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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106화 (107/277)
  • 106화

    사실, 처음부터 나무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유랑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기에 리비는 대사가 있는 배역을 맡고 싶었지만, 클럽 회장에게 거절당했다.

    “리비 양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귀족들의 연극은 평민들의 연극과는 달라.”

    그러고는 나무 역할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귀족의 연극에 익숙해질 때까지 작은 역할을 맡는 건 어때? 그게 리비 양에게도 좋을 것 같은데.”

    리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무가 되었지만 괜찮았다.

    적절한 때에 나뭇가지를 흔드는 일도 아주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했으니까.

    “곧 무대 시작합니다! 다들 준비하세요!”

    * * *

    무사히 극이 끝나고 커튼이 내려왔다.

    세 번째 극의 주인공을 맡은 세실리아는 대번에 분노를 터뜨렸다.

    “왜 황금시간대인 세 번째 연극을 보는 사람이 첫 번째 연극보다 적은 거죠?!”

    그야 첫 번째 연극의 주인공이 티켓 파워가 가장 센 데미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들 사실을 말하는 대신 내일은 관객이 많을 거라며 상심한 세실리아를 위로했다.

    세실리아는 무려 두 번째, 세 번째 연극 모두 여자 주인공을 맡고 있었다.

    ‘분명 공평하게 배역을 나누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리비는 분노하는 세실리아를 지나쳐 분장실로 돌아가려 했다.

    “잠깐만요, 리비 양? 할 말이 있어요.”

    그런데 세실리아가 리비를 불렀다.

    학생들은 두 사람을 힐끗거리더니 얼른 분장실로 돌아갔다.

    무대에는 리비와 세실리아만 남았다.

    “무슨 일인가요?”

    세실리아가 말했다.

    “다들 말하기 곤란해해서 제가 전달할게요. 리비 양은 내일 세 번째 무대에서 빠지세요.”

    데미안이 남자 주인공인 첫 번째 극을 제외하면 그나마 세 번째 무대의 관객 수가 많았다.

    “샘의 요정 역할을 해줄 친구가 있는데, 그 자리가 필요해서요. 겨우 무대 하나 양보하는 거니까 당연히 해줄 수 있죠?”

    나무가 빠지는데 갑자기 샘의 요정 역할이 생겨난다고?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예술과 교양 사교 클럽의 실질적인 수장은 세실리아였다.

    리비는 반발심이 차올랐으나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귀족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몰랐고, 누군가와 대립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다행이네요. 어차피 나무는 있든 없든 상관없는 역할이니까 수락해줄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세실리아는 가느다란 조소를 머금더니 분장실로 들어갔다.

    “…….”

    리비는 혼자가 된 무대에서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니를 보러 가야겠다.”

    그러자 기분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먼저 찾아간 곳은 클예부였다

    “테레제 님은 학생회로 가셨어요! 오후에는 학생회 일을 맡아야 하시거든요.”

    그래서 방향을 틀어 학생회로 가보니 테레제는 없고 데미안이 대신 나와 이렇게 말했다.

    “테레제는 내일 학생회 일을 맡기로 해서 여기에 없어. 아마 기숙사로 돌아갔을 테니까, 거기로 가 볼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렇지 않아도 언니의 기숙사가 늘 궁금했었는데 오히려 잘 됐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리비는 어느새 깊숙하게 들어온 숲길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리비는 길치였다.

    그러다 외딴곳에 떨어진 기숙사 하나를 발견해 그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학생은 아닌 듯한 남자가 주변에 모여든 마법 동물들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리비는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가 테레제 언니의 기숙사인가요?”

    “아닙니다. 이곳은 클라이드 님의 기숙사고,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아…….”

    리비는 시무룩해졌다.

    “죄송해요. 제가 기숙사를 잘못 찾아왔네요.”

    “괜찮습니다.”

    리비는 그냥 돌아가려다가 왠지 상대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자카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자카리에게서는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좋은 기운이 느껴졌다.

    ‘아. 그래. 한 번씩 내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랑 비슷해.’

    그때 자카리가 다가왔다.

    “혹 길을 모르시는 거라면 테레제 님의 기숙사로 모셔다드릴까요?”

    그 말에 리비의 얼굴이 불이 켜진 듯 환해졌다.

    “네!”

    리비는 자카리의 도움으로 무사히 테레제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자카리.”

    자카리가 떠나고, 리비는 기숙사 문을 두드리고 기다렸다.

    똑똑.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엘로이즈였다.

    “어머, 아가씨!”

    “안녕, 엘로이즈. 언니는 안에 있어?”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때 테레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비 왔어?”

    리비는 언니를 본 순간 반갑게 활짝 웃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시야가 뿌예졌다.

    방금까지 무척 기분이 좋았는데.

    언니를 볼 생각에 신나기만 했는데.

    가슴 깊이 막아둔 까닭 모를 설움이 둑을 터뜨리고 쏟아졌다.

    “흐어어어엉!”

    리비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 * *

    나는 울다 지쳐 잠든 리비를 확인한 후 침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집에 연락은 했어?”

    “네. 오늘 리비 아가씨가 여기서 주무시고 학교로 바로 갈 거라 전달해뒀어요. 우셨다는 이야기는 생략했습니다.”

    “잘했어.”

    어쩐지 오늘 리비가 평소와 다르다 싶더라니. 기어이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알아봤어?”

    “카펜터 공녀님이 사교 클럽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리비 아가씨를 따돌린 것 같습니다.”

    [성좌들이 등장인물 세실리아를 몹시 불쾌해합니다.]

    “역시나….”

    리비가 울었을 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자벨은 직접 나서서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하지 않는다.

    대신 철저히 방관자로 존재하는 캐릭터였다.

    띠링!

    [퀘스트: 세실리아 응징]

    ▸보상: +3,000,000코인, 유지스 호감도 상승

    ▸실패: 리비 자퇴, 유지스 호감도 하락

    ‘흐음. 유지스는 황후로 거론되는 세실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니 호감도에 영향을 주는구나.’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세실리아를 찾아가서 대판 싸워봤자 리비를 괴롭혔다는 증거가 없으니 나와 리비의 평판만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괜찮은 방법을 하나 생각해내야 하는데…….

    “엘로이즈. 나 교수님한테 다녀올게.”

    “네? 이 시간에요?”

    지금은 저녁 7시.

    교수를 찾아가기 적절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드레스 차림으로 일리야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똑똑.

    “교수님, 저 테레제입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러자 퇴근하기 직전으로 보이는 모습의 일리야가 문을 열어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하루 만에 완성해야 하는 마법이 있어요.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일리야는 내 간절한 표정을 잠시 응시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들어와라.”

    * * *

    축제 이튿날.

    테레제는 밤새 어딜 나갔다 온 건지 퀭한 얼굴로 아침을 같이 먹고는 다시 나갔다.

    리비는 클예부 일이 많이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기숙사에서 미적거렸다.

    “나무 역할 따위 없어졌다고 누가 알아차리겠어.”

    학교 가기 싫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교 클럽 행사가 싫었다.

    “나도 클예부에 가입할걸.”

    그것도 아니면 친구들이 있는 클럽에 가입할걸.

    리비는 우울한 얼굴로 학교에 갈 준비를 마쳤다.

    어쨌든 배역을 맡은 이상 연극에 빠질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이상한 건가?”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했던 리비에게는 지금껏 또래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게 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저만 빼고 다른 이들은 전부 잘 지내니까.

    리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분장실에 들어갔다.

    ‘그래도 오늘은 두 번째 연극까지만 오르면 되네.’

    이내 연극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연극은 역시나 데미안의 활약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연극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사람이 더 많네요!”

    어제 세실리아가 극장에 사람이 없는 것을 두고 분노를 터뜨린 탓인지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사람들로 객석이 가득 차 있었다.

    리비는 멍하니 무대 구석에 서서 주인공들의 연기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세실리아의 연기력은 형편없었다.

    ‘전문 배우가 아니니까 당연하겠지만, 대사를 틀리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리비는 대본을 전부 외우고 있었기에 세실리아가 겨우 두 마디마다 대사를 틀리고 있다는 걸 꿰뚫고 있었다.

    이제 무시무시한 왕비를 피해 숲으로 도망친 세실리아가 동물들을 불러 모으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순간이었다.

    ‘지루해.’

    라고 생각했을 때.

    “이 숲은 너무나도 어둡고 무서워……꽤애애애액-!”

    웬 오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꽤액! 꽥!”

    세실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목을 감싸 쥐며 꽥꽥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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