

“시스템 오류 때문에 망하게 생겼는데 이거 복구해줘야 하는 거 아냐?”

“안타깝지만 방송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이 또한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본인이 알 바 아니라는 소리를 정성스럽게도 길게 했다.

그는 내 뺨에 키스하더니.

“행운을 빕니다, 테레제 양.”

무책임하게 홀라당 사라졌다.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허공에 쌍욕을 퍼부었다.

띠링!

[성좌 ‘테레제에 인생 베팅’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우리 테레제는 욕도 잘해]

띠링!

[성좌 ‘음모론자’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와 어떡하냐;; 이 방송 곧 방종하는 거임?]

그럴 수는 없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쉰 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뜯어버릴 듯이 벗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 * *

데미안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아마도 제게 첫사랑이었던 까마귀 부인에게서 버려지던 날을.

1년 뒤에 돌아오겠다던 그녀는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남부로 갔다고 했나?

데미안은 참다못해 학교를 때려치우고 남부로 가서 까마귀 부인의 흔적을 뒤졌다.

하나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음으로는 북부로 가보았다.

“스콰이어 부인? 그게 누구지?”

이상했다.

그녀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맸지만, 원래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도저히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데미안은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까마귀 부인은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자신은 완벽하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번쩍!

우울하게 빛바랜 환상에서 깨어나듯 데미안은 두 눈을 부릅떴다.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와 복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

이곳은 병원이었다.

그는 세력다툼 중 배가 꿰뚫려 막 수술을 받은 참이었다.

상대 조직에도 설마 마법사가 있었을 줄이야.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때 비서가 다가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데미안 님.”

끄덕.

데미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후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보스께서도 원하는 구역을 손에 넣었으니 한동안 영역 확장은 쉴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에쉬튼 패밀리는 어떻게 됐지?”

“데미안 님이 쓰러지시기 직전에 전멸시키셨습니다.”

그럼 됐다.

데미안은 착실히 뒷세계의 패자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병실에 들어왔다.

은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데미안이 비서에게 물었다.

“누구지?”

대답은 여자 쪽에서 나왔다.

“앞으로 데미안 님을 보필하기 위해 고용된 테레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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