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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12화 (113/277)

112화

까마귀 부인의 집은 지금까지 앞서 입양되었던 세 가문보다 호화로웠으나 꿈에서 본 카펜터 공작가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데미안은 부인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용인들이 다가와 제게 공손히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저는 앞으로 도련님의 생활 전반을 돌봐드릴 루시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루시.”

“도련님께서 지내실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까마귀 부인은 저를 루시에게 맡기고 사라졌다.

루시는 까마귀 부인이 사라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저를 안내했다.

그곳은 서관이었다.

“주인님께서는 보통 동관에서 생활하십니다. 그곳은 허락 없이 들어가실 수 없으니 필요한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간신히 까마귀 부인을 만나게 되었지만, 생활권이 너무 달랐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우연히 마주치기 어려우리라.

하나 데미안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밤이 됐을 때 몰래 그녀를 찾아가면 그만이었으니까.

낯선 곳을 여기저기 소개받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데미안은 계획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동관으로 잠입하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저택 규모에 비해 사용인이 거의 없네.’

그런데도 관리 상태는 완벽했기에, 꼭 사람이 필요 없는 유령의 저택처럼 느껴졌다.

저벅. 저벅.

그때 반대편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무게로 짐작건대 여인이 분명했다.

‘혹시 까마귀 부인인가?’

데미안은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곧 벽에 설치된 램프의 불빛에 의해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허벅지까지 굽이치는 검은 머리칼. 둥근 눈꼬리. 난생처음 보는 신비로운 은회색 눈동자.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달칵.

여자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채 방으로 들어갔다.

“…….”

그러나 데미안은 한동안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여자는 까마귀 부인이었다.

왼손에 루비 반지를 끼고 있었으니까.

문득 보육원에서 쓸모없는 정보라고 여기고 대충 흘려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씁, 그 여자는 남편이 죽은 게 언젠데 계속 얼굴을 감추는 거야?”

“3년이나 흘렀으니 칙칙한 상복도 벗고 베일도 치워버리지. 듣자 하니 대단한 미인이라던데?”

그날 밤.

데미안은 신비로운 은회색 눈동자 속으로 퐁당 빠지는 꿈을 꾸었다.

* * *

나는 데미안에게 마법을 가르쳐주기로 약속한 날로부터 일주일 후 그를 불렀다.

데미안은 귀공자처럼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부인.”

분명 말쑥하게 꾸민 모습인데 어쩐지 얼굴이 까칠해 보였다.

‘문제라도 있나?’

나는 데미안의 상태를 확인했다.

{데미안}

나이: 15세

장래 희망: 암흑조직 간부

상태: 혼란

기억 봉인 해제 진행도: ★☆☆☆☆

데미안의 기억은 한 단계씩 봉인이 풀릴 때마다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굵직한 사건이 하나씩 꿈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었다.

첫 번째 기억은 카펜터 공작가와 얽힌 사연이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상태인 건 이해가 가는데, 그새 왜 장래 희망이 저따위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네.

“수업을 시작하자.”

띠링!

[성좌 ‘조용한 관종’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신나서 교재도 직접 만든 것 봐… 그냥 마법 오타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냐…]

“이게 룬을 중첩으로 사용해서 좀 더 복잡한 술식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방법이야.”

데미안은 나의 훌륭한 수업에 영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내 얼굴이 교재인 양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그러니?”

내 얼굴은 검은 베일로 꽁꽁 감춰져 있었다.

“까마귀 부인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리비로 플레이할 땐 그냥 귀부인이라고 부르는데 왜 나는 까마귀냐?’

…라고 묻고 싶지만, 일단 그의 부름에 답했다.

“뭐가 궁금한데?”

“저를 신뢰하지 못해서 정체를 숨기시는 거예요?”

“아니.”

실은 그렇다.

내가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데미안이 알게 되면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그게 왜 문제냐고?

‘이 데미안은 현실의 데미안을 동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

진짜 데미안이 나타나는 순간 자신이 살해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기억을 되찾아 현실의 데미안을 불러내는 일에 협조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실패였다.

데미안이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그럼 왜 얼굴을 감추는 거예요?”

“못생겨서.”

내 대답에 데미안이 피식 웃었다.

묘하게 비웃음 같기도 했다.

‘본인은 잘생겼다고 날 무시하는 거야?’

확 베일을 걷어버릴 수도 없고.

이후 데미안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걸 그만두고 마법 수업에 집중했다.

똑똑.

한창 수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 알렌이 찾아왔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주인님.”

벌써 그렇게 됐나?

워낙 집중한 터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야 한 끼 걸러도 상관없지만 데미안은 성장기 소년이니까 잘 먹어야지.

“이만 돌아가 보렴, 데미안.”

나는 베일을 쓰고 있어야 했으니 그와 같이 식사할 수 없었다.

데미안은 마뜩잖아했지만,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그가 떠나기 전에 전달할 말이 있었다.

“의사가 말하길 내일부터 다시 학교에 나가도 괜찮대. 앞으로는 여기서 마차를 타고 등교하도록 해.”

내 말을 들은 데미안은 잠깐 침묵하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꼭 학교에 가야 하나요?”

“그래야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좋은 기회가 많이 생길 테니까.”

“그런가요.”

대학교와 기회. 그런 가치에 대해 데미안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현재 데미안은 양지의 일에 전혀 관심 없는 상태였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부인께서는 제가 대학교에 가길 바라시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 던전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니까.

그랬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가면 좋겠지. 넌 똑똑하고 난 돈이 많으니까.”

띠링!

[성좌 ‘납득이’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그건 맞지]

내 대답에 데미안이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들어 본 이유 중에서 제일 이상해요.”

“사실이잖아?”

“아하하!”

왜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아진 듯해서 다행이었다.

데미안은 공부방에서 나가려다가 머뭇거리더니 내게 다가왔다.

“무슨 할 말이라도…”

쪽.

베일에 가려진 뺨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감사해요, 부인.”

데미안은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띠링!

[성좌 ‘금쪽같은 내 새끼 데미안’ 님이 1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데미안 내가 낳을걸!!!!!!!!!!]

그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른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사뿐거리며 달리는 뒷모습이 싱그러웠다.

“쟤는 한국에 태어나서 아이돌을 해야 했어.”

그나저나, 데미안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슬슬 새로운 이벤트가 발생할 때가 되었다.

바로 ‘마녀사냥’이었다.

* * *

“데미안.”

수술로 인해 학교를 쉬었다가 오랜만에 등교한 데미안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타고 온 좋은 마차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걸친 값비싼 의복과 장신구 등.

한눈에 보아도 데미안의 처지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음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평민들이 다니는 곳이긴 하나, 대부분 자신은 귀족이 아니더라도 증조부가 귀족이거나 혹은 큰 상단주의 자식이거나 은행장의 딸이거나 했다.

극히 초라한 신분이나 오직 똑똑한 머리 하나로 학교에 다니던 데미안은 원래 유명 인사였다.

물론 그의 지나치게 수려한 외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지금 데미안을 수줍게 부른 소녀는 무려 증조부가 귀족인 고귀한 혈통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라고 소문 난 아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데미안은 이름을 부르는 대신 빙긋 미소 지었다.

“안녕.”

소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다쳤다고 들어서 걱정했어…. 이젠 괜찮아?”

“응. 많이 나아졌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데미안은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까마귀 부인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네.’

갑자기 알 수 없는 불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그때 소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널 후원하는 사람, 스콰이어 부인이라고 들었는데 맞아?”

‘스콰이어?’

“……그건 왜?”

데미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녀는 역시, 라며 알아서 그의 말을 해석했다.

“스콰이어 부인은 워낙 유명하잖아. 북부 귀족이라 수도에서는 그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다들 무척 궁금해하는데도,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그런데 선행은 꾸준하게 베푸는 겸손한 귀족이라고 들었어.”

스콰이어 부인. 북부 귀족. 사교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

데미안은 까마귀 부인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며 적당히 대꾸했다.

“응. 좋은 분이시지.”

“하지만 조심해, 데미안.”

소녀는 약간 경직된 표정으로 경고했다.

“그 여자, 마녀라는 소문이 있어.”

마녀라. 데미안은 그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왜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 내게는 무척 다정하고 친절하신 분인데 말이야.”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챘다고 들었어.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온 ‘존재’래.”

“그게 무슨 뜻이야?”

소녀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데미안에게 귓속말했다.

“흡혈귀 말이야.”

예상치 못한 황당한 말에 데미안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왜 이런 어린애들이나 할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하지?’

“방금은 마녀라고 하지 않았어?”

“마녀가 바로 흡혈귀니까!”

그냥 어떻게든 안 좋은 건 몽땅 가져다 붙이고 싶은 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같은데.

소녀는 흡혈귀설을 신봉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 여자는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항상 모습을 꽁꽁 감추고 있어. 이상하지 않아?”

“죽은 남편을 기리는 행위잖아.”

그렇게 대꾸하긴 했지만, 데미안도 그 점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까마귀 부인은 엄청난 미인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예쁘다는 눈앞의 소녀는 감히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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